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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카라바조와 바로크 회화

구정원

<Ecce Homo(Madrid)>, 1605-09, 캔버스에 유채 
ⓒ Caravaggio, Museo del Prado Madrid


마드리드의 한 작은 경매에 1,500유로로 출품된 스페인 무명작가 작품이 17c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의 선구자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의 회화 <Ecce Homo(Madrid)>로 밝혀지며 지난 5월 유럽미술계가 크게 들썩였다. 17세기 유럽 최고 컬렉터였던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 펠리페 4세(Felipe IV)의 소장품으로 추정된다.

트라우마로 가득 찬 어린 시절, 로마 최고의 화가로 전성기를 보내다 하루아침에 살인자가 되어 도주 중에 객사한 카라바조의 38년 인생은 그의 작품세계 만큼이나 바로크적이다. 하지만 도주 중에도 화가로서의 명성은 이어져 가는 곳마다 작품 커미션이 끊이질 않았다. 시칠리아 섬에 1년간(1608-09) 도피했을 때 제작된 세 점의 종교화는 지금도 시라쿠사, 메시나, 팔레르모의 성당 제단에 설치되어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그의 예술세계가 미술사에서 제대로 평가된 시기, 바로크 미술이 재평가된 시기 또한 19c 사실주의에 이르러서였다. 이성과 규범 안에서 찬란하게 꽃피웠던 르네상스 시대가 막을 내리고, 과학의 발전과 신대륙의 발견 그리고 종교분쟁으로 격동기 새 시대를 맞이하는 전환점에서 발화한 이 시기 회화는 반항적이고 역동적이며 능동적인 형태의 미술로 진화했다. 불안정한 구도와 극단적 명암(Chiaroscuro)의 연출, 그리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으로 구현한 인간 내면의 심상으로 어우러진 회화는 영감에 호소하며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회화의 형식이 규범을 지양했던 그 후대 신고전주의자에겐 불편하게 다가왔고 그들은 이 미술을 모난 진주, 즉 ‘바로크’라는 별칭으로 부르며 조롱했다. 그러나 19c 사실주의 미학자들이 바라본 바로크미술에 대한 시각은 달랐다. 그들은 바로크를 특별한 진주로 해석하고, 이 양식을 서양 근대 미술의 근간으로 추앙했다. 스위스 미학자 뵐플린(Heinrich WÖLFFLIN)은 저서 『르네상스와 바로크』(1888)에서 고전주의와 바로크 시기의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강조하며 바로크를 미술의 중요한 장르로 공식화하였다. 특히 카라바조의 테너브리즘(Tenebrism), 즉 빛과 어둠의 매우 극단적 대조를 통해 화면에 긴장감을 자아낸 이 기법을 전위적인 표현법이라 호평했다. 

바로크 회화는 종교개혁으로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반종교개혁을 펼치던 로마 교황청의 메시지를 대변하는 훌륭한 도구이기도 했다. 전염병과 기아로 죽음이 항시 도사리는 삶을 살았던 당시 유럽인에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인생의 유한성과 덧없음은 그 시대적 정서로 자리 잡았다. 교회는 이러한 정서를 바로크 미술을 통해 더욱 드라마틱하게 재현하여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더욱 화려하고 웅장해진 바로크 교회 건축물 안에서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진행된 예배 의식은 신도에게 마치 하나의 오페라와 같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신앙심이 깊었던 카라바조는 또한 성경의 본질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성인의 모습을 남루한 차림의 노동자로 묘사했고, 죽고 죽이는 장면 또한 가감 없이 표현했다. 그의 회화에서 보이는 이러한 자연주의적 성향은 지금도 그를 근대미술의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이다. 

카라바조의 바로크적 천재성은 르네상스 고전 미술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되었다. 밀라노에서 미술에 입문할 당시 13세였던 그의 첫 스승 ‘페테르자노(Simone PETERZANO)’는 베네치아 르네상스 회화의 대가 티치아노(Tiziano VECELLIO)의 제자였고 그를 통해 베네치아의 독특한 회화기법을 연마했다. 콜로레(Colore)는 디제뇨(Disegno) 즉 드로잉을 생략하고 캔버스에 붓으로 바로 구도를 잡고 채색하며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인데 이는 후에 카라바조가 본인의 회화에 즉흥성을 불어넣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올해 8월 카라바조의 흔적을 찾아 시칠리아 섬을 방문했다. 전성기 명작을 뒤로하고 무명시절에 그려진 한 미소년의 놀란 눈에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물이 내 마음속에 애잔하게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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