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내내 관광객을 맞이하는 도심 속 유명 박물관·미술관·아트센터·공연장과 달리, 근교로 눈을 돌리면,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특정 예술가의 작품 세계와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숨은 문화 예술 명소를 찾아볼 수 있다. 그 중 하나인 와튼에셔릭박물관(Wharton Esherick Museum, 이하 WEM)은 순수미술, 공예, 디자인, 건축적으로 작가의 예술적 성향과 감각이 살아 숨 쉬는 예술 공간이다.
와튼에셔릭박물관 중 집과 스튜디오 전경
ⓒ 제공 황정인
WEM은 예술가 와튼 에셔릭(Wharton ESHERICK, 1887-1970)의 집과 스튜디오를 보존한 박물관이자 미국 건축사의 랜드마크 중 하나로, 펜실베이니아주 체스터 카운티의 밸리 포지 산꼭대기에 자리하고 있다. 숲으로 둘러싸인 약 50,000㎡ (1만 5천 평)부지에 있는 이곳은 40년에 걸쳐 작가가 손수 지은 스튜디오 건물과 차고·목재 창고·가구 전용 작업실·농가·회화 전용 스튜디오로 이뤄져 있다. WEM은 건축사와 더불어 미술사적 측면에서도 작가의 예술과 공예를 향한 자유롭고 개성 넘치는 표현을 잘 간직하여 문화 예술계 전반에서 활동하는 모든 이에게 영감을 주는 곳이다. 특히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가 루이스 칸과 협업한 작업실은 엄격한 기하학적 구조를 강조한 칸과 유기적인 형태를 선호했던 에셔릭 두 사람의 미학적 접점이 만나 빚어낸 결과물로 유명하다.
참고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가구 디자이너이자 예술가 중 한 명인 에셔릭은 스튜디오 퍼니처 운동(Studio Furniture Movement)을 이끌며 미국 미술사와 현대 디자인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가구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그림·판화·드로잉·조각을 아우르는 순수미술과 공예·문학·건축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창작 활동으로 끊임없이 진화하는 예술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줬다. 특히 조각적인 형태를 지니면서 공간과 잘 어우러진 그의 가구는 작가의 예술적 비전을 반영하는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 자리매김하면서, 오늘날에도 많은 예술가와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와튼에셔릭박물관 중 루이스 칸과 함께 디자인한 작업실 전경
ⓒ 제공 황정인
에셔릭은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나무라는 재료에 관심을 두고, 그 본질과 재료적 특성을 이용한 가구와 공간 표현에 집중하기 시작했는데, 나무를 이용한 그의 조각적 가구와 유기적이고 자유로운 표현, 창의적인 공간 연출은 현재 박물관 공간을 창조한 원동력이자 WEM 정체성의 핵심을 이룬다. WEM은 실제로 작가가 거주하고 작업하던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여 바닥 장식부터 천장·가구와 계단·침실·주방·옷걸이·조명·거울·문·각종 문고리와 옷걸이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예술적 미감과 창작의 손길이 묻어있는 인테리어 아이디어와 각종 오브제로 관객을 매료시킨다. 생활 공간에서 직접 사용하는 사물과 공간 자체를 나무로 표현했기 때문에, 관객은 도슨트의 안내에 따라 조각과 가구 작품을 직접 만져볼 수 있다. 각각의 오브제와 공간의 요소로 자리한 가구는 사용자의 편안함과 시각적인 즐거움을 고려하면서 창작자의 재치와 유머를 전달하는데, 이는 스튜디오가 곧 자신의 자서전이라고 생각했던 작가의 예술적 열정과 디자인 철학을 잘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WEM은 올해 10월부터 내년 9월까지 브랜디와인미술관(Brandywine Museum of Art)과의 공동 기획으로 열리는 와튼 에셔릭의 순회전을 기념하여, WEM의 공간과 에셔릭의 예술 세계를 연구한 큐레이토리얼 에세이가 수록된 책 『The Crafted World of Wharton Esherick』(2024, 리졸리엘렉타)을 발간했다.
무엇보다 WEM은 동시대 작가와 함께하는 연례 주제 기획전·신진 작가 공모전·아카이브 연구 사업·네트워킹 등 다채로운 활동을 펼치며, 작가가 생전에 보여준 예술을 향한 열정과 철학, 의지를 이어나가고 있다. 한 작가의 예술적 유산을 지키면서, 이를 새로운 세대로 확장, 진화하기 위한 WEM의 노력은 오늘날 개인 작가의 창작 공간과 유산 보존 및 관리의 중요성, 예술적 유산과 동시대 문화 간의 관계 구축의 필요성 등 문화 예술계가 고민하는 여러 과제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