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은 1946년 4월 부산 출생으로 소설가 오영수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현대문학 창간에 참여하여 가족 모두 서울로 이사한다. 미술교사이기도 했던 아버지가 오윤의 미술적 재능을 알아보며 미술공부 권유하였고, 1970년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회화과 다닌 누나인 오숙희의 후배 김지하 시인으로부터 사회적, 정신적 영향을 주고받았다. 1969년 김지하, 김윤수 등과 함께 ‘현실동인’을 만들어 현실동인전을 열기 전날 회원이 포스터를 붙임으로서 보안당국과 교수들에 의해 좌절되었고, 이에 김지하 등과 함께 ‘현실동인 제1선언문’을 발표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1970-80년대의 사회적인 아픔에 크게 분노를 하며, 대학시절 멕시코 벽화운동 및 탈춤, 판소리 등에 관심 가졌던 계기로 인해 후에 자신의 생각을 쉽게 대량으로 찍어내어 대중들에게 나타낼 수 있는 목판화에 주목을 하며 화업을 진행했다.
애비, 광목-목판 36×35cm
바람부는 곳, 광목-목판 채색 29×36cm
1973년 전돌공장에서 일하며 전통 흙 다루는 기술을 배웠고, 1974년 상업은행 종로4가 지점과 구의동지점의 내·외벽 테라코타 부조도 제작했다. 1976년 수유동에 작업실을 열었고, 한윤수가 운영한 청년사가 설립되어 다수의 책 표지 및 삽화 제작하였다. 1977년부터 1983년까지 선화예술고등학교에서 미술과 강사로 재직하였다. 1979년 11월 ‘현실과 발언’ 창립멤버로 동인활동에 참여하면서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선구적인 인물이 되었다. ‘현실과 발언’ 동인전에 작품을 출품하는 동시에 꾸준히 정치적, 사회적인 주제를 담은 포스터 및 테라코타 벽화, 대형 걸개 등을 제작하며 민중미술의 발판을 다졌기 때문이다. 1982년 김호득, 민정기 등과 서대문 미술학원을 설립하여 조소를 가르쳤지만 잦은 음주 및 흡연으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진도로 요양을 떠났다. 1986년 그림마당민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연 후 간경화 증상이 악화되어 만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민족미술협의회장’으로 벽제 문봉리 국제공원 묘지에 안착하게 된다. 사후에 민중미술, 현대 판화의 선구자로서 인정받아 2005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마케팅V-지옥도, 캔버스 혼합매체 174×120cm 1981
그의 대표작으로는 <칼노래>, <낮도깨비>, <소리꾼>등이 있다. 그는 다양한 작품활동을 했지만 그 중에서 판화작업을 많이 하였는데, 그의 남겨진 스케치와 완성된 작품들을 보면 굵은 선들과 강렬한 표정, 율동감 넘치는 자세를 하고 있는 민중, 자연, 사회적인 주제로 민중의 삶을 표현했다. 우리 사회모습을 현실적∙해학적∙풍자적으로 담아냄과 동시에 한국의 전통 민중문화인 굿, 탈춤 등을 연구하고 나타내어 우리 민족들의 희로애락을 작품으로서 승화시켰다.
대지V, 종이 목판 41.5×35.5cm 1983
사상팔면도 1983, 목판, 종이 45×43.5cm
그의 첫 개인전인 1986년 그림마당민에서 열린 ≪칼노래-오윤 판화전≫이후로 1996년 10주기 추모전으로 대구 맥향화랑에서 ≪오윤 판화전≫, 서울 학고재에서 ≪오윤-동네사람 세상사람-≫이 열렸으며, 2006년 20주기 회고전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오윤-낮도깨비 신명마당≫, 가나아트센터에서 ≪오윤/대지1965∼1986≫이 개최되었다. 2012년 아라아트센터, 2013년 부산 미부아트센터, 2016년 30주기 회고전이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