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렘브란트의 ‘블루 오션’

오병욱

렘브란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이다. 그의 대부분 작품들의 특징은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조명탄이 터지고, 그 섬광이 사람이나 물체들을 쓸고 지나간 것처럼 강렬한 대조의 명암이 만들어내는 극적인 효과이다. 그의 시대였던 17세기에도, 또 지금 21세기에도 보는 사람의 눈을 강하게 잡아끄는 것은 이 극적인 명암효과이다. 렘브란트 명암법으로 잘 알려진 이 강렬한 명암법은 원래는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지오가 시작한 것이었는데, 렘브란트는 이를 더욱 과장하여 그의 그림의 특징으로 만들었다.

-명암대비와 거친 질감의 파격-

그의 그림의 또 다른 특징은 물감이 덕지덕지 붙은 것 같은 거친 질감이다. 어떤 초상화는 하도 두껍게 그려져서, 그려진 사람의 코를 붙잡아 끌어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농을 듣기도 했다. 당시 화가들이 대상을 거울에 비친 듯이 매끈하게 그려냈던 것과 비교하면 파격 중의 파격인 셈이다.

17세기 네덜란드 그림들은 실제보다 더 진짜 같음을 최고로 친다. 그들의 정물화, 풍경화들을 보면 그 섬세하고 치밀한 묘사에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시력을 상해가면서 인내하며 그려낸 그들의 작품가격은 제작에 투자한 시간에다 작품의 완성도를 곱하고 그것에 명성도를 곱한 것이었다. 작품의 완성도는 물론 얼마나 닮았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대적 양식과 렘브란트의 작품은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어떻게 렘브란트가 유명해질 수 있었겠는가?

스베트라나 알퍼스 버클리 대학 교수는 1987년 렘브란트에 대한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그녀는 렘브란트의 성공은 당시 17세기 네덜란드의 사회경제적 여건에 기인한다고 한다. 주지하듯이 자본주의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렘브란트는 그의 명성을 자본주의의 시스템인 시장과 거리 전시 판매 그리고 경매에서 쌓아 올렸다.

렘브란트 이전에 혹은 그의 이후에도 유럽의 화가들은 그들의 명성을 종교계나 왕실로부터 ‘하사’받았다. 자존심이 강했던 렘브란트는 그 후원자와 화가의 시스템 속에 들어가 봉사하기를 원하지 않았는데, 마침 미술시장이 생겼고, 그는 이를 최대한으로 이용해서 명성과 부를 쌓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 그는 식스(Six) 가문의 젊은 얀(Jan, 후일 암스테르담의 시장이 된다)과 일종의 후원자 관계를 몇 년 간 맺고 있었는데, 얀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그를 직업 모델처럼 그렸고, 얀이 희곡을 쓰고 삽화를 부탁하자 엉뚱한 그림들로 채웠고, 결국 해고되었다. 봉사하기보다는 스스로의 명성을 만들고 싶었던 그는 미술품 시장과 경매에서 성공했고, 한때 실패해서 파산했고, 다시 경매시장에 뛰어들었다. 어떻게?

렘브란트는 그림의 완성도와 투자된 시간의 개념을 무너뜨렸다. 그가 초상화를 주문 받으면, 그가 원하는 포즈로 주문자들을 세우고, 부동자세를 오랜 시간 인내하게 만들었고, 매끈하게 그리지도 않았다. 주문자들이 필경 다시 그려달라고 요구하면, 여러번 다시 그려주었다. 완성도와 시간의 제약은 그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만약 주문자가 끝까지 닮지 않았다고 항의하면, 얼굴과 포즈를 적당히 고쳐서 종교화나 역사화의 주제 그림으로 바꾸어서 경매시장에 팔았다. 가치의 산정과 완성의 판정은 완전히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미술시장·경매서 명성 쌓아-

그의 동판화 에칭 작품도 경매시장에서 꽤 인기가 있었는데, 그는 한 장의 동판으로 여러 장의 동판을 만들었다. 즉 어떤 장면을 찍어내서 팔고, 그 위에 여러 가지를 추가해서 판각한 후에 또 찍어 팔고, 그 위에 명암효과를 추가한다든지 해서 또 찍어 파는 식으로 판각 단계를 시리즈화하는 것은 그에게 큰 성공을 가져다주는 상업 시스템이 되었다. 수집가들은 각 단계 모두를 소장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제작과정 중에 있는 작품들에 대한 주문까지도 창출했다.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이 자연과 경쟁하고, 서로 경쟁하는 동안 렘브란트는 자본주의로 변화하는 시장의 흐름을 읽고, 극적인 명암대조라는 신무기와 연작 형식의 판화작품으로 물량을 확보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작년의 유행어였던 ‘블루 오션’은 17세기에도 이미 있었던 것이다.

출처-경향신문 1.11 '문화로 읽는 세상'<<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