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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중앙아시아 유물] 오타니 컬렉션

편집부




서울에 있는 중앙아시아의 보물 오타니(大谷) 유물을 아십니까?
일본 승려 오타니, 각 나라 국보급 대량 수집…재정난 직면해 유물 흩어져
한·중·일, '오타니 컬렉션' 보관…중앙박물관, 동양관 신설해 전시 계획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외국 유물의 ‘백미(白眉)’인 중앙아시아 유물, 즉 ‘오타니 컬렉션’은 모두 1500여점이다. 이는 질적인 면에서 세계적인 컬렉션이라고 할 수 있다. ‘오타니 컬렉션’은 서구 열강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중앙아시아에 앞다퉈 탐험대를 파견했을 때 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려했던 일본의 탐험대에 의해 수집된 것이다.
19세기 말 영국 런던에서 유학 중이던 일본 교토(京都)의 정토진종(淨土眞宗) 본원사파(本願寺派) 니시 홍간지(西本願寺)의 제22대 문주(門主)였던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ㆍ1876~1948)는 영국과 스웨덴 탐험대에 자극을 받아 부하 승려들과 함께 불교동점(佛敎東漸)의 요지인 중앙아시아 탐험을 계획했다. 서구 열강들의 중앙아시아 탐험이 모두 국가의 지원 내지는 박물관 등의 후원을 받은 조직적인 것인데 반해 오타니 탐험대는 개인의 의지로 결성된 것이었다. 그 탐험은 니시 홍간지의 재력을 바탕으로 세 차례에 걸친 종합 조사였다. 탐험 범위는 서역 지방을 중심으로 티베트, 네팔, 인도 그리고 윈난(雲南), 쓰촨(四川)을 포함한 중국 각 지역 및 동남아시아에 이르렀으니 아시아 전역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미르·중국·인도 등 전역 누벼
오타니 탐험대의 세 차례에 걸친 탐험과정을 들여다보자. 1902년 8월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도(歸途)에 오른 오타니는 혼다 에류(本多惠隆), 이노우에 고엔(井上弘圓), 와타나베 뎃신(渡邊哲信), 호리 마스오(堀賢雄) 등 네 명의 수행원을 동반하여 서투르키스탄 철도의 종점인 러시아의 안디잔(현 우즈베키스탄의 동부)에 이르렀으며 이어서 파미르를 넘어 카슈가르에 들어갔다. 일행은 타슈쿠르칸에서 두 파로 나뉘었다. 오타니는 혼다, 이노우에 두 수행원과 함께 파미르, 길기트, 인도를 경유하여 일본으로 돌아왔으나, 일행 가운데 와타나베, 호리 두 사람은 타슈쿠르칸에서 다시 타림분지로 향하여 호탄에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한 후 천산북로 일대를 조사하고 중국에 이르렀다.
1906년부터 이듬해에 걸쳐서는 오타니 스스로 중국으로 향했으며 1908년에는 노무라 에이자브로(野村榮三郞), 다치바나 즈이초(橘瑞超) 두 사람에 의한 제2차 중앙아시아 탐험이 이뤄졌다. 그리고 1910년에는 다치바나에 의한 제3차 중앙아시아 탐험이 감행됐으나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정세가 불안하여 탐험도중 다치바나와 임무교대를 목적으로 돈황에 파견된 요시카와 고이치로에 의해 계속돼 1914년까지 조사가 이뤄졌다.
특히 요시카와는 다른 학승과 달리 사찰을 지키는 사무라이 출신이었기 때문에 매우 적극적으로 유물을 발굴하고 수집했다.
오타니 컬렉션 가운데 투르판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은 바로 제3차 탐험대에 의해 수집된 것이며, 국립중앙박물관의 서역유물 역시 베제클릭 석굴사원의 벽화를 비롯해 투르판에서 가져온 것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헐리면서 중앙박물관에 ‘둥지’
이처럼 오타니 탐험대는 1902년부터 191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중앙아시아 각지를 탐사해 많은 유물을 수집했으나, 그 탐험은 오타니 개인에 의해 계획된 것이었기 때문에 재정운영상 문제가 발생했다. 오타니는 그 책임을 지고 은퇴했고, 탐험대도 기반을 잃어 수집된 유물은 뿔뿔이 흩어졌다. 다수의 벽화를 포함한 이들 서역유물은 현재 한국의 중앙국립박물관, 중국의 뤼순(旅順)박물관, 일본의 도쿄국립박물관 등에 수장돼 있으며 문서류는 일본 교토의 류코쿠(龍谷)대학에 보관되는 등 뿔뿔이 흩어졌다.
오타니의 은퇴와 함께 ‘오타니 서역유물’도 각자 유랑(流浪)길에 오르게 됐다.
일부 유물이 뤼순으로 옮겨지고, 그의 별장에 소장돼 있던 나머지 유물은 당시 정치가이자 사업가였던 구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에게 저택과 함께 팔렸다. 1916년 구하라는 같은 고향 출신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총독에게 이들 서역유물을 기증했고, 당시 총독부박물관은 경복궁 수정전(修政殿)에서 이를 전시한 것이 오타니 서역유물 ‘한국행’의 출발점이었다.
미 군정기 때는 셔먼이 이를 보고 한심하게 여겼다. 어떻게 세계적인 컬렉션을 목조건물에 전시, 보관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후 수장고에 넣어 보관했는데 6·25전쟁이 발발했고 유물은 미군 트럭으로 부산 광복동 창고에 옮겨져 보관됐다. 이어 부산대학교 수장고를 거쳐 경주박물관 수장고로 옮겨졌다. 1976년 다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올라왔고, 1986년 총독부 건물에 중앙아시아실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건물이 헐린 2004년 현재, 수장고 안에서 내년 용산의 새 국립중앙박물관에 둥지를 틀 때를 기다리고 있다. 2003년 12월~2004년 2월에는 첨단 보존기술을 활용해 5점의 벽화를 해방 후 처음 전시하기도 했다.
오타니 유물은 성과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뤄지기 전에 흩어졌으며, 젊은 승려 탐험대원들이 수집과 발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을 남기지 않아 유물 정리와 연구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오타니 탐험대의 이 같은 치명적 결함은 탐험 그 자체가 당시의 어수선한 국제정세 속에서 마치 보물찾기 하듯 전개됐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비교적 이른 시기에 탐험을 시작했고 학승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수행된 탐험이었기 때문에 불교유물의 경우, 상당히 높은 수준의 것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종교·생활·매장물 등 3분야로 대별
오타니 유물은 크게 종교 유물, 일상생활 유물, 매장(埋葬) 유물 등 세 분야로 나눈다. 첫째는 종교 유물이다. 서역의 석굴사원에서 절취해온 벽화 단편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의 지역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으며, 간다라 지방과의 문화적 관련성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소조불상류(塑造佛像類), 비단이나 마(麻)에 그려진 다양한 불화, 불전, 마니교 회화 단편 등은 불교뿐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토착적 요소, 종교 상호간의 영향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둘째는 일상생활 유물. 중앙아시아 문화는 극도로 건조한 사막지대의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일상생활의 의식주에 있어서도 습윤지대의 그것과는 매우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목재가 많지 않다는 지역 특성으로 인해 생활용기는 토제가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서역남도의 호탄 지방에서 제작된 토제용기는 그릇 표면에 틀로 찍어 제작한 첨부물을 반복 첨부하여 훌륭한 장식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 제작기법 역시 중앙아시아 지역 특징 중 하나이다. 경주의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에서 발견된 사천왕상전(四天王像塼)은 이런 기법이 한국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로프노르 지역에서 흔히 출토되는 직조용기(織造容器) 등은 현지에서 채취되는 재료를 사용해 고도의 기술로 직조한 것으로 서역지방에 있어서 일상생활 용기 제작의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청동제 인장과 세라피스상 등에서는 실크로드를 따라 전파된 헬레니즘 문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셋째로 투르판 지역에서 주로 출토된 매장유물은 이 지역을 통치했던 국씨고창왕국(麴氏高昌王國ㆍ502~640)과 당 지배계층의 생활상을 전한다. 고묘군에서 출토된 묘표(墓表), 진묘수(鎭墓獸), 복희여와도(伏羲女圖) 등에서는 중국 문화에 지역적 요소를 가미시켜 이를 새롭게 재창조해낸 서역인의 문화적 역량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인물인형 특히 여자인형에서는 당시 유행했던 화장법과 머리형태에 나타난 동서문화 교류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행정관서 폐기문서로 꼬아 만든 인형들의 팔은 당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행정운용의 구체적인 실태를 보여주는 ‘투르판 문서’의 일종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목록 정리·비교 작업 한창
그리고 죽은 자의 머리맡에 놓는 다양한 형태의 명기 표면에는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유행했던 전형적인 길상(吉祥) 문양인 연주문(聯珠文)이 묘사돼 있어 서아시아와의 문화교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연주문이 통일신라시대에 와당의 문양 등에 널리 사용된 점을 고려하면 당시 서아시아에서 한반도까지 이어졌던 실크로드의 구체적인 움직임과 문화교류의 양상을 짐작해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이 유물에 대해서는 오타니 컬렉션을 공유하고 있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중국 뤼순박물관의 소장품과 유럽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같은 종류의 컬렉션, 신중국(新中國) 성립 이후 신장(新疆)지방에서 출토된 자료 등을 종합적으로 비교 연구하는 작업과 이를 토대로 한 정확한 목록 정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출토지, 시대, 정확한 명칭 등의 결여라는 컬렉션의 치명적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은 1990년대 초반부터 거의 매년 현지조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적인 지보 석굴사원의 벽화를 보다 안전하게 관리하고 전시하기 위해 이제까지 개발된 모든 보존처리 방법이나 재료를 면밀히 검토한 후 우리의 독자적인 방법으로 보존처리하기에 이르렀다.
2005년 10월 용산에 개관하는 새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아시아 각지의 문화를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동양관이 신설될 예정이다. 한국 문화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주변 문화권의 성격을 이해함으로써 우리 문화를 보다 거시적으로 살펴보고 또 우리 문화의 고유한 속성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 주간조선 4월 29일자, 글 민병훈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중앙아시아 유물 어디에 있나?
인도 뉴델리 박물관 '스타인 컬렉션' 압권
중앙아시아 유물들은 최소 13개국의 박물관에 흩어져 있다.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 이외에 가장 대표적인 박물관은 5곳 정도다. 영국 대영박물관, 인도 뉴델리 국립박물관, 프랑스 기메 박물관, 러시아 에르미타즈 박물관, 독일의 베를린 인도박물관 등이 바로 그것이다.
대영박물관과 뉴델리 국립박물관에는 동양학 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스타인(A.Steinㆍ1862∼1943)’ 컬렉션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대영박물관에는 투르판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이 많은데 특히 불상과 일상생활 용구가 다수를 차지한다. 하지만 질적으로는 대영박물관의 유물보다 인도 뉴델리 박물관의 유물이 훨씬 뛰어나다.
프랑스 기메 박물관은 프랑스 정부에서 파견한 중앙아시아 탐험대장 ‘펠리오(P. Pelliotㆍ1878∼1945)’의 컬렉션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기메 미술관에는 서역북도(실크로드 중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변을 통과하는 지역)의 폐사지(閉寺地)에서 수집한 불상이 유명하고, 이는 불교조각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다. 또 돈황에서 가져온 불화 중에서도 좋은 작품이 많다.
러시아 에르미타즈 박물관에는 중앙아시아학의 대가인 ‘올덴부르크(S.F.Oldenburg·1863∼1934)’ 컬렉션이 유명하다. 특히 이곳에는 서역남도의 호탄에서 출토된 도기와 베제클릭 석굴사원의 벽화 서원화(誓願花ㆍ부처가 전생에 부처가 될 것을 서원하며 공양한 꽃)의 전체그림이 소장돼 있다.
독일의 베를린 인도박물관에는 ‘르 코크(A.v.Le Coqㆍ1860∼1930)’ 컬렉션이 소장돼 있다. 르 코크는 벽화절취의 명인인 바르투스와 함께 서역북도상에 위치한 키질 석굴사원과 같은 불교유적을 집중 조사했는데, 이 때문에 박물관에도 벽화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하지만 이들 벽화의 많은 부분이 2차 대전 때의 공습에 의해 재로 변했다.
- 주간조선 4월 29일자, 박란희 주간조선 기자(rhpark@chosun.com)


◈ 민병훈 학예연구관
“오타니 유물 1500여점 한국서 보관”
국립중앙박물관 민병훈(50) 학예연구관은 중앙대 사학과, 일본 와세다대학 동양사 석사, 중앙대 동양사 박사과정을 마쳤다. 서울교대 강사를 거쳐 1997년부터는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을 지냈고 2000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왔다. 다음은 일문일답.
-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오타니 유물의 특징은 무엇인가.
“오타니 유물은 한ㆍ중ㆍ일 합쳐 모두 5000여점이다. 그 중 1500여점이 한국에 있고 벽화가 50여점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벽화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내용은 석가모니의 자기희생적인 전생 이야기가 많다. 어린 원숭이를 구하기 위해 다리로 변한다든지 굶주린 백성을 위해 먹이가 되어주는 것 등이다. 조각의 경우 틀로 찍어서 머리와 몸체를 붙이는 기법이 많이 사용됐다.”
- 오타니 벽화 전시를 위해 활용되는 첨단 보존처리 기법이란 어떤 것인가.
“벽화는 장기간 노출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는 데다가 아직도 흙이 묻어 있어 매우 무겁다. 흙을 다 긁어낸 후 화학약품 처리를 하고, 강하면서도 가벼운 보강재인 듀랄루민(비행기 본체에 사용되는 소재)으로 액자 틀을 만들었다. 이는 더 좋은 재료를 발견했을 때 바꿀 수 있다는 장점을 지녔다. 이러한 우리 기법이 세계 최첨단으로 알려져 있다.”
- 유물 탐사여행 중 기억나는 일은.
“운전수의 실수로 사막에서 물이 떨어져 죽을 뻔한 적이 있다. 그리고 현지인들의 문화에 적응하면서 생긴 일들이 많다. 일단 그들의 식문화에 적응하려는 모습을 보여줘야 유대감과 신뢰가 생겨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지금은 중국, 일본 학자들과 형제처럼 친해져서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다.”
- 오타니 유물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
“1980년대 초 일본유학 중 오타니 탐험대에 관한 책을 읽고 평생 연구과제로 점찍었다. 컬렉션을 나눠가진 한ㆍ중ㆍ일, 세 나라 박물관의 공동연구를 통해 총체적인 유물정보 목록을 만드는 게 꿈이다.”

- 주간조선 4월 29일, 서일호기자(ihseo@chosun.com)
※ 첨부파일 1. 오타니 고즈이 사진
※ 첨부파일 2. 한국에 온 중앙亞의 '예술혼'
(주간조선 4월 29일자, 26-2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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