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들머리에서 고 박계희 여사의 초상을 바라보고 있는 이광호 연세대 명예교수. [사진 우란문화재단]
지난 달 29일 오후 6시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 아트홀. “생전 어머님께서 심혈을 기울이셨던 옛 워커힐미술관 공간에서 작은 기념전을 열고자 합니다”라는 최태원(57) SK그룹 회장의 초대장에 한걸음에 달려온 미술계 인사 50여 명을 최 회장의 여동생인 최기원 우란문화재단 이사장 겸 SK행복나눔재단 이사장이 맞았다.
모친 우란(友蘭) 박계희(1935~97) 여사 타계 20주년 기념전 ‘기억(MEMORY)’을 여는 남매의 태도는 고인의 생전 성품처럼 정갈하고 조용했다.
우란 박계희 여사의 생전 활동을 기록한 사진을 보고 있는 관람객.
“오래 잊혀져있던 작품을 20여 년 만에 다시 보니 감회가 깊어요. 미술품도 팔자가 있다더니 이렇게 귀중한 소장품이 새 생명을 얻는군요.”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은 1980~90년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독특한 역할을 담당했던 워커힐미술관의 설립자와 그의 정신을 기렸다. 1984년 개관한 워커힐미술관은 대기업 사주의 부인이 운영하면서도 전면에 나서지 않고 전문가의 안목을 존중하는 태도로 신뢰를 얻었다. ‘60년대의 한국 현대미술-앵포르멜과 그 주변’ ‘앤디 워홀 전’ ‘사진-새 시좌’ ‘유럽 비디오아트 전’ 등 당대 한국미술의 좌표와 세계미술의 첨단을 정확하게 짚어주는 기획전을 열어 변방에 있던 우리 미술인의 눈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특히 사진‧판화‧섬유예술‧금속공예‧포스터‧장신구‧비디오 아트‧홀로그래피 등 비주류 장르를 다양하게 소개해 시각의 균형을 잡아준 점이 평가받는다.
워커힐미술관 연보를 살펴보는 김달진 미술연구소장(왼쪽)과 김정현 연구실장.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은 “1000여 점으로 추정되는 박계희 컬렉션은 당대 현대미술을 집약한 작품으로 세계 미술계와 어깨를 나란히 한 안목이 우리의 자부심이 됐다”고 설명했다. 최은주 경기도미술관장은 “옛 작품을 다시 보니 대학시절 워커힐미술관에 돌아온 듯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라고 기뻐했다. 전시 뿐 아니라 ‘김금화 초청 굿’을 비롯해 ‘일본의 전통음악’ ‘사크티 인도 무용’ ‘김소희-흥부가’ ‘이생강 대금 연주’ ‘김덕수 사물놀이’ ‘국제 행위예술제’ 등 무대 공연 수준도 전시회 못지않은 평판을 얻었다.
박계희 여사는 40대 초반부터 동양사와 한학, 서예에 입문해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열정을 품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학자 청명 임창순 선생은 ‘우란서실(友蘭書室)’이란 글을 보내 그의 공부를 응원했고 우란이 자연스럽게 고인의 호가 됐다. 시어머니의 유품을 물려받아 아트센터나비를 운영하던 최 회장의 부인 노소영 관장은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소장품 갈무리에서 손을 뗄 것으로 보인다.
5일까지 이어지는 기념전은 엄선한 90여 점 대표작을 보여주며 앞으로 우란 컬렉션이 어떤 형식으로 관람객과 만나게 될지 기대하게 만든다. 김구림‧김봉태‧최인수 작가,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과 이화익 한국화랑협회장 등 화랑계 인사, 김달진 한국미술연구소장과 이광호 연세대 명예교수 등은 고인을 추억하며 오랜만에 만난 작품들 앞을 서성였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