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양대 산맥인 서울대와 홍익대를 비집고 이화여대 파워가 커지고 있다. 김선정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52)와 이화익 화랑협회장(60)을 비롯해 미술판을 쥐락펴락하는 요직에 이대 출신들이 잇따라 등용되고 있는 데다 실험적인 젊은 작가와 이론가들도 쏟아지면서 판을 뒤흔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영향력의 정점에는 이대 서양화과 출신인 김선정 대표가 있다. 그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딸이자 재벌가 안주인이라는 후광뿐 아니라 현장성과 전문성으로 이미 수년째 국내에서 가장 막강한 큐레이터로 군림하고 있다.
지난달 13일 광주비엔날레 대표로 취임하면서 예산 100억원에 가까운 광주비엔날레를 진두지휘하는 막중한 임무도 떠맡았다. 내년 9월 개막하는 광주비엔날레를 대중적으로도 흥행시킨다면 앞으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 파워를 누릴 것으로 전망된다.
140여 개 화랑이 소속된 한국화랑협회를 이끄는 이화익 협회장(이화익갤러리 대표)도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영문과 출신으로 미술사로 석사를 밟은 그는 국립현대미술관과 현대화랑 큐레이터를 역임하며 기획력을 쌓았고 2001년 화랑을 열자마자 김동유와 최영걸 등 유망한 작가 발굴에 나섰다. 지난 2월 화랑협회장에 취임한 이후 정부의 잇단 미술계 규제 드라이브에 제동을 거는 데 역량을 모으고 있다.
이 협회장과 동갑이자 전공이 같은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60)는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를 역임한 전문성으로 무장한 중진 화상(畵商)이다.
세계 최고 아트페어인 스위스 아트바젤에 국제갤러리와 함께 유일하게 참여하는 화랑으로 단색화 작가 중 작고한 윤형근이 소속돼 있으며 경쟁력 있는 현대미술 작가 전시를 개최해 주목받고 있다.
광주비엔날레 총감독과 경기도미술관장을 거쳐 서울시립미술관장을 역임한 김홍희 큐레이터(69)도 행정력과 기획력을 검증받은 이화인이다. 불문과 출신으로 남편 따라 미국 뉴욕에서 백남준 퍼포먼스를 본 것이 늦깎이로 미술계에 입문하는 계기가 됐다.
기업 비자금 스캔들마다 단골로 등장했던 홍송원 서미갤러리 대표도 사회체육과 출신. 정재계 안주인들과 두꺼운 인맥과 사교력으로 입지를 다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도 송향선 가람화랑 대표, 유명분 카이스갤러리 대표, 배혜경 전 크리스티 한국사무소장, 이승민 큐레이터 등 미술시장 곳곳에 이대 출신들이 포진해 있다.
이처럼 이대 파워가 커진 것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진 데 따른 결과로 해석된다. 한때는 대학 졸업 후 현모양처를 꿈꾸며 전업주부로 사는 경우가 많았지만 1990년대 들어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었다. 일의 성취와 사회적 관계가 점점 중요해지면서 가족의 틀을 깨고 사회로 나오려는 숫자가 많아졌다. 특히 컬렉터와 작가의 관계에서 소통 능력과 안목이 중요한 미술계는 여성들이 리더십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대표적인 분야로 손꼽힌다.
이대 출신 김지희 작가는 '이론 쪽으로 미술사 복수전공과 부전공 시스템이 잘돼 있어 실기 전공생들도 갤러리스트로 갈 수 있는 준비가 잘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대 인맥은 사실 역사와 뿌리가 깊다. 1945년 광복과 함께 국내 최초 미대를 설립한 곳이 이대다. 서울대와 홍익대는 각각 1946년과 1949년에 미대를 세웠다.
김환기를 세계적 작가로 키운 부인 김향안 여사뿐 아니라 사립미술관으로 꾸준히 한국 작가 개인전을 열고 있는 김경자 OCI미술관장도 이대 동문이다. 황주리 우순옥 김보희 강애란 등 중진 작가뿐 아니라 정소연 김지희 김미영 등 젊은 작가들도 화단에서 보폭을 넓히고 있다.
김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장은 '이대 미대 역사를 돌이켜봤을 때 이대 파워가 부각된 것은 늦은 감이 있다'며 '이대 출신 작가들은 '치열함 부족'이라는 꼬리표를 달았지만 이제는 그런 시선도 희미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열 미술평론가는 '이대는 설립 초기에 자수나 채색 동양화를 가르치며 이른바 현모양처를 양성하는 기관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으나 페미니즘 바람이 불었던 1980년대 이후부터 여성이라는 틀을 깨고 실험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늘고 있다'고 평했다.
- 매일경제. 2017.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