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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의 정점, 르네 마그리트

윤혜선

초현실주의의 정점, 르네 마그리트

르네 마그리트는 1898년 11월 21일 벨기에 레신 출신이다. 어린 시절 자살한 어머니에 대한 영향으로 미술을 마술적이며 계시적 매체로 인식하였고 회화의 환상적인 특징을 강조한다. 1916년 브뤼셀의 미술학교에서 시작된 초기 화풍은 키리코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괴상한 물체나 인간끼리의 만남 등과 같은 풍경을 그린다. 전통 회화기법 즉, 고전적인 색상의 조화나 대비 효과 등을 거부하고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화면에 대상의 외향을 꾸밈없이 재현한다. 전반적으로 대상의 세부를 확대하고, 연관성 없는 두 개 사물의 만남을 그려내고, 무생물을 생명 있는 미술로 도치하는 특징을 보인다. 서로 다른 의미의 사물들을 하나로 결합시키거나 사물이 갖는 고유한 이미지를 변형시켜 전혀 다른 의미의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화면 속에 탄생시킨다. 즉, 지극히 평범한 형상묘사의 방법으로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역설의 외양을 가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대부분 처음 마그리트의 작품을 접할 때 개념적인 혼란,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작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여러 의문점을 제기하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러했고 이 점이 흥미로워 마그리트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마그리트의 작품을 감상하고 난 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당연한 해석, 의미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느끼는 놀랍고 당황스러운 감정과 마그리트가 말하고자 한 의도에 대해 공감을 하면서도 여전히 의문이 남고 시원하게 끝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한한 경쟁 시대 속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이 잠시 지나간 것을 한 번 더 유심히 살펴보고 되돌아보게 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이미지의 반역;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르네 마그리트, 1929, 캔버스에 유채, 60 x 81 cm

<이미지의 반역: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회화가 가지는 인식의 영역에 질문함으로서 회화의 본래 의미를 되짚어보게 한 작품이다. 처음 작품을 감상하고 난 후 당황스러웠다. 캔버스 위에 파이프가 명확하게 그려져 있지만, 프랑스어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글이 적혀있기 때문이다. 마그리트는 단어와 이미지의 이율배반, 즉 파이프를 파이프라 하지 않는 모순된 어법을 통해 작품을 보고 난 후의 관람객에게 의문을 던진다. 물론 이것은 화폭 위의 물감이지 파이프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파이프처럼 생긴 가짜 파이프인지,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긴 하나 실제 파이프는 아니라는 의미인지, 이미지와 글자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인지와 같은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사람들이 형상이 시각적 사실과 유사하게 그려질 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면서도 형상보다 언어를 더욱 신뢰하는 경향이 있고 이러한 경향 때문에 혼란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마그리트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나의 그림을 상징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은 작품의 진정한 본질을 무시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물건을 사용할 때는 그 물건 속에서 상징적 의도를 찾지 않지만, 그림을 볼 때는 그 용도를 찾을 수 없고 회화를 접하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미를 찾게 된다. 사람들은 편안해지기 위해 의지할 만한 것을 원한다. 안전하게 매달릴 만한 것을 원하고 그렇게 하여 공허함에서 자신을 구할 수 있다. 상징적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본질적인 시적 요소와 이미지의 신비함을 간과하게 된다. 아마도 이러한 신비함을 감지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떨쳐 버리고 싶어할 것이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음으로써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만약 신비함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완전히 다른 반응을 할 것이다.”라고 한다. 이는 그가 세계에 대한, 그려진 대상과 참 대상 사이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가정에 질문을 던진 이유를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이 말을 통해 그가 자연주의적 또는 사실묘사적 초현실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전통적으로 미술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던 ‘소통’이라는 미술의 공인된 가치의 원천을 공격했다. 이것이 마그리트가 어떠한 초현실주의자보다도 문학적이고 그림을 그리는 철학자로서 언급되는 이유라 할 것이다.
결국 마그리트는 형상들의 배반을 통해 사람들이 가지는 고정관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운 의미체계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 이러한 재현방법은 이미지와 텍스트간의 간극을 드러내는 것으로 언어학적 관점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지칭하는 것은 언어가 지닌 성질이 사물의 성질과 일치하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 ‘파이프’와 언어 ‘파이프’는 성질에 있어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서는 그것을 당연히 여긴다. 마그리트는 바로 이 일상성에 대한 파동을 일으켜 기존의 언어 질서를 근간부터 흔든다. 파괴된 질서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의 질서를 세울 작가의 제국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그 새로운 제국을 마그리트는 이 작품으로 일궈냈다.



<인간의 조건>, 르네 마그리트, 1935, 캔버스에 유채, 100 x 81cm

문자를 사용해 개념적 혼란을 주기도 하지만 문자를 사용하지 않은 작품도 있다. 그 예가 <인간의 조건>이다. 그림은 고전적, 사실적인 묘사로 그려졌으나 창밖의 풍경과 실내의 풍경화를 일치시킨 착시를 의도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이 점은 이젤 위의 놓인 캔버스의 모서리 부분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미지의 반역>처럼 캔버스에 가려진 이미지는 무엇인지, 가려진 이미지의 창밖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창밖의 풍경이 캔버스의 그림과 일치하는 것은 맞는지와 같은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고전회화에서 나타나는 환영기법이 실제에 대한 환영을 부여하는데 목적이 있다면 마그리트의 착시의 목적은 ‘거짓에 대한 환영’을 부여하는데 있다. 마그리트는 거울이나 창을 이용해 실제 대상과 유사한 데생, 색채를 이용하는 고전적인 환영의 방식을 따르고 있지만 미묘한 시각과 시선 간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실제와 이미지간의 교환, 외부의 장면과 실내 간의 교환이 이루어지도록 함으로써 실제와 상상,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가까운 것과 먼 것 간의 공존이 이루어진다. 캔버스의 이미지는 사고방식에 의해 변형된 시각세계를 묘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적인 방식이 포함된 시각세계를 재현한다. 그래서 실제 세계와 상상의 세계로 중복된 이미지를 보게 되는 것이고 실제와 상상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파기하고 있다. 실제와 상상, 주관과 객관, 거짓과 진실의 불명확한 세계와 본래의 대상과 그려진 대상 간의 역전 가능한 동등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마그리트는 실제와 환영에 대한 상호관계를 탐구하고 이 둘 간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초현실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시작됨을 알려주는 듯하다. 

마그리트는 눈으로 목격한 바를 이해하는 방법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 세부묘사를 사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맥락은 앞서 언급한 마그리트의 말과 모순된다는 점에서 다소 의문이 든다. 더 나아가 그는 독일의 신객관성 화가들처럼 미학적인 측면보다는 그림의 의미를 더 중시했다. 의미라는 것은 부분적으로 또는 전반적으로 언어로서 설명될 수 있는 추론적인 내용이라는 전통적인 의미를 뜻한다. 그러나 마그리트의 작품을 본 순간 깨닫지 못하고 여러 의문점을 제기하는 상황에서 관람자 전부가 마그리트의 의도를 이해했는지에 대해서도 다소 의문이 든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점에도 불구하고 1차 세계 대전 이후 다다의 뒤를 이어 2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까지 약 20년 동안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초현실주의가 추구한 세계, 우연적 효과의 의미를 알려줄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초현실주의의 정점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마그리트의 작품은 그 자체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윤혜선 yhsun012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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