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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김옥선의 여전히 유효한 ‘해피 투게더’ | 한희진

현대미술포럼




김옥선의 여전히 유효한 ‘해피 투게더’



사진을 전공한 김옥선(1967∼)은 1996년 평범한 30대 여성들을 이들의 집에서 나체로 촬영한 <방안의 여성> 연작을 시작으로 2002년 대안 공간 풀에서 가진 개인전 《해피 투게더》로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여기서 전시된 <해피 투게더> 연작(2002∼2005)은 흔히 국제결혼이라는 용어로 일컬어지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여성들과 결혼하여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그들의 거주공간에서 촬영한 스트레이트 사진들이었다. 이 연작은 작가가 뉴욕 PS1 국제 스튜디오 프로그램 작가로 선정되어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뉴욕에 머무를 때 그곳의 국제결혼 커플들과 동성 커플들을 담은 사진으로 확장되었다. 

<해피 투게더> 연작은 독일 남성과 결혼한 작가가 한국사회에서 살면서 느꼈던 편견과 차별에서 시작된 작품이다. 집안의 반대를 비롯해서 둘의 사회·문화적 차이를 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한국 사회의 제약은 더 큰 일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국적법에 따라 한국 남성과 결혼한 외국여성은 비자 발급이 가능하여 한국에서의 법적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고, 자녀 역시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한국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이들은 한국인 부부와 다르지 않은 정상적인 가정생활 영위가 가능했다. 그러나 한국 여성과 결혼한 외국남성은 한국에서의 법적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고, 자녀는 남성인 아버지 국적을 따라야 했기에 한국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이는 외국인 여성과 남성에 관한 차별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 국내 여성과 남성에 대한 차별이었다. 이러한 국적법은 2003년이 돼서야 개정되어 외국인과 결혼한 한국 여성과 남성, 국외 이주민들이 남녀 상관없이 법적으로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 제도 내에서 교수였던 작가의 남편 랄프는 외국인에게 재직기간 동안의 승진이나 정년을 보장하지 않는 한국 대학의 부당한 처우로 사직한 뒤 다른 직업을 얻어야 했다.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가지 못하는(혹은 않는) 사회 제도의 부당함에 랄프는 분노하고 좌절했으며, 김옥선 또한 그 못지않은 심리·물리적 부담을 떠안아야 했다. 작가는 이러한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치유하기 위해 외국인 커뮤니티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부부 또는 커플을 대상으로 <해피 투게더> 연작을 찍기 시작했다.
 
먼저 작가 자신을 대상으로 한 <옥선과 랄프>(2000)는 인터폰으로 보아 거실에서 촬영된 것처럼 보인다. 의자에 앉은 김옥선의 시선은 카메라를 주시하고 있고, 랄프는 긴 다리에 맞지 않는 의자에 앉아 카메라를 비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 둘 사이에는 그들이 앉은 의자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소반이 놓여 있다. 작가에 따르면 좁은 공간에서 대형 카메라의 위치 상 어쩔 수 없이 나온 구도라지만, 마치 별 생각 없이 촬영한 것처럼 뚝 잘린 소반 다리와 랄프의 발, 비스듬하게 일부만 보이는 천장의 몰드 등으로 전체적인 구도는 불안한 느낌을 주고 있다. 

<해피 투게더> 연작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구성을 취한다. 등장인물은 부부 또는 동거 중인 커플이다. 때때로 이들의 아이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들이 있는 곳은 거주하는 집 안 거실, 방, 부엌 등으로 매우 일상적 공간이다. 한국 또는 아시아 여성, 그리고 이들과 살고 있는 남성들은 미국, 캐나다, 프랑스, 독일 등에서 온 이주민들로, 전직 군인이었거나 현직 영어선생 또는 자영업자 등으로 다양한 직군에 종사한다. 여기서 여성들은 모두 카메라를 응시한다. 남성들은 카메라를 제외한 어딘가를 부자연스럽게 바라보거나 아예 뒤돌아 있어 시선 처리조차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사진 속의 이들은 분명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는듯한데, 이를 바라보는 관람객은 심리적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이러한 느낌은 한국의 전형적인 집 구조에 더해진, 각기 다른 문화가 혼재된 가구나 소품들로 강화된다.   
 
<현순과 킵 1>(2002)에서 접시를 든 현순은 김옥선처럼 카메라를 응시하고, 킵은 랄프처럼 카메라를 피해 시선을 과일에 두고 있다. 구조상 20평이 채 안될 것 같은 집 거실의 다 뜯긴 벽지, 곰팡이로 뒤덮인 시멘트벽, 그리고 단촐 한 살림살이로 이곳이 이들의 임시 거처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식탁의자에 걸쳐진 수건은 한국적 풍경이고, 식탁의 과일 접시는 서구적 풍경이다. <현순과 킵 2>(2002)에서도 방안의 현순은 카메라를 응시하고 킵은 눈을 감고 있다. 전형적인 한국식 몰딩 처리가 된 방안, 서구적 형태의 침대 커버, 그리고 바닥의 보료 위 어지럽게 놓인 여행 가방과 짐이 담긴 사진은 결국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마지막 날을 보여준다. 

2003년 이전 법적 제도적 장치 부재에 앞서, 역사적으로 단일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앞세워왔고 6·25 전쟁을 겪으면서 미군과 양공주라는 선입견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대한민국 특유의 문화에서, 여성과 외국인 남성 부부 또는 커플의 삶은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국제결혼까지 이어지는 현실에서 작가는 카메라로 정면을 바라보는 여성의 무거운 시선을 담아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보는 주체보다는 언제나 보이는 대상, 즉 남성의 응시 대상으로 존재해왔던 여성은 작가의 사진에서 고개를 들어 세상에 정면으로 맞서는 주체가 되었다.   

뉴욕에서 촬영한 <성과 제프 1>(2004)을 보면, 이들이 차려입은 모습을 통해 곧 어떤 모임 또는 파티에 갈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성은 카메라를 응시하고, 제프는 실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성은 한국인들은 모임에서 입지 않는 드레스를 입고 있고, 제프는 실내에서 신발을 신고 있다. 이들이 위치하는 거실은 창문의 형태, 소파, 카펫, 그리고 스탠드형 조명과 테이블 조명으로 미국적 풍경이 감지된다. 여기에 더해진 테이블은 이들과는 다른 한국 전통 궤로 이국적 느낌을 준다. 처음에 공간은 강렬한 시선을 가진 인물에 가려 일상적 풍경처럼 보인다. 그러나 계속 들여다보면 서로 다른 문화가 담긴 사물들이 섞여 그 풍경이 생경하게 다가온다. 전자제품, 가구, 커튼, 침대커버 등에서 자잘한 장식품에 이르기까지 누구의 취향이 더 반영됐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들이 자라난 곳에서 같은 국적의 배우자 또는 파트너와 살았다면 나오지 않았을, 혼성 배경에서 오는 이질감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미국은 부모가 어느 국적이든 미국에서 아이가 출생하면 영주권을 획득할 수 있는 것만 봐도 국적법에 의한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진이 보여주는 생경함 또는 이질감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살아가는 일이 한국의 국제결혼 커플과 다르지 않게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해피 투게더>는 곧 동성커플을 촬영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작가는 온갖 인종이 다양한 방식으로 모여 사는 세계의 축소판 뉴욕에서 국제결혼을 한 부부나 커플이 동성커플과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츠요시와 조나단>(2004)는 대만인과 일본인의 혼혈인 츠요시와 영국인인 조나단 커플을 그들의 침실에서 촬영한 작품이다. 작가는 자연스럽게 이들의 삶을 수용하는 사회에서 자유롭고 여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는 동성커플들을 보면서 지난날 한국에 거주하던 자신, 한국인과 외국인 부부 또는 커플의 삶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한국의 국적법은 개정되었지만 안타깝게도 <해피 투게더> 연작이 의미하는 바는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2021년 현재, 우리는 결혼이주여성, 외국인노동자 증가로 외국인 230만 시대에 살고 있다. 불법 체류자를 포함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 다문화·다인종 국가(이주배경인구가 총인구의 5% 이상)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이주 여성, 이주노동자에 대한 심각한 편견과 차별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백인, 흑인 또는 동남아 출신 이주민에 대한 시선과 대우도 각기 다르다.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 가정이 자리 잡은 지 20여년이 지나고 있음에도 한국 거주 외국인에 관한 정책수립 및 제도개선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컨트롤타워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이주노동자가 없으면 산업이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서도 그들의 안전, 인권을 존중하는 데 힘쓰지 않는 이곳에서 외국인의 삶이란,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사는 이들의 삶 역시 고달플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는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끊임없는 확장으로 경계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데, 언제쯤 어디서나 ‘함께 있어 행복한’ 해피 투게더가 될 수 있을까?       

작가는 그 답을 그의 또 다른 연작 <빛나는 것들>(2012∼2014)에서 찾고자 한다. <빛나는 것들>은 언젠가 외부에서 제주도로 들어온 종려나무들을 대상으로 촬영한 작품이다. 작가의 주요 주제인 이방인에 관한 시선을 종려나무에 두는 것이다. 이 나무들은 제주도 밖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이국적일 수 있지만 제주도민들에게는 마치 원래부터 여기서 나고 자란 것처럼 생각되는 낯설지 않은 대상이다. 사진은 어느 집 돌담 옆, 발길 뜸한 동네 한구석에 위치해 특별할 것 없는 이들을 솔직하게 담고 있다. 이들은 다른 나무들과 마찬가지로 햇빛, 토양, 공기, 물은 물론이고 사람들로부터도 차별받지 않는다.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꾸밈없이 자란 나무들은 제 각각 생긴 대로 자신을 드러내면서 온 몸으로 생명력을 뿜어낸다. 낯선 곳에 정박하여 자연스럽게 삶을 유지하고 있는 이 나무들처럼 이방인들도 이 땅에 견고하게 발 디딜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들을 같은 삶의 구성원으로 인정해야 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하나 빛나는 존재들로 언제 어디서나 차별받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해피 투게더>의 시선이,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더 이상 불편하지 않아야 한다. <해피 투게더>는 과거의 기록이 되어야 한다.
 


한희진(1972∼),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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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선, <옥선과 랄프>, 2002, 디지털 C-프린트, 96×114cm




김옥선, <현순과 킵 2>, 2002, 디지털 C-프린트, 96×114cm 




김옥선, <성과 제프 1>, 2004, 디지털 C-프린트, 96×114cm




김옥선, <츠요시와 조나단>, 2004, 디지털 C-프린트, 96×114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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