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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이숙자의 ‘한국화’: 채색화의 정통성을 계승한 한국적 회화 | 송윤지

현대미술포럼





이숙자의 ‘한국화’: 채색화의 정통성을 계승한 한국적 회화




이숙자(1942∼)는 ‘보리밭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70년대 중반 시작된 ‘보리밭’ 연작은 초기작인 <맥파(麥波)-청맥(淸麥)>(1978)이 제1회 중앙미술대전 장려상을 받은데 이어 <맥파(麥波)-황맥(黃麥)>(1980)이 제3회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이숙자의 대표작이 됐다. 그는 때로는 푸른 빛으로, 때로는 노란 빛으로 보리의 낱알과 수염 하나하나를 묘사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노동 집약적인 방식으로 완성된 광활한 보리밭 풍경은 보는 이들에게 압도감을 선사한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만큼 보리밭은 그의 작품 세계 안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주제다. 이숙자는 보리밭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 및 그 의미와 상징성에 관한 글을 직접 쓰기도 했다. 그는 가족을 만나러 가던 길에 보리밭을 발견했고, 유년 시절의 향수를 떠올렸다고 회상했다. 우연한 계기와 개인적인 사유에서의 소재 선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기 위해 전국 곳곳의 보리밭들을 찾아다니면서 그의 생각은 점점 바뀌었다. 개인적인 노스탤지어에 그치지 않고 보리밭에 민족의 애환을 담기 시작했다. 그것은 보리에 대한 보편적 인식, 즉 쌀과 대조되는 서민 음식이라는 이미지의 투영이었다. 또한 겨울철 눈밭에서도 싹을 틔우는 보리의 강한 생명력에는 외세의 침략과 수탈에도 민족성을 잃지 않으려 저항했던 선조들의 정신을 빗댔다. 전쟁 이후 빠른 재건과 경제성장, IMF 위기를 극복했던 단합력 같은 것도 유사한 맥락에서 한국인의 끈기를 표출한 역사적 사건들이었다. 이숙자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보리밭을 민중과 민족의 정신을 담는 상징물로서 다루고자 했다. 

이숙자가 즐겨 그린 또 다른 소재들인 소와 여인상에도 각각의 도상적 의미가 있다. 그는 소에 관해서는 “보리밭을 그리러 다니면서 소를 자주 만났다. 소를 대할 때마다 친분 있는 우인(友人)을 만나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고삐에 매여 있는 소를 볼 때면 얼마간 미안한 생각이라든지 연민 또는 신뢰의 감정도 느꼈다. 단순히 동물로서 보다 어떤 영혼을 지닌 영물로 느껴졌다”(작가노트: 1988)라고 서술한 바 있다. 어질고 부지런하며 우직한 면모가 우리의 민족성을 닮았다는 것이다. 이숙자의 ‘군우’ 연작은 황소의 우람한 골격에서 느껴지는 힘, 얼룩소 무리의 어지러운 무늬에서 느껴지는 역동성 등을 포착하고자 한 작품들이다.

여인상은 이숙자에게 여성으로서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였다. 그는 초기작부터 여인상을 지속해 왔는데, 그 중에서도 누드를 그리는 ‘이브’ 연작이 주목받았다. 이숙자의 ‘이브’는 엄밀히 말하자면 ‘타자화된 누드’다. 그는 초기작에서는 여체를 단지 작품의 대상물(소재)로만 보았다고 고백했다. 그가 누드를 어떤 상징적 매개로 다룬 것은 1989년부터로, <이브의 보리밭>이라는 제목으로 보리밭에 누운 누드를 그리기 시작하면서다. 덧붙여 작가는 한 일화를 소개한다. 어느 모임에서 누군가 보리밭만 그리는 이유를 물었고 이숙자는 “우리 겨레의 정서가 배어있어서 그린다”고 답했는데, “혹시 보리밭에서 연애를 해 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냐”는 반문이 돌아왔다는 것이다(작가노트: 1990). 이는 보리밭에 대한 작가의 거시적 해석을 여성의 은밀한 개인사로 축소하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이숙자는 이를 호쾌하게 웃어넘기며 오히려 보리밭 그림의 새로운 방향을 찾은 전환점으로 삼았다. 그는 관능적인 포즈의 여체를 보리밭에 누이고, 보리의 수염을 세필로 반복해 그리듯 여인의 머리칼과 체모를 정성 들여 그렸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이브’로 대표되는 여성의 원죄에 관해 생각했다. 단지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이유로 마치 형벌을 받는 것처럼 차별 받는 것이 당연시되는 여성의 삶에 관해 돌아보게 된 것이다. 

그는 순결을 강요당하고, 경제적 자립이 어려우며, 결혼 제도 등을 통해 남성에게 귀속되는 것이 당연한 순리인 것처럼 여겨지는 여성상에 의문을 가졌다. 민주화와 인권 회복을 외치고 있는 현대에도 여성은 왜 독립된 인격체로 여겨지지 않는가. 모두가 저항과 투쟁을 외치는 가운데서 여성은 왜 부드럽고 우아한 존재로서 ‘여성성’을 획득해야 하는가. 이 모든 것이 단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죄로 인해 겪어야 하는 일인가. 이숙자는 이런 고민들을 ‘이브’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 그의 이브는 일반적인 여성 누드화처럼 관능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 뽀얗고 부드러운 피부를 가진 여체로 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마른 몸을 가졌거나, 차가운 시선으로 화면 밖을 응시하면서 관객과 눈을 맞춘다. 이숙자는 누드를 통해 여성으로서 느끼는 사회의 소외와 그로 인한 본질적 고독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여성 미술가들을 ‘여류화가’로 칭하던 시절이었다. 이숙자의 초기작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댕기, 골무, 전통 혼례복 등은 ‘규방’의 기물이라는 이유로 “여성으로서의 애틋한 정감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오광수)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의 작품들을 보면 작가가 그리는 대상에 별다른 감정을 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숙자에게 기물들은 단지 화려한 오방색을 가진, 전통 채색화 기법에 몰두하기 적합한 소재였다. 그는 화면 안에 기물을 나열하듯 배치해놓고, 마치 사진을 찍듯 각각을 정직하게 그려냈다. 여기서 작가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어떤 정취는 느끼기 힘들다. 이숙자는 관습적으로 소재를 선택하고 성실하게 그렸던 것 뿐이다. 그가 뚜렷한 작가 의식을 갖고 소재를 취한 것은 보리밭에서부터였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이숙자의 작가 노트를 살펴보면 이를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는 보리밭과 소, 이브에 굉장히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하고 보편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도상으로 만들어 자신의 작품 세계와 연결하고자 했다. 그런 그의 작품들을 ‘여류화가’의 ‘여성성이 반영된’ 것으로 보는 것은 이숙자의 화업에 대한 왜곡이다.

이숙자가 홍익대학교에서 수학하던 때에는 천경자, 박생광 등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숙자는 이들에게서 정통 채색화 기법을 배웠고, 특히 천경자의 화풍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채색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한국화의 전통성을 고수하고자 부단히 노력해온 작가다. 그는 1987년에 “채색화의 정통성”이라는 글을 통해 한국 채색화의 전통적인 양식에 관한 올바른 화관을 확립하는 일이 한국화의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과제라고 주장했다. 이 글은 채색화를 향한 왜색 논란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이숙자는 한국의 채색화가 갖는 역사적 정통성을 고려의 불화, 더 거슬러 가서 삼국시대의 고분 벽화에서 찾았다. 따라서 채색화를 일제 강점기의 잔재로 보는 것은 이전의 역사를 지우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덧붙여 왜색 논란을 피하겠다고 수묵 위주의 획일적 양식을 고수하는 것이 오히려 한국화를 현대로 계승하는 데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고 피력했다. 이숙자는 1991년 서울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는 ‘한국화’와 ‘서양화’의 이분법적 용어를 ‘한국의 회화’로 통칭하자는 화단의 의견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는 용어를 통합하는 것이 오히려 한국화가 가진 민족적 특수성을 희석할 것이라 우려하면서, ‘한국화’라는 용어를 사용해야만 민족성에 대한 인식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공개한 ‘백두산’ 연작은 평생에 걸쳐 ‘한국적인 것’을 탐구해 온 이숙자의 신념과 열정이 집약된 작품이다. 그는 본인의 나이가 지천명(50세)에 이르던 해, 한국의 ‘민족성’을 표현하기 위한 대작을 그려내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백두산을 민족의 기개를 상징하는 하나의 표상으로 여기고 1992년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아 과감히 작업을 중단했다. 백두산은 직접 가보기 어려운 장소였기 때문에 사진을 보고 그릴 수밖에 없었는데, 피상적인 이미지만 옮기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고민을 지속하던 중 1999년 북한에서 원로 화가 10명을 초청해 백두산을 방문할 기회가 찾아왔다. 이숙자는 이때 백두산에 직접 등정해 수많은 스케치를 그렸으며, 당시에 보고 느낀 감동을 기억하면서 대작을 완성했다. 2001년에 완성된 첫 번째 <백두산>(1999-2001)에 이어 2016년의 <백두성산>(2014-2016)까지, 거대한 화폭에 가득 찬 백두산 천지의 모습은 영험한 기운마저 풍긴다. 

이숙자의 작품 세계와 작가노트들, 한국화에 관한 생각을 펼친 글들까지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절실하게 ‘한국적 회화’를 바로 세우고자 노력해 왔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전통적인 채색 기법을 계승하면서, ‘보리밭’을 통해 한국 근현대 시기의 정서를 반영하고자 했다. 또한 민족의 정신을 작품에 담기 위해 백두산을 직접 등반하는 열정까지 보였다. 이숙자의 한국화에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 민족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있다. 그는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변함없는 열정으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이숙자의 ‘한국화’는 현재진행형이다. 



송윤지(1984∼),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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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자, <황금보리밭의 소들>, 1988, 순지에 암채, 227.3×181.8cm




이숙자, <이브의 보리밭89>, 1989, 순지에 암채, 200×150cm




이숙자, <백두성산>, 2014-2016, 순지에 암채, 909×227.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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