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35)석란희의 ‘자연’: 자연과 인간이 공명하는 공간 | 박윤조

현대미술포럼





석란희의 ‘자연’: 자연과 인간이 공명하는 공간






석란희(1939∼)는 60년 가까이 자연에 대한 경험을 화폭에 담아 온 작가다. 그는 화업을 하나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자연을 무한한 생명력의 원천으로 삼아 생동감 있는 화면을 구현하고자 노력해오고 있다. 33회의 개인전, 78회의 그룹전 1) , 그리고 석주미술상(1992), 마니프 서울전 대상(2002), 이중섭미술상(2005) 등의 수상은 그의 한결같은 작업 활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작품 제목은 작가의 생각을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다. 석란희의 작품 세계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것 역시 제목이다. 서너 작품을 제외한 모든 작품명은 작가가 평생 천착해 온 주제, 바로 ‘자연’이다. 부제도, 그 흔한 작품 번호도 없다. 수백 여 점의 작품들을 동일한 제목으로 명시해 온 배경은 무엇일까. 그에게 있어서 자연의 단상은 아버지와의 추억에서 시작된다. 서울 마포에서 태어난 석란희는 자연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곳에서의 아버지와의 기억을 떠올린다. 2) 철도병원 원장을 역임한 이북 출신의 아버지는 과중한 업무와 전란 속에서도 퇴근 후 어린 딸과 마포강변을 걸으며 일과를 마무리했다. 7남매의 막내였던 석란희에 대한 그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어스름한 강변의 자연풍광과 함께 작가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작가가 처음부터 자연을 화폭에 담은 것은 아니었다. 서울예술고등학교 졸업 후 1960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한 석란희는 아침 일찍 학교에 나가 작업에 열중했다. 당시 한국 화단은 구상과 추상의 논쟁 속에서 1950년대 말 등장한 앵포르멜 경향이 확산되는 추세였다. 석란희는 대학교 3학년이던 1962년에 홍익대학교와 서울대학교의 재학생 9명(김영남, 김영자, 김상영, 문복철, 이태현, 최붕현, 황일지, 설영조)과 함께 초기 실험미술 단체인 ‘무(Zero)동인’을 결성하고 동명의 그룹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3) 그러나 비정형의 추상 경향은 전후 젊은 작가 세대들을 중심으로 1960년대까지 일종의 유행처럼 퍼져나가다가 그 열풍이 사라져갔다. 마지막 《악뛰엘(Actuel)》(1964, 경복궁미술관) 전에도 참여했던 석란희는 이내 새로운 매체를 다루는 동인 및 당대 화단과 노선을 달리하며, 소강상태에 접어든 앵포르멜 경향의 표현 방식을 고수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앵포르멜 경향은 단지 시대적 조류에 따른 편승이 아니라 심연의 세계를 탐색하는 고무적인 선택지였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바로 도불이었다.

1963년 대학 졸업 후 이듬해 작가는 파리로 건너가게 된다. 1950년대 여러 도불 작가들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파리는 한국 작가들에게 미술의 중심지로 인식되었다. 이들과 함께 특히 1960년대 《파리 비엔날레》에 참가하며 국제적 감각을 익힌 작가들이 국내 활동을 펼치면서 이러한 이미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석란희는 그곳에서의 5년간의 체류 기간 동안 작가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계기들을 접하게 된다. 고암 이응노(1904∼1989)와의 만남과 파리의 경관, 특히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의 다니엘 교수의 조언은 석란희의 작품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이는 바로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이미지 대신에 점, 선, 면을 통해 감성적으로 표현하라는 것이었다. 석란희는 그의 주문에 힘입어 앵포르멜의 양식적 방법을 실험하기 시작한다. <자연> 연작의 시작 전에 제작한 1968년도 작품은 정창섭, 권옥연, 박서보, 윤명로, 하종현, 조용익 등의 1950∼60년대 회화에서와 같이 녹슨 철제와 같은 탁한 색조의 화면을 구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꽃밭(Flower Garden)>이라는 제목은 작가만의 독자적 관점을 대변한다. 석란희에게 있어서 비정형의 추상은 기존 화단에서와 같이 암울한 시대에 대한 울분의 표출이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 구현을 위한 방법론이었던 것이다. 

1969년 귀국 후 석란희는 평생 캔버스와 목판을 주재료로 삼아 자연과의 교감의 순간을 펼쳐 왔다. 자연 속에서 호흡하며 직관적인 감성에 자신을 내맡기고자 했다. 작가의 이러한 내적 표출은 필법을 통해 극대화된다. 생동하는 자연의 거친 면모를 반영한 듯한 빠른 필치는 198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러한 필법은 그가 서체적 추상 계열로 논의되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그의 화면은 문자추상보다는, 큰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전면적 구성을 통해 형상 너머의 분위기로 다가온다. 작가는 겹칠한 물감 층이 만들어낸 마티에르와 그 위를 가로지르는 색조와 드로잉으로, 밝은 햇빛과 부드러운 바람을 구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빛과 소리의 역동적인 파동 과정을 은유하는 화폭에는 “큰 불안과 절망”이라는 자연에 대한 작가의 양가적 감정 또한 혼재해 있다. 자연에 대해 “삶을 풍부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인간을 오만으로부터 경외의 마음을 배우게 하는 스승이기도 하다. 자연은 진실을 실천하는 근원이고 또 행동에 대한 목적과 책임을 완수하는 본보기이기도 하다. 나는 자연을 사랑하면서부터 두려워할 줄 알았다. 자연 속에서 옳고 그릇됨을 판단하게 되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자연 속에서 인간의 한계와 치유를 경험한 그에게 있어서 작업은 인간의 실존적 고뇌와 작가의 지난한 삶을 구원으로 이끌어 줄 일종의 종교적 수행 과정에 가깝다.

화면 위를 가득 채우는 나이프와 물감의 거친 마티에르 효과, 그리고 빠른 필치의 선묘들은 자연과 물아일체가 되는 순간을 온몸으로 표현한 퍼포먼스의 순간을 연상하게 한다. “나는 빠르게 그것을 남기고자 했다”는 작가의 고백은 서구 추상표현주의를 설명하는 액션페인팅과 같이, 작품의 표면이 신체적 행위의 지표로 채워진 장(場)임을 증거한다. 석란희는 자연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주체와 객체, 안과 밖의 경계를 무화하면서 매일매일 자기조직화해 가는 과정을 기록해 왔다. 1986년 동산방 화랑에서의 개인전(1986) 서문에서 오광수는 작가만의 세계를 확립하기 시작한 1980년대 회화를 두고, “완성이 아니라 잠시 작업을 중단한 상태로서의 끝”처럼 느껴지며, “무수하게 얼룩진 마티엘의 자국과 선의 유동과 이것들이 만드는 미궁”으로 빠지게 한다고 적고 있다. 

자연에 대한 그의 경험은 매일 다르고, 심지어 그리는 순간마저도 변화 중에 있기 때문에 무질서한 미완결의 상태로 비춰질 수도 있다. 비평가는 이와 같은 석란희 만의 자연 체내화 과정을 직관적으로 통찰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자연과 인간, 몸과 정신, 감정과 이성 등 서구사회의 이분법적 사유방식과 발전논리에 초연한 채 산책과 작업이라는 수행적 행위를 이어왔다. 그의 작품은 몸과 의식, 그리고 세계가 서로 조우하는 과정을 담은 일종의 신경지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캔버스는 오광수의 설명처럼 “내재적 리듬과 열려진 밖의 충일한 공간이 만드는 드라마”를 연출하는 행위의 장이 된다.

1983년을 기점으로 그의 화면에는 점차 필치들의 진동 사이에 원색의 틈새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녹색과 청색은 본래 석란희 회화에서 중요한 주조색으로, 그 중 청색은 스승 김환기(1913∼1974)의 영향이기도 하다. 4) 김환기 회화에서 청색은 고향 기좌도의 자연 풍광을 연상시키는 정서적 기제일 뿐만 아니라 화면의 균형감을 조율하는 조형적 요소다. 석란희 작품에서 푸른색은 오광수(1987)와 강태희(1995)의 표현대로 ‘생동’과 ‘생성’의 의미로 주체적으로 변용된다. 그 과정에서 청색의 틈새는 여백과 같이 숨고르기를 유도하면서 운필에서 느껴지는 운동에너지가 포화상태에서 점차 다른 형태로 전환되었음을 암시한다. 그의 빠른 운필의 효과는 근대적 자연관에 배치되는 자연의 순환론적 가치로 해석되어 왔다. 

또한 1970년대 단색조 남성 작가들에게 백색이 정신성을 대변했다면, 그에게 청색은 자연과의 오랜 교감의 순간을 대변한다. 이를 근거로 했을 때 밝은 틈새는 매순간 다르게 경험되는 자연의 섭리를 캔버스라는 미시적 세계에 구현하는, 이른바 자유로운 에너지 변환 상태라 할 수 있다. 자연의 질서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비가시적 입자들의 운동을 체화하여 표현한다는 것은, 일필휘지의 순간 같지만 그의 고백처럼 “지난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후 그 틈새들은 점차 캔버스 전면을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양상은 자연 체화를 위한 깊은 사색의 과정을 반영하며 자연과 작가 간의 에너지가 평형 상태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연과 작가 간의 이와 같은 에너지의 균형 상태는 판목화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에게 있어서 나무는 자연에 대한 인상을 촉각적으로 강화하는 매체다. 파리에서 석판화를 전공한 석란희는 1971년 귀국 판화전(1971, 신세계화랑)을 개최한 이후, 대리석 대신 통나무 원목을 직접 깎고 다듬어 사용했다. 이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라는 점 외에도 재료 유입이 용이한 안성 작업실의 지리적 특성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석란희에게 있어서 목판은 복합적인 의미로 해석가능하다. 이는 당대 미술계에서의 판화에 대한 전개 과정과 비교해보면 좀 더 분명해진다. 1970년대는 송번수(1943∼), 김상구(1945∼), 오윤(1946∼1986) 등이 판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던 시기로, 대부분 복수성, 간접성이라는 판화의 속성에 충실했다. 

이와는 달리, 석란희는 판목(版木) 그 자체에 주목하면서 목판화 대신에 ‘판목화’로 지칭한다. ‘나무 위의 드로잉’이라는 기법 설명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판화의 간접적 표현 매체에서 판목(板目)의 가능성을 탐색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목판 자체의 재질과 오목한 부분의 의미를 극적으로 연출한다. 첫 번째 판목화인 <자연>(1977)에서 화면 중앙에 위치한 여백의 공간은 약동하는 생명력과 같은 역설적인 충만함으로 가득하다. 잉크가 적게 묻는 그 공간은 바로 그의 지난한 노동의 흔적이자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 빈 공간은 이후에도 100호에 가까운 목판을 갈고 조탁하면서 삶을 연마하는 작가의 에너지로 충만한 상태가 된다. 《부산 비엔날레》(1998, 부산시립미술관)에 출품했던 판목화의 제목은 그러한 상태를 암시하는 듯하다. ‘선돌’이라는 희귀한 작품명은 자연물에 유적의 의미가 덧입혀지면서 자연과 인간이 함께 한 시간의 층위를 강조한다. 이는 돌의 불멸성을 통해 숱한 에너지 교환의 과정을 환기시키며 질서와 무질서가 배타적이 아닌, 상호보완적 균형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연의 어원인 ‘피시스(phusis)’는 스스로 변화하고 생성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석란희는 이러한 자연을 대상화하지도 않고, 원생적 자연 이미지를 덧입혀 여성과 친연적 관계에 두지도 않는다. 또한 일체의 명예욕이나 기성 화단에 대한 편승을 위해 자연을 도구화하지도 않는다. 일평생 그는 남편인 고(故) 양인환이 직접 지어준 작업실 주변의 나무숲을 경유하며 생명과 유대 해 오고 있다. 5) 절제된 색채 사용과 과감한 운필의 흔적들은 온전히 자연과 작가 간의 관계 속에서 이뤄진 내적 성찰의 결과로, 주변 환경을 ‘있는 그대로’ 체화하는  자기생성의 과정과 공명을 이룬다. 석란희 작품의 제목인 자연(nature)이 본성(nature)으로 읽히는 지점이다. 주류 미술계에서 변방에 있던 자연 본성에 대한 작가의 깊은 성찰은 피시스의 의미처럼 멈추지 않고 스스로 드러내는 과정 속에서 이어져 왔다. 석란희의 비정형 추상회화의 주체적 수용이 자연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이유이다.

 

박윤조(1975∼),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이화여대 강사



ㅡㅡㅡㅡㅡ
1) 2006년 제작된 석란희의 화집에 빠진 두 개의 그룹전(《무동인》과 《악뛰엘》전)을 추가한 횟수이다.

2) 석란희와의 인터뷰, 2021년 1월 26일, 작가의 작업실.

3) 석란희는 파리 체류 시기에 열린 《청년작가연립전》(1967)에 참가하지 않았고, 그들과 다른 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4) 김환기는 석란희에게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스승으로, 대학교 3학년 재학 중 서울 신문회관에서의 첫 개인전(1962) 개최를 독려하며 제자의 초상을 직접 그려주기도 했다. 이후 석란희는 그 초상을 환기미술관에 기증했다. 김환기의 관계는 환기미술관에서 열린 《청색. 또 하나의 정신》전(1994)에서 재조명되기도 했다.
 
5) 석란희의 작업은 아내이자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는 삶과 병행되어 왔다. 그의 딸이자 조각가인 양영회는 2003년 11월 27일 자 문화일보에 게재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셔서 조용히 아침을 만끽하고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시다가 아침을 준비하고 가족을 위해서 항상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자신의 일에 조금도 게으름 없이 너무나 성실한 태도를 보이시는 엄마. 전 인생의 선배님으로, 작업에서의 선배님으로, 가정을 가꾸는 아내로, 어머니로서 정말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석란희, <꽃밭>, 1968, 캔버스에 유채, 91×72.7cm




석란희, <자연>, 1992, 캔버스에 유채, 162.2×130.3cm




석란희, <자연>, 1977, 나무에 드로잉, 64×91.5cm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