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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나희균, 고요의 빛 | 김철효

현대미술포럼





나희균, 고요의 빛(1932∼) 






1. 들어가는 말  
작가 나희균(1932∼)은 한국 여권운동의 선구자이며, 여성으로서 국내 최초의 서양화가인 나혜석의 조카이다. 해방 후 여성미술인으로 파리에서 처음 유학했던 나희균은 열두세 살 어린 나이에 만났던 고모에 대해 ‘시대의 한 불운한 희생자’로 기억하고 있다. 1)  그 기억이 작가 나희균의 생애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필자가 비교적 근거리에서 바라본 나희균은 여성이라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아온 것 같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작가로서의 삶을 포기한 적이 없으며, 출산과 육아 등 생활면에서도 자립심과 책임감이 철저한 사람이다. 한국화가 안상철(1926∼1993)과의 결혼생활에서도 생활비를 벌기 위한 일은 하지만 남편을 내조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타입의 아내는 결코 아니었다. 

나희균은 평생 화단의 흐름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작품 활동에만 전념해온 작가이다. 2020년 늦가을, 그는 90세를 바라보면서 가진 회고전의 주제를 ‘고요의 빛’으로 택하였다. 잔잔한 호수에 비쳐 너울대는 빛들이 이리저리 신비한 얼룩을 만들어내는 그림. 물가에 앉아 수면에 반사되는 빛을 끝없이 관조하는 작가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듯하다. 말년에 들어 나희균은 일상적 삶과 주변 모든 곳에서 자연의 섭리를 느낌으로써 이를 모티프로 마치 수필을 쓰듯 평이하게, 무심한 듯 자연스럽게 작품을 제작해오고 있다. 회고전에 걸린 130여 작품의 양식들은 70년의 화력을 반영하듯 다양하고 변화무쌍하면서도 한결같이 진지하다.

2. 1950년대: 경력의 시작과 파리 유학
나희균은 1932년 만주 봉천(지금의 심양)에서 개화한 집안의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나 1941년 부모를 따라 월남하여 서울 종로구 신교동에 정착하였다. 미술경력의 시작은 1950년 봄, 6·25전쟁 직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함으로써 시작되는데, 피난지 부산, 가교사에서의 수업은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졸업 후 홍익대학교에 편입하여 학업을 보충하고자 했으나 결국 그는 더 큰 세계로 나아가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955년 당시로서는 어렵사리 파리 유학을 떠났고, 3년의 기간 동안 평생의 화력에 도움이 될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유학 당시 파리의 상황은 미술의 중심이 미국으로 옮겨 가기 시작하던 시기, 즉 비형상(앵포르멜)의 미술이 떠오르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희균은 유학 전 세잔과 피카소를 좋아했고, 누드습작과 인물화 경험이 전부였다. 그 결과로 그는 동시대 미술보다 자연스럽게 20세기 전반기 모더니즘의 대가들, 즉 피카소와 브라크, 루오 등의 작업에 더욱 공감하였고, 그들의 조형적 성취를 받아들이며 추상과 구상의 차이를 소화하는 선에서 작업을 시작했던 것 같다. 나희균은 오월전(Salon de Mai)이나 중견작가들의 개인전에 대한 당시의 감동을 나름의 평을 곁들여 국내 일간지에 ‘파리 화단의 최신 소식’으로 기고할 만큼 선구적 미술 정보를 소개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1957년 파리 베네지트 화랑에서의 《1회 개인전》과 1958년 귀국 후 서울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가진 《2회 개인전》에서는 회색빛 파리 풍경과 나무, 카타콤브 풍경 등 야수파 분위기의 선이 굵고 자유로운 화풍을 기조로 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3. 1960년대 후반∼80년대: 네온과 철 작품의 파격
1959년 가을 제3회 개인전을 마친 나희균은 그해 12월 고희동의 주례로 서울미대 동기생인 한국화가 안상철과 결혼을 하게 된다. 그 무렵 안상철은 국전 동양화부에서 문교부장관상, 부통령상 및 최고상인 대통령상 수상작가로 화단에 화려하게 이름을 알린 재능 있는 작가였다. 이러한 안 화백의 자질은 나희균이 결혼을 결정한 주된 이유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결혼 후, 첫 10년 동안은 1남 3녀의 출산, 육아로 인해 그가 기대했던 대로 유학 시기에 학습했던 현대미술의 제반 조형적 성취를 실험해 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되지 못했다.

육아 틈틈이 뒷산에 올라 자연을 스케치하거나 직선과 곡선구성 등 여러 가지 추상적인 시도를 하며 다음 작업을 고민하던 1960년대 후반 나희균은, 네온관과 pvc파이프 등을 사용하여 그의 생애 중 가장 파격적인 산업재를 활용한 입체작품을 시작한다. 1970년 10년의 침묵을 깨고 가진 제4회 개인전에는 당시 국내화단에서 비슷한 유형을 찾을 수 없는 독창적인 시도로서 오브제 성격의 네온과 파이프 작품이 선보여져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는 70년대 당시 국내 화단의, 이른바 전위를 자처하는 작가들의 정치적 함의를 내포하는 오브제 작품들과는 전혀 공통점이 없었다. 나희균은 네온 작품의 아이디어를 미국의 그리스계 팝아트 조각가인 크리싸(Chryssa Vardea-Mavromichali)로부터 영감을 얻었는데, 그럼에도 그의 작품은 팝적인 요소보다는 오히려 초기 모더니즘의 순수조형성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첫 작품인 <삼각의 네온>(1970)에서는 크리싸처럼 기하학적인 형태를 중첩시키지만 1970년대의 <산D>는 네온관으로서 가능한 자유로운 곡선 형태로 발전한다. 네온관에 불이 켜지면 작품은 선의 리듬과 색채들의 향연으로 변모하여 신비스런 빛을 발하게 되며, 이 같은 초자연적인 분위기는 <성체등>(1988)에서처럼 그의 종교적 감성과 쉽게 연결된다. 

1973년 제5회 개인전에서 나희균은 향후 20년 가까이 몰두하게 될 ‘철의 작품’을 시작한다. 네온관 작업의 영향으로 촉발된 산업재의 활용은 1970년대 활발한 도시 건설의 붐에 따라 그가 발견하게 된 pvc, 철 파이프 소재로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이다. 대도시의 자연환경이 크게 변화하는 70년대, 나희균은 건설현장 여기저기에 쌓여있는 건축자재들로 눈을 돌리며 그 곳에서 ‘작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긴 파이프의 선과 둥근 단면, 그 형태들이 쌓이면서 이루어지는 리드미컬한 구성들에서 캔버스 작업에 버금가는 조형성에 눈을 뜬 것이리라. ‘파이프 작품’은 크고 작은 pvc파이프들을 길게 혹은 짧게 잘라 알루미늄 앵글에 끼워 넣는 작업으로 이루어져 설치장소를 변경할 때마다 세부 구성이 달라지는 매력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두꺼운 파이프들을 일일이 손으로 잘라야 하는 힘든 작업공정, 그리고 네온관 작품 또한 쉽게 부서지는 유리의 속성 때문에 지속적인 작업이 힘들어 다음 단계로 철 작업을 선택하게 된다. 

철의 작품에 이르러 나희균은 산업재에 대해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된다. 도시적 자연, 환경이란 도시구조에 생명을 부여하는 수도관이나 송유관 등에서 출발한다는 것, 파이프를 생명선으로 규정함으로써 나희균은 물질적 재료에 오브제의 의미를 부가시킨다. ‘철의 작품’들에서 지지대가 되는 다층적인 철판들과 파이프, 철선, 철못 같은 점의 형태, 철판의 다층적인 면들이 이루어내는 리듬과 하모니의 교향악은 모더니즘의 조형성과 더불어 다른 한편 도시 오브제의 의미까지도 내포한다. 작가의 의도에 대응하는 확장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최초의 철의 작품은 부조처럼 사각형 평면을 바탕으로 한 1973년 작 <철의 작품 73-1>이다. 단단하여 공정이 어려운 철 작업에 상당히 완숙해진 1980년대에 이르면 <바위2>(1982)에서처럼 헝클어져가는 동선과 황동선 등의 요소들이 추가되어 마치 평면회화에서와 같은 오토마티즘의 흔적까지도 감지된다. 나희균의 입체작품 시기는 20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에 걸쳐 형태적 조형성과 자동주의적 특성을 자유자재하게 철저히 실험하고 체현한 시기라 하겠다. 

상대적으로 일찍 타계했지만 평생의 예술적 동반자였던 안상철은 나희균의 작업에 나타나는 도시적 자연을 일컬어 현대의 자연으로 해석하며 작가의 입체시기를 뒷받침한 바 있다. 2) 그러나 안상철의 오브제 작품에 비해 조형성이 더욱 앞서는 나희균의 입체작품에서는 형태적 유사성과 작품의 제목을 통해서 종교적이거나 문, 바위, 선율 등 주제에 몰입하는 감성을 엿보게 한다. 1988년 가톨릭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한 <무명순교자를 위하여>는 철판의 강인함이나 날카롭게 잘린 형태들이 주제와 조화를 이룬 대표작이라 하겠다.

4. 1990년대: 자연의 섭리를 명상으로 풀어내다 
1993년 남편이 타계했을 때 일찍부터 자연을 사랑했던 나희균은 20여 년간 다루었던 네온관과 pvc파이프, 그리고 철의 작품 등 산업적 감성의 작업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전환점에 서게 된다. 고희로 접어들며 다루기 힘든 재료와 씨름하기에 역부족인 한계도 하나의 원인이 되어, 안 화백 생전에 부부가 함께 마련해두었던 풍광이 아름다운 경기도의 양주(기산저수지 앞)로 작업실을 옮긴다. 나희균은 1960년대까지 전념했던 평면 회화작업으로 다시 돌아 간 것이다. 

그가 20여 년의 입체작업 기간 동안 현대미술 어법의 숙련을 거친 후 표현한 1980∼90년대 회화작업에서는 편안함과 자유로움이 그 무엇에도 구애됨 없이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연과 일체하고 신앙생활을 기조로 말년에 나혜균은 여유로운 생활에 몰입하면서 주변의 일상적 사물들과 자연, 아울러 뉴스로 소개되는 갖가지 사건들을 작품의 모티프로 삼았다. 어느 날의 비행기 추락사고, 무너진 성수대교 등의 뉴스를 소재로 한 드로잉, 일기와 수필을 쓰듯 자신의 감성을 담아 그림으로 표현하는 생활이 일상화된 것이다.

이 시기 그는 초기작에 사용했던 유화 물감보다 좀 더 사용이 편리한 아크릴릭이나 과슈, 한지에 동양화물감, 수채물감 등을 상황에 따라 자유로이 가져다 쓴다. 종이를 찢어 붙이거나 나뭇잎을 콜라주 하는 등 지금까지 습득한 갖가지 조형상의 논리, 현대적인 어법들이 모티프와 매순간의 감성에 따라 그의 화면에 자유자재로 구사되고 있다. 주변의 하찮은 듯 보이는 돌멩이, 돌담, 지푸라기, 계단, 잔잔한 저수지의 물결 등 이 모든 것이 그의 그림에서 조형시가 된다. 

2003년부터의 ‘계단’ 시리즈는 무려 20여 점을 제작, 수많은 인간관계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였고, 성수대교 붕괴를 그린 <나락으로>(1994) 또는 <비행사고 2>(1994)는 일상의 비극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이다. 그가 초기부터 간간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물, 밤하늘의 별, 은하수 등은 최근까지도 계속된다. 2008년의 <내 안에 빛>, <고요> 등은 물결에 비치는 빛, 자연에 부여되는 은총의 빛이다. 2013년의 <우리 낙토>, <상선약수>, <어머니의 낙토> 등은 우리 것에 대한 애착과 사랑의 표현, 2015년의 <나의 미리내>, <은하수> 또한 무한을 관조하는 신앙심의 표현이다. 그가 명상하듯 관조하는 자연은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이기보다 자연의 섭리에 감탄하고 감사하는 종교적 심성의 발로이다.

5. 맺음말
작가 나희균은 해방 이후 우리의 현대미술사 서술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어온 1960년대 앵포르멜 추상, 1970∼1980년대의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의 대립, 19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구도와는 무관하게 작업을 했다. 15회의 개인전 이외에 종교생활의 일환인 가톨릭미술가협회전과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작가초대전에 출품을 제외하고는 어떤 그룹 활동에도 참가한 적이 없었다. ‘작가로서의 삶’에 최대한 충실하기 위해 주변세계에 무관심했다고도 하겠으나, 해방 후 여성미술인 최초의 파리 유학생이라는 타이틀에 어울리지 않게 주류화단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극히 개인적인 화가로 살아왔다. 

그가 1963년에 쓴 글에서 고모 나혜석을 ‘시대의 희생자’로 규정하면서도 ‘굳센 의지의 부족’이 화업의 중단과 삶의 불행한 결말로 이끌었다고 결론지은 것은 결혼과 작가생활을 함께 이끌어야 하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일종의 다짐이 아니었을까? 막힘없이 개방적인 사고의 소유자이면서도, 나희균은 삶의 현장에서도 작가생활에서도 자기주장이 강하고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한 강한 실천력과 의지력을 가진 여성이었다. 여성/남성관에서도 거침이 없어 여성이라 해서 의지를 굽히는 일은 결단코 없었다. 종교생활에서도 남을 돕기 위한 크고 작은 사업을 소리 없이 실천하는 숨겨진 인물이다. 나희균은 이 시대를 사는 여성작가로서 진정 특이하며 흥미로운 사례라 할 만하다. 

 
김철효(1945∼), 성신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현재 안상철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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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희균, 「여류화가의 선구, 고모님 나혜석」, 『女像』, 1월호, 1963, pp. 180-184.
2) 안상철, 「새로운 언어로써 추구하는 동양의 신비와 영(靈)」, 『공간』(1981. 1.) 참조. ‘젊은 세대에 있어 자연이라 함은 공업생산화된 상품의 범람사회가 된 도시의 자연’




나희균, <산D>, 1970년대, 네온관, 39.5×39.5×67.6cm




나희균, <철의 작품 77-1>, 1977, 철판, 동선, 황선, 철 파이프, 61×70×6cm




나희균, <위태로운 계단 2>, 2004, 캔버스에 유채, 64×49제m




나희균, <내 안에 빛을 4>, 2009, 캔버스에 아크릴릭, 80×200cm




나희균, <우리 낙토 2>, 2013, 캔버스에 아크릴릭, 혼합매체, 100×24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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