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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저항의 삶과 예술, 천경자 | 송윤지

현대미술포럼





저항의 삶과 예술, 천경자






천경자(1924∼2015)는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독특한 화풍으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확립했다.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44년 귀국한 그는 곧바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상했고, 1946년의 첫 개인전 이래로 작품 활동을 활발히 지속했다. 1954년부터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부임해 20여 년간 후학을 양성했고 1955년 대한미술협회전 대통령상을 비롯해 1979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83년 은관문화훈장 등 큰 상도 받았다. 간단한 이력만을 살펴보면 천경자는 여성작가로서의 핸디캡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순탄하게 작업하고 그 결과를 인정받은 듯 보인다. 그러나 그의 삶과 예술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가 이룬 모든 것들이 얼마나 치열한 투쟁 끝에 얻은 성취인지 알 수 있다. 

미술계에 천경자의 이름을 알린 작품은 1951년작인 <생태>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인 1952년 피난지였던 부산에서 <생태>를 발표했는데, 수십마리의 독사들이 뒤엉켜 꿈틀대는 모습을 그린 채색화였다. 다소 기괴하면서도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이 작품을 여성이 그렸다는 사실은 천경자를 단숨에 유명화가로 만들었다. <생태>를 그렸을 때 천경자는 고작 28세였다. 당시 그는 그와 함께 화가의 꿈을 꾸던 여동생을 악성결핵으로 잃고 큰 상실감에 빠져 있었다.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았지만 남편은 무능력했고, 친정의 가세도 기울었던 데다 전쟁과 피난을 겪으면서 지독한 가난을 겪어야 했다. 그는 생계를 위해 전남여고의 교사로 근무하면서 아이 둘의 육아와 가사까지 홀로 감당했다. 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불안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그는 독을 품고 견뎠다. 결국 그의 그림에 등장한 ‘독사’들은 천경자 자신이다. 마음 속에 응어리진 답답함과 분노를 독을 품은 뱀의 모습으로 승화시킨 것이었다. 
   
천경자는 이름을 알리자마자 ‘왜색(倭色)’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1950년대 한국화단은 광복 이후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겠다는 정치적 헤게모니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특히 석채(石彩)를 이용한 채색화를 배척하는 분위기였다. 일본 유학파에 채색기법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천경자에게도 왜색 논란이 늘 따라다녔다. 다른 여러 작가들이 이를 피하기 위해 채색 대신 수묵으로 재료를 바꾸거나 아예 서양화로 장르를 옮기는 동안 천경자는 꿋꿋이 채색화를 그렸다. 추상이 화단의 주류로 떠오를 때도 그는 구상 작품을 고수했다. 일상 속 장면뿐만 아니라 설화나 문학작품을 모티프로 한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그리기도 했다. 그는 오히려 1963년의 도쿄 개인전을 시작으로 일본에도 이름을 알렸으며, 꾸준한 작업으로 점차 자신의 화풍을 만들어나갔다. 강렬한 색들로 채운 신비로운 화면은 천경자의 아이덴티티가 됐다.

1955년의 『여인소묘(女人素描)』를 시작으로 출간했던 수필들도 천경자의 또 다른 저항수단이었다. 그는 글을 통해 여성으로서, 또한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자신의 일상과 그로부터 얻은 경험들을 고백했다. 가족사의 불행했던 일면, 첫 번째 결혼의 실패와 이혼, 기혼자와의 만남과 혼외자를 출산했던 복잡한 연애사 등을 솔직하게 써내려간 그의 글은 「여성중앙」, 「주부생활」, 「샘터」 등 여성독자들이 주요층을 이루는 잡지들에 연재되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했다. 특히 그가 이혼여성으로서 혼외자를 키우면서 겪었던 현실적인 문제들은 호주제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구성원의 심정을 대변한 것이었다. 또한 원치 않는 상대와의 이혼 등 주체적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위해 했던 선택이 모성과 충돌할 때의 고충은 현재까지도 많은 여성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고민이기도 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 여행을 다니면서 바라본 이국적 정취와 감성이 담긴 글과 그림들은 그의 영감의 원천과 철학적 사유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그는 1969년 유럽과 남태평양을 여행했고, 1972년에는 베트남전 종군화가단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교수직을 사퇴한 뒤 1974년에는 아프리카로 떠나는 등 1990년대까지 세계 각국을 여행했다. 『천경자, 남태평양에 가다: 오직 붓과 종이만 의지하고』(1972)와 『아프리카 기행화문집』(1974) 등이 그의 대표적인 기행산문집으로, 타지의 문물을 접하고 그를 토대로 새로운 작업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이 담겨있다. 그는 1974년에 교수직을 사임한 이후 1980년대의 대부분을 스케치여행으로 보냈다.  

천경자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여인상이다. 때로는 자화상이었고, 때로는 타인을 그린 것이었지만 그 모두는 결국 천경자 자신이었다. 그에게 여인상, 그 중에서도 자화상은 마치 수필처럼 자기고백적 성격을 띤다. 1977년에 완성한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는 자전적 의미를 담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1)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자신의 22세를 회상해 그린 자화상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여인의 머리 위에 마치 면류관처럼 얽혀 있는 뱀이 인상적이다. 뱀은 <생태> 이후 삶의 고통을 상징하는 소재로 그의 작품 속에 종종 등장해왔다. 22세의 천경자는 무능하고 무심한 남편 때문에 생계와 육아를 병행하고 있었다. 작품 속 천경자의 눈빛에는 어린 나이에 여성의 몸으로 가장과 엄마의 역할을 동시에 하면서 느꼈던 외로움과 공허함, 그럼에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동시에 비친다. 그는 머리를 옭죄는 삶의 풍파를 뱀으로, 그럼에도 꼿꼿하고 의연한 태도로 살아남을 것이라는 다짐을 가슴 한켠에 위치한 장미꽃으로 은유했다. 작품 속 시들지 않는 꽃처럼 천경자 역시 마음에 품은 꿈을 꺾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가장 큰 절망을 안겼던 사건이 바로 1991년의 <미인도> 위작 논란이었다. 문제가 된 그림은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품을 아트포스터로 만들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천경자는 지인을 통해 소식을 알게 되어 아트포스터를 실제로 접했고, 곧바로 해당 작품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철저히 묵살당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천경자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소장 경위가 확실하고 그 과정에서 당시 전문위원이었던 평론가 오광수가 진품으로 감정했다며 우기기 시작했다. 논란이 일자 추가로 화랑협회 감정위원회의 재감정을 받았다며 진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림의 진위 여부를 밝히는 과정에 우선되어야 할 원작자의 의견이 배제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천경자는 충격으로 절필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4개월간 미국에 머물며 상처받은 마음을 추슬렀고 겨우 다시 붓을 잡았다. 1995년 호암미술관에서 대규모의 회고전이 성황리에 개최되었고, 이후 천경자의 커리어도 계속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98년 급격히 건강이 악화된 천경자는 큰딸이 살고 있는 뉴욕으로 거처를 완전히 옮기고, 잠시 귀국했을 때 자신의 채색화와 드로잉 93여점을 서울시에 기증했다.      

천경자는 작업 속도가 빠른 작가가 아니었다. 여행 중에 그리는 스케치는 많았지만 그것들을 갈무리해 하나의 회화 작품으로 만들어내려면 적게는 몇 개월에서 몇 년까지도 걸렸다. 이는 채색화의 기법 때문이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채색화는 한 번에 두껍게 안료를 칠하는 것이 아니라 얇은 층을 여러 번 쌓아 완성해야 한다. 작품을 “내 혼이 담겨 있는 핏줄”로 표현하면서 “내가 낳은 자식을 몰라 보는 일은 없다”고 했던 발언은 그의 작업방식을 미루어 보았을 때 충분히 신빙성이 있는 말이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천경자의 정신상태까지 의심하며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다. 1999년 <미인도>의 위조범이라는 권춘식의 자수로 위작 논란이 재점화됐을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이었던 정준모는 “동양화 위조범과 미술관 중 어느 쪽을 믿느냐”고 반문하며 의혹의 목소리를 일축했다. 2)

2015년 천경자는 미국에서 타계했다. 그는 뛰어난 재능과 창작욕으로 치열하게 작업해온 작가로서 가장 존경받아야 할 말년을 불명예스러운 사건에 휘말려 잃고 만 것이다. 유족들은 천경자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미인도>의 재감정을 요구했다. 여기에 처음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장한 대로 국과수에서 감정했다는 말이 허위였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3) 2016년 2월 14일자 SBS 스페셜에서는 위작 논란을 둘러싼 1991년 당시의 증언들을 취재한 내용이 보도됐다. 4) 유족들은 국립현대미술관 측을 명예훼손으로 검찰에 고소했고, 프랑스의 뤼미에르 감정팀에 의뢰해 최대한 객관적인 데이터들을 토대로 <미인도>가 위작이라는 판정을 얻어냈다. 하지만 검찰은 유족이 고소한 학예연구실장 외 관계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진품이 맞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한편 2017년에는 해당 작품이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소장품이었고 그의 재산몰수 과정에서 함께 국가로 환수된 것이라는 소장 경위 자체가 거짓이라는 의혹이 재기됐다. 5) 신군부가 정권을 잡을 명분을 만들기 위해 김재규에게 사치품을 수집하는 부정부패의 오명을 씌운 거라는 얘기다. 천경자의 작품은 당시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재산목록에 넣은 것이고, 그것이 위작임을 시인하게 되면 국립현대미술관의 위상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김재규의 재산환수 과정까지 재수사를 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의혹이 사실이라면 정치권과 미술계가 결탁해 자신들의 치부를 덮기 위해 한 작가의 삶과 예술에 대한 자존심을 짓밟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아직도 진실이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채 한국 현대미술사의 오점으로 남아 있다.      

수십 년간 불거진 위작 논란은 천경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됐다. 그는 평생 자신의 삶과 예술을 지키기 위해 처절하리만큼 외로운 싸움을 했다. 가정사의 어려움에도 악착 같이 버텼고 왜색이라는 비판에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만들어 나갔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은 그에게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도피 수단인 동시에 힘든 일상을 다시 살아가게끔 했던 원동력이었다. 그가 여행에 심취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는 이국적 풍경과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성찰을 지속했다. 그의 예술은 결국 그의 ‘분신’과도 같다. 천경자의 작품 전반에 깔린 한(恨)의 정서는 그의 삶을 관통하는 저항정신 그 자체인 것이다.
 







송윤지(1984∼),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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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작품이 처음 전시된 것은 1978년 9월에 열린 현대화랑에서의 개인전이었다. 같은 해 천경자는 『그림이 있는 나의 자서전-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문화사상사)라는 자전적 수필을 출판하기도 했다.

2) “천경자 화백 미인도는 내 작품”, 연합뉴스, 1999. 7. 7.

3) “국과수, 위작논란 ‘미인도’ 감정한 적 없다”, JTBC, 2015. 11. 13.

4) “소문과 거짓말-천경자와 미인도”, SBS 스페셜(423회), 2016. 2. 14. 방송

5) “김재규와 천경자 미인도”, SBS 그것이 알고싶다, 2017. 1. 21. 방송








천경자, <생태 生態>, 1951, 종이에 채색, 51.5×87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1977, 종이에 채색, 43.5×36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천경자, <그라나다 두 자매>, 1993, 종이에 채색, 46×38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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