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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평론 | 부활하는 신호들, 그림자 꽃 - 김민혜

김종길



부활하는 신호들, 그림자 꽃

- 김민혜의 여성(주의) 미학 




익산창작스튜디오를 찾았을 때 내가 보았던 김민혜의 작품들은 2016년에 작업한 사진들이었다. 완전히, 하얗게 탈색된 듯한 희고 흰 배경에(그것은 아주 밝은 빛에 노출된 바탕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오브제들의 컬러풀한 색깔이 그야말로 ‘색을 쓰고 있는’-‘색을 쓰다’의 사전적 의미는 ‘성적 교태를 부리다’, ‘남녀가 육체적으로 교접하다’이다-장면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허위적 시선’에 다름 아니었다.


그 허위적 시선은 ‘관객’인 나의 착시(錯視)이거나, 욕망의 현시(現示)일수도 있을 것이다. ‘~처럼 보였다’의 허위는 그 오브제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관념’에 있기 때문이다. 그 오브제들은 착시를 불러일으키기에는 너무나 간단하고 소소했다. 오렌지, 디지털 노라인 줄넘기, 인공 색구슬과 보석, 바나나, 손지압기, 고양이 장난감 낚시대 깃털, 수족관용 인공 수초 등이었으니까. 성적 오브제가 아닐뿐더러 그런 류의 오브제와도 하등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그런 관념에 빠졌던 것일까?


김민혜의 작품들은 어떤 미학적 ‘덫’에 빠져들도록 하는 장치가 있었다. 오렌지와 디지털 노라인 줄넘기, 인공 색구슬, 보석 따위가 있는 작품의 경우, 붉은 주황빛이 감도는 오렌지의 절단면과 그렇게 잘린 두 개의 오렌지 조각들 사이에 남근을 닮은(정확히는 여성의 자위용 남근을 닮은 듯한) 핑크색 줄넘기를 배치했다. 그것들은 본래 오렌지이고 줄넘기여야 했으나, 그 꼴(모양)과 배치와 색이 어우러져 전혀 다른 상상을 열었고, 그런 상상 때문에 그 오브제들은 전혀 다른 성질의 물성으로 읽혔다.


문제는 그 덫의 장치와 그런 장치가 인간의 욕망을 흔들어 빚어내는 상징일 것이다. 그의 작업들은 위의 사진들처럼 알레고리(Allegory)와 상징이 기묘하게 얽혀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얽힌 것들의 메타포가 한 인간의 욕망은 물론이요, 한 사회와 그 사회의 역사, 또 그 역사에 내재된 일그러진 근대화의 초상 따위가 저변에 깔려 있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우리 사회가 강제로 잊게 만들었거나, 혹은 우리들 스스로가 잊어버린 것들일 것이다. 그러나 내재된 것들은 완전히 사라지거나 지워진 것이 아니어서 늘 어두운 그림자처럼 어떤 실체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다가 떠오르기도 한다. 김민혜의 작품들이 파고드는 지점은 바로 거기다.


 


#스스로(自) 위(慰)하다_다채널 비디오_00:05:00_2017


붉은 플라스틱의 작은 절구를 사타구니에 낀 채 한 여인이(‘그녀’는 작가 그 자신이다), 무언가를 짓찧는다. 고개를 살짝 숙였고, 머리칼마저 헝클어져 있어 그녀의 표정을 알아채기란 쉽지 않다. 절굿공이를 잡은 손이 연신 위아래로 절구통을 빻는 행위가 사뭇 기묘하다.


스스로 자(自), 위로할 위(慰). ‘자기 마음을 스스로 위로함’의 ‘자위’(自慰)는 그러나, 빻고 찧는 손의 오르내림과 그 오르내림의 위치가 사타구니로 집중되면서 ‘자위’[自慰=手淫]로 해석될 여지를 ‘의도적으로’ 남긴다. 그녀의 포즈에만 집중해 보면 에로틱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그 행위가 벌어지는 장소들을 가만히 살피면, 그 절구 찧는 행위 따위, 그 에로틱 따위의 감정이 일순간 부서지고 흩어지기 시작한다. 장소들은 허름한 빈 집이거나, 어떤 건물이 철거당한 폐허이기 때문이다(익산스튜디오에 있는 동안 작가는 익산역, 중앙시장, 호객행위를 하는 여관 앞, 익산역 앞의 40년 된 맥주집 엘베강, 청과물과 농산물을 판매하는 만물상회 앞이나 광장, 문 사이, 계단, 빈 터에서의 영상을 추가했다).


이 영상의 알레고리는, 그러니까 인물 ㆍ 행위 ㆍ 배경의 풍유(諷諭)는 일차적 의미와 이차적 의미가 서로 다르게 이어지는 알고리즘을 갖는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화해할 수 없는 것들-건설과 파괴, 희망과 슬픔, 미몽과 각성, 실재와 허구-의 반립(反立) 속에서 생겨난 예술 형식이 알레고리라고 했는데, 김민혜의 이 작품도 그 맥락과 유사하다.


화면 속에서 그녀는 오래된 집이거나 파괴된 건물의 잔해가 널브러진 곳에 있다. 영상을 보는 관객에게 그것은 실재일지 모른다. 그것이 1차적 의미를 형성시킨다. 그녀가 빻고 있는 것은 고추다. 고추는 이때 ‘남성성’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 남성적 근대성의 표본은 토목 건축형 도시문명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부수고 쌓고 다시 부수는 남성적 근대의 지반 위에서 그녀는 그 남성성의 상징인 ‘고추’를 짓찧으며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그 눈물은 희망도 아니고 슬픔도 아닐 것이다. 매운 고춧가루 탓에 흘리는 눈물이겠으나 그것은 또한 미몽에서 깬 각성의 눈물일 수도 있을 터. 이것이 2차적 의미를 낳는다.


익산을 다녀와 평문을 쓰는 와중에 그가 사진 3컷을 보내왔다. 오래된 집의, 내부의 마감재가 뜯겨져 나간, 비린내 나는 날것의 공간에(그 공간은 익산의 ‘문화INN’이다), <스스로 위하다>의 영상과, 그 영상 속 ‘그녀’가 빻은 고춧가루가 산처럼 쌓인 공간, 천장에 매달린 이발소 삼색등 아래 쌓아 놓은 모니터 3개. 이 모니터는 익산의 곳곳이 고추 빻는 여성과 함께 등장한다. 아이러니는 이발소 삼색등이다. 이발소 삼색등은 16세기에 응급실을 알리는 표지였다. 고대 중세 유럽에서는 이발소가 병원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발소 삼색등은 이발소와 미용실을 알리는 표지이기도 하지만, 지방의 역사(驛舍) 근방에 산재해 있는 퇴폐 유흥업소를 알리는 등이기도 하다.    


지금의 익산역은 ‘이리역’이었다. 이리(裡里)는 목화 꽃이 솜처럼 피어서 ‘솜리’라 불렀던 것의 한자식 표현이다. 1995년에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되면서 이리역은 익산역이 되었다. 이리역은 통한의 역사를 가졌다. 1950년 7월 미군은 이리역을 폭파했고 민간인 희생이 컸다. 1977년 11월에는 화약 폭발사고가 있었다. 이때도 민간인 희생이 아주 컸다. 이 폭발은 건국 이래 최대의 폭발참사로 기록된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부정부패와 적당주의라는 우리 사회의 치부가 적나라했다. 사고의 무참함이 더한 것은, 당시 이리역 인근의 판자촌 사람들과 홍등가 여성들의 희생이 무엇보다 더 컸다는 것이다. 김민혜는 이런 익산의 역사적 사건을 영상의 서사적 구조에 녹였다.


작가와 만났을 때는 알지 못했으나, 전시가 구현된 것들 속에서 삼색등의 발견은 이 작품의 의미를 더 깊게 해석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3개의 모니터가 3층 석탑처럼 쌓인 곳에서 저 삼색등의 리얼리티는 지금 여기의 ‘현실’과 저 너머의 ‘초현실’을 동시에 함의하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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