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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1912) | 삐딱한 시선을 가져라!

김종길

나는 종종 1980년대 초반의 『季刊 美術』을 꺼내 본다. 봄여름가을겨울, 네 번의 계절에 쌓인 미술계 기사는 두툼해서 그 알맹이를 꺼내 읽는 기쁨이 크다. 번잡한 것들이 끼어들 틈이 많았을 터인데도, 목차를 채운 꼭지 제목 필자를 보면 내용의 질이 만만찮다. 지금과 달리 세로쓰기 판형이어서 표지도 반대쪽이다(1983년에 가로쓰기로 바뀐다).


그 시대는 70년대의 미학과 맞서는 청년미술가들의 인정투쟁 시기여서 새파란 필력이 돋보이는 평론이 적잖다. 이제는 칠순이 넘었거나, 최근에 귀천(歸天)한 평론가들의 흑백 초상이 진지하다. 그들은 그 지면을 영토삼아 삶의 미술이란 푯대에 현실주의 깃발을 매달아 세웠다. 삶의 진실에 다가서는 새 구상, 구체적 형상의 미술, 빗나간 한국 현대미술의 궤적, 미술가는 현실을 외면해도 되는가를 말하고 외치고 따지면서.  


그뿐이랴. 친일미술 문제를 부관참시(剖棺斬屍)해서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질 않나(사실 죽은 적도 없지만), 미술대학 교육의 허구를 파고들고, 미대 졸업생이 갈 곳 없다는 충격보고서를 제출한다. 반면, 지방화단을 찾아 지역미술의 현실을 기록하고, 근대미술을 발굴해 근대미술사 서술의 초석을 놓고, 오늘의 작가면에서는 평론의 깊이를 보여주는 작가론/작품론을 펼친다.


중국 폴란드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세계미술의 현장을 공수하고, 긴급한 우리 문화재 이슈를 터트리며, 민족미학의 상징기표를 연재하면서 작고한 예술가의 예술정신을 파고든다. 미술운동의 현주소를 짚어내는 1985년 봄의 기획은 그 자체로 지면 기획전이다. 40명 작가의 작품을 분석해 섹션 주제어를 뽑고 작품마다 짧은 열쇳말을 푼 뒤, 미술평론가 이일과 성완경의 대담을 붙였다. 두 대담의 논점이 선명해서 운동의 시대적 방향성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후식은 젊은 그룹들의 선언문이다.


미술잡지가 많지 않았던 시대. 그래서 미술운동은 무크지, 전단지, 단행본, 학보사 신문 등의 지면을 파고들기도 했으나, 『季刊 美術』은 시대를 횡단하는 기획을 놓지 않았다. 미술 전문지, 미술 언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것. 미술이란 지층에서 시대와 현실이라는 역사성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되는 이유다.


큐레이터이자 미술평론가로서 여러 미술잡지를 탐독 중이다. 그러나 달마다 배달되는 잡지들은 30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내 손을 떠나 책꽂이 꽂힌다. 재미가 없다. 글들은 건조하고, 담론은 사라진지 오래다. 이론은 해박한데, 평론의 글맛 찾기가 쉽지 않다. ‘시대’가 증발한지도 꾀 된 듯하다. 미술이 미술사로 귀향한 것인지, 미학으로 투항한 것인지 새 미술의 전위를 엿보이는 이미지도 찾기 어렵다.


동시대성을 획득했다고 자부하는 한국미술의 현장은 예전보다 시끄럽지 않다. 블랙리스트가 있었다고는 하나,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고는 하나, 그것에 저항하는 미술은 뜨겁지 않다. 세계미술과의 온도차가 사라진 지금, 우리 미술잡지의 현주소는 평평하다. 한국미술이 평평하니 미술잡지도 평평한 것일까? 이럴 때일수록 삐딱해져야 하지 않을까? 평평한 미술계를 콕 찔러서 출렁거리게 해야 하지 않을까? 야단법석을 떨어서 큰 담론의 진앙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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