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달진
한국 야수파의 선각자, “한국의 로트렉”
구본웅(1906-1953)
서산 구본웅은 그 당시 아버지가 창문사라는 출판사를 경영할 정도로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어머니를 잃고, 유모의 실수로 세 살 때 그만 척추를 다쳐, 그 후 등이 굽어 몸이 쇠약해졌다. 소학교를 4년 늦게 입학하였고, 그렇게 시인인 이상과 죽마고우로 지냈다. 구본웅은 경신고등보통학교 재학하며 미술에 발을 들였고, 토요일마다 고희동이 있는 YMCA 고려미술회에서 서양화를 배웠다. 이후 고려미술원에서 김복진에게 조소를 배우며,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얼굴습작> 조소로 특선을 받았다. 1928년엔 도일하여 가와바타미술학교를 다닌 후 29년 니혼대학 전문부 미학과, 33년 다이에이요미술학교를 다니며 서양화의 기반을 다졌다. 30년에 이과회 미술전에서 조선인 처음으로 입선을 했다. 귀국 후에도 전시회를 열고, 목일회, 백만회 등의 미술단체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종합문예지인 “청색지” 창간했으며, 그후 1946년 문교부 편수국 편수사로 임명되어 미술교과서를 편찬하였고,1952년에는 서울신문에서 일했다. 그는 폐렴으로1953년 47세 나이로 요절했다.
구본웅
구본웅을 언급할 때 꼭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위에 잠깐 언급했듯이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李箱)이다. 소학교동창인 그에게 화구박스를 선물해주며 ‘이상’의 이름을 본인이 지어줬다는 유래가 있을 정도로 우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이상도 화가를 꿈꿨으나 가세가 기울어 가난한 탓에 포기하려 했지만, 구본웅이 도와주어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자상>으로 입선을 하였다. 그 후에도 이상이 개업한 제비다방과 연이은 사업실패로 힘들 때 아버지의 출판사에서 일하도록 도왔던 우정이다.
여인 1930
구본웅의 작품전시는 1954년 구본웅, 김중현, 이인성 3인유작전(천일화랑), 1974년 구본웅 시화유고전(한화랑), 1975년 구본웅, 이인성, 이중섭전(한일화랑)이 있었고 1974년 구본웅시화첩-허둔기가 한국근대미술연구회에서 발행되었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 김경원, 구본웅이 엮은 1950년 중등학교 미술교본 2, 3학년(동방문화사) 삽화가 실린 <문예> 1949년 10월호 등이 있고 서울아트가이드 2025년 3월에 구본웅 아카이브 목록을 소개했다.
나부 1936
그의 작품들은 6.25 전쟁으로 인해 불타 남아있는 작품이 많지않지만, 그 중에서 이상의 얼굴을 그린 <친구의 초상>과 <여인> 이 대표작이다. 그는 특히 야수파, 입체파, 표현주의 작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일본 유학할 당시, 일본 화단에 야수파 운동이 크게 유행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본웅의 작품들을 보면 강렬한 색채와 거친 붓터치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프랑스 야수파 화가인 모리스드 블라맹크의 제자였던 일본인 화가 사토미 가츠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는데, 친구의 초상은 블라맹크, 여인은 사토미 가츠조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우인의 초상 1935
누드와 정물 1937
초고 : 박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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