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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팡세 : 앤디 워홀과 현대미술의 이해

정택영

앤디 워홀과 현대미술의 이해 
Understanding on Andy Warhol, representative Pop Artist and Contemporary Arts 

근자에 이르러 현대미술의 특성 가운데 대작 代作이나 조수助手 assistants 를 고용해 작품을 완성하고 작가가 사인을 하여 자기 작품으로 발표하고 있는 세태를 놓고 일반 대중은 물론 미술계 관계자들이나 전문가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때마침, 이러한 현대미술의 특성을 그대로 적용하고 대작 작가로 하여금 자신의 작품 구상 (법의 판시에서는 아이디어 idea란 말을 사용함)을 그에게 그리도록 시키고 완성된 작품을 인도받아 그 그림 위에 자신의 사인을 해 전시도 하고 작품을 판매해온 사실로 인해 법의 심판을 받게 되는 일로 비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정당하며 무죄라는 판결이 남으로써 이 '대작이란 것이 미술계에서 있어온 일반적인 관행'이라는 옹호론과 변론을 두고 일반 대중들은 물론 미술계 관계자들과 화가들까지 혼돈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예술작품과 창작행위에 대한 시비를 가리기 위해 법의 심판대까지 갔다는 것도 예술인으로서는 수치감을 갖는데 하물며 그 판결의 결과가 무죄라는 것에 저으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사건은 법의 심판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희랍의 철인 소크라테스도 '악법도 법이라 했음을 상기하면서 말이다.

차제에 왜 이러한 대작행위가 사건의 표면으로 떠올랐는지, 현대미술이 어떤 특성을 지녔기에 이러한 일이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 사회적 이슈가 되었는지 그 연원淵源을 분석하고 정리해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을 쓰는 목적이다.

우선, 미술 작품의 대작행위와 조수를 고용하는 행태가 법에 저촉이 되거나 법의 심판을 받았던 사례나 판례가 한국 이외의 외국에서 있는지 정확한 검증을 위해 인터넷 서핑을 시작했는데 검색창에 영어로 어떤 keyword를 입력할지 이에 합당한 표현의 단어가 부재했다.
역사적으로 미술작품이 법의 심판을 받은 판례는 저작권 위반 Copyright infringement, 남의 작품 이미지를 차용 Appropriation, 사기 Fraud, Scam 등의 법적 용어는 존재하지만 '다른 사람이 미술작품을 대신 그려주는 행위' 를 영어로 표현할 키워드는 존재하지 않았다. 세계 공용어라는 영어 단어에 이렇듯 대작이란 전문용어가 없으니 그만큼 이번 한국에서의 대작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희귀한 사건이 아닐 수 없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IT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e-Learning 이란 디지털 교육 콘텐츠 프로그램 개발로 큰 공을 세운 친구가 내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많이 많이 공감하고 있네.
하지만 이를 바로잡을 만큼 미술계는 반향이 없으니 마음 다스리고 일상에 매진 하시길 바라네.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에 왕이나 교황으로부터 은전을 하사 받고 원하는 작품 작업을 대행 할 때나, 현대에 재벌 자본의 기획과 캐스팅으로 유명 감독이 영화를 찍거나 ... 이제 미술도 비슷하니, 더우기 스토리 메이커의 파워와 대중 이슈에 따라 부스러기 주워먹는 평론가들의 평가에 의해 그 가치가 판가름나고 인기도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시대이니... 동서고금 늘 권세가 있으면 이기는 것 아닌가? ^^ >라고 말이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대중인 나의 친구도 이렇게 역사적인 현상과 현대의 세태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의 친구 생각은 현대미술의 특성이나 그 방법론에서 대작이나 조수를 기용해 작품을 다량생산하는 문제를 논하기 보다 현 세태가 금권만능주의에 젖어있음을 에둘러 말한 것으로 보인다.
두말 할 나위 없이, 현대사회가 이러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하더라도 현대미술에 있어 대작행위가 왜 관행이라고 보는지에 대한 근거를 도출해보는 것이 현대미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우선 현대미술의 특성은 열거하기 조차 어려운 일이지만 과거의 모더니즘 시대에 있어온 미술양식을 완전히 깼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남의 작품이나 이미지를 차용Appropriation 하거나 복제하는 행위, 부분적인 활용, 패러디 Parody, 등이 허용이 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방가르드 Avant Garde나 개념미술 Conceptual Art, 포스트 모더니즘 Post Modernism 등의 미술사적 변천과정을 상세히 이해해야만 하는데 그중 하나로 Pop Art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팝아트는 파퓰러 아트 (Popular Art, 대중예술)를 줄인 말로서, 1960년대 뉴욕을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의 한 경향을 말하며 그 발단은 매스 미디어에 주목한 1950년 초의 리차드 해밀튼 등의 영국작가였으나, 반예술적인 지향 밑에 신문의 만화, 상업디자인, 영화의 스틸(still), TV 등, 대중사회에 있어서 매스 미디어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주제 삼은 것은 뉴욕의 팝 아티스트들이다. 자스퍼 존스, 라우센버그(⇒네오 다다)를 선구자로 하고, 리히텐슈타인, 워홀, 올덴버그, 로젠퀴스트, 웨셀만, 시걸 등이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팝 아트는 서브 컬처나 풍속에 접점(接點)을 구한 1960년대 미술의 큰 물결 중 하나로, 미국 만이 아니라 유럽이나 한국의 젊은 작가들에게도 공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더욱이 세계적으로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도 큰 영향을 준 미술의 한 경향이다.

이들 중 대표작가의 한 사람으로 앤디 워홀이 그 중심에 서 있다.
그는 슬로바키아(당시는 체코) 이민 가정에서 1928년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고 성장해 미국의 카네기 공과 대학(현재 카네기멜론 대학교)에서 상업미술 Commercial Art를 전공한 미술학도였다. 원래부터 미술을 해왔고 전공을 한 사람이란 말이다. 
1960년 (32세) 때까지 많은 일러스트레이션과 패션 일러스트를 그렸다가 일러스트레이션의 세계를 버리고 순수미술의 세계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실크스트린 인쇄기법을 통해 대량생산된 상품의 그림을 그리는 것만 아니라 작품 자체를 대량생산하였다. 작품을 대량생산하기 위해 '예술 노동자 art worker; 아트 워커'들을 고용하여 뉴욕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인 팩토리 The Factory (스튜디오를 팩토리라 칭한 것이지 이를 번역하여 '공장'이란 의미로 쓴 것이 아니었다) 에서 판화, 신발, 영화, 책 등을 만들어냈다.

그의 화실이자 작업실인 스튜디오 '팩토리'는 믹 재거(롤링 스톤즈), 루 리드(벨벳 언더그라운드), 트루먼 커포티(작가), 에디 세즈윅(모델) 등의 아티스트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그의 작업실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 까닭은 작업실이면서 동시에 사교장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된 작업실이었으므로 작품을 다량 생산하는 것이 비밀스러웠거나 감출 필요도 없었고 누군가가 이를 폭로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는 사교계로부터 의뢰를 받아 초상화 실크 스크린 제작 프린트를 다수 제작했다. 1970년 〈라이프 지〉에 의해서 비틀즈와 함께 '1960년대에 가장 영향력이 있던 인물'로 선정되었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방중에 맞추어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제작했고 같은 해 그의 어머니가 피츠버그에서 사망하면서, 전 세계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기에 이른다.

워홀의 작품 세계는 대부분 ‘미국의 물질문화’와 연관되어 있다. 그는 돈, 달러 기호, 식품, 잡화, 구두, 유명인, 신문 스크랩 등을 그렸다. 그에게 이런 주제들은 미국 문화의 가치를 의미했다. 예를 들어, '코카콜라는 언제나 코카콜라다. 대통령이 마시는 코카콜라는 내가 마시는 코카 콜라와 같은 그 콜라다'. 그는 대중에게 익숙하고 유명한 이미지를 이용해 20세기 미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표현했다. 이런 그만의 독특한 미학과 예술철학을 기반으로 자신의 작품에 사인을 하지 않기도 했다.

워홀은 자신에 대해 물었을 때, '나를 알고 싶다면 작품의 표면만 봐 주세요.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라며 철저하게 '예술가의 내면'을 없애고 표면적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유명한 것에 애정을 숨기지 않고, 스타와 정치인이나 사고, 패션 제품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으며, 그것이 유명하고 또 내 자신도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또한 그 자신이 미국의 유명인이 되고 나서도 걸음을 흩트리지 않고, 유명인을 연출하여 작품을 제작하고 유지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워홀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당신이 훔쳐 달아날 수 있는 모든 것이 예술이다. Art is what you can get away with.'
이렇게 말했던 워홀도 다른 작가의 이미지를 차용해 사용하다가 고발을 당해 법의 심판을 받기도 했다.

또한 '돈을 버는 것은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훌륭한 사업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예술이다. Making money is art and working is art and good business is the best art.'라 말할 정도로 철저히 예술을 하나의 사업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정의를 '예술가는 사람들이 가질 필요가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An artist is somebody who produces things that people don’t need to have.'고 하면서 예술의 순수성과 돈을 번다는 것에 대한 상반된 모순 paradox을 스스로 만들어간 사람이었다.

워홀은 유명해지기 위해서 유명인사들과 늘 함께 사진을 찍었다. 무엇보다 끌린 것은 대중매체에 나타난 스타의 이미지다. 워홀은 196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아이콘인 재클린 케네디와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를 실크스크린으로 재현했다. 존 레넌, 주디 갤런드, 존 웨인, 믹 재거, 마이클 잭슨, 무하마드 알리, 매릴 스트립, 클린트 이스트우드, 발렌티노, 다이애나 빈, 마오쩌둥, 레닌, 아인슈타인, 카프카, 베토벤 등 그의 ‘팩토리’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은 유명인사는 거의 없을 정도였다. 감춤과 드러냄이라는 워홀식 사고의 양면성은 여기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사진으로 꼽히는 체 게바라 사진이 유명해진 것은 앤디 워홀의 작품으로 알려진 포스터 때문이었는데 이 작품은 워홀의 조수가 몰래 팔려고 제작한 위작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워홀은 조수를 고소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작품이라고 말했고 결국 그는 고액의 작품 값을 챙겼으며 조수는 사기죄를 면할 수 있었다. 돈 버는 것도 예술이라고 말한 그에게 있어 예술은 혼자서 하는 작업이 아니었다.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듯 직원을 채용해 미술작품을 찍어냈다. 그는 예술의 고정관념을 깬 미술공장의 CEO였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과정을 겪은 워홀이 왜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서게 된 것일까?

현대미술을 주도하기 시작한 뉴욕. 세계적인 컬렉션 규모를 갖추게 된 뉴욕 현대미술관 모마MOMA 에 정작 미국 작가의 작품은 없었다. 모마는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미국 작가의 작품이 필요했다. 잭슨 폴락. 마치 서부 개척자들처럼 광활한 자연을 누비며 펼쳐지는 것 같은 폴락의 액션 페인팅은 미국 미술을 새롭게 탄생시켰다. 정부의 후원으로 유럽 순회전시회를 몇 차례나 가질 수 있었던 폴락은 세계적인 작가로 부상했고 그의 활동 무대였던 뉴욕은 세계미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상업미술가였던 앤디 워홀은 폴락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러나 대중문화가 급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하고 집집마다 TV를 갖게 되면서 대중스타가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경제적 독립이 가능해진 젊은이들은 권위와 전통을 부정하고 대량소비문화를 환호했다. 이것이 팝아트의 시작이었고 워홀이 스타로 부상할 수 있는 미국의 시대적 상황이었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갤러리들은 워홀에 버금가는 스타작가를 찾으려고 하고 또 지금도 찾고 있다. 현재 워홀을 잇는 스타작가는 제프 쿤스가 있는데 그 스스로 워홀의 작품을 차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대표적인 키치 Kitsch ; 천박하고 저속한 모조품 또는 대량 생산된 싸구려 상품 또는 그러한 것을 소재로 한 작품) 작가인 제프 쿤스의 작품 값은 대부분 100억 이상이다. 스타작가는 본인뿐만 아니라 전속 갤러리에도 부와 명예를 가져다준다. 그래서 갤러리들은 스타작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팝아트의 아이콘이 되어있는 워홀은 대중스타 대열에 서 있다.
워홀은 예술가를 가리켜 ‘왜 사람들은 예술가들을 특별하게 생각할까? 단지 또 다른 직업일 뿐이다.’라고 말했으며 '이제 모든 제품은 영국 여왕에게나 길거리 행인에게나 같은 맛을 제공한다.'는 생각이 결국 팝아트를 낳게 된 요인이었다.

워홀의 이 말을 통해 그가 얼마나 유명한 사람이 되고자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유명해져라. 그렇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똥을 싸도 박수를 쳐 줄 것이다.'

결론적으로,
앤디 워홀은 정규 미술대학을 나온 미술가였으며 이미 일러스트레이션 Illustration이나 선 드로잉Line Drawing 뎃생Dessin 등의 작품들의 수준이 뛰어났다.

또한 당시 미국의 역사에서 미국을 대표할 현대미술가를 필요로 하고 있을 때 워홀이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조수들을 고용한 것은 이미 그 자신이 상업미술가라고 선포를 했고 자신의 작품을 찾는 고객이 너무 많아 자신의 작업을 도울 사람이 필요했다. 이것이 팩토리에서 일한 예술노동자들의 의미였지 그들이 대리로 작품을 해준 것이라 볼 수 없는 이유이다. 

이번 한국에서의 대작 사건에 관련하여 사건의 당사자가 '아이디어만 주고 다른 화가를 불러 자기 아이디어대로 그림을 그려달라고 계약을 맺고 지시'한 것은 이미 자신이 자신의 작품구상 (아이디어idea)를 실제로 2차원의 평면 위에 표현할 조형적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이번 판시에서 인용했던 대로, 당사자가 워홀만큼 뛰어난 뎃생력을 이미 연마했고 지니고 있었다면 굳이 다른 화가를 불러 이렇게 그려달라 저렇게 그려달라 주문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작품을 대작해서 그리도록 했다는 행위는 이미 자신이 화가가 아님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들 예를 들어 이중섭의 소를 보라! 그의 뎃생력을 그만큼 표현할 수 있는 화가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중섭이가 대작할 다른 화가를 불러 이렇게 저렇게 그려달라고 말로만 주문을 했다면 오늘날 국보급이 되어있는 저 소의 힘찬 선과 투박한 붓질이 나오겠는가?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 수화 김환기 화백의 작품 밑그림인 뎃생과 에스키스를 보면 그가 얼마나 기본기에 뛰어난 화가인지 잘 알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의 시비를 가리기 위해 사건 당사자로부터 작품 제작을 위한 드로잉이나 에스키스, 평소에 그리던 뎃생 작품을 요구해 감정해보면 그의 기본기를 가늠하고 대작 화가를 필요로 했던 이유를 추적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워홀에 대한 나의 이 글로써 대중들도 현대미술의 출현과 그 특성을 잘 이해하고 동시에 현재 한국에서 야기되고 있는 대작 문제나 조수를 기용하는 문제를 동급으로 놓고 해석하고 정의를 내리는 오류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해본다.

2018년 8월 21일 화요일 정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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