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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윤영혜 / 열린 회화 -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무엇을 위해

김성호

열린 회화 -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무엇을 위해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프롤로그
자신이 빚은 도자기를 가마에서 꺼내 유심히 살펴보더니 가차 없이 내던져 깨버리는 도공이 있다. 우리는 그의 초연한 표정에서 흠결 없는 작품을 생산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읽는다. 자신이 만든 작품을 불살라버리는 조각가도 있다. 그는 말한다. “이따위 유치한 작품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작품다운 작품을 하겠다”고 말이다. 애써 그린 자신의 그림을 난도질해서 찢어발기는 화가를 본 적이 있는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그는 당장이라도 작업을 때려치울 것 같은 기세로 극도의 분노 속에서 ‘자신이 만든 세계’를 무너뜨리고 또 무너뜨린다. 우리는 예감한다. 그가 다시 붓을 잡더라도 언젠가는 또 한 번 이러한 사건을 만들리라는 것을 말이다.  





I. 지우기라는 다시 쓰기 혹은 겹쳐 쓰기 
여기 전시장 오프닝에서 자신의 작품을 검은 물감으로 뒤덮어 지우고 있는 화가가 있다. 작가 윤영혜! 그녀는 왜 애써 그렸던 그림을 지우는 것일까?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위의 세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기반성 혹은 자기 성찰! 다만 다르다면, 그녀는 전시를 위해서 지우기의 과정을 처음부터 계획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회화를 대면하는 화가의 자기반성이자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는 결단의 지점이 된다. 그 행위는 지우기가 또 다른 그리기임을 증명해 보이는 일이자, 보이는 시각 너머로 보이지 않는 무엇을 발견하려는 일련의 시도가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작품 〈VARNISH: VANISH performance〉는 이름처럼 ‘광택(Varnish)’ 가득한 이미지를 궁극적으로 ‘사라지게(Vanish)’ 하는 지우기/혹은 그리기를 실천한다. 
접시 위에 있는 화려한 꽃을 지우고 사라지게 하는 그리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의 회화를 부재로 되돌리는 허무의 몸짓임과 동시에 ‘충만한 어둠’과 같은 새로운 무엇을 창출하는 출발점이 된다. ‘그다음 회화’를 예고하는 까닭이다. 그런 면에서 이 퍼포먼스는 조금 복잡하게 말해, ‘충만과 부재가 연동하는 철학의 지평’에서 윤영혜 개인사의 ‘진보적 전개를 함유한 역사철학’ 관점의 프롤로그가 되는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퍼포먼스는 작업실에서 전시장으로 옮긴 완성품을 ‘완결된 공간 예술’로부터 ‘과정의 연속선상에 위치시키는 시간 예술’로 전환하는 동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윤영혜의 이러한 시도는 회화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머리로 파악하기보다 스스로 몸을 부딪쳐 체득하려는 노력으로 읽힌다. 생각해 보자. 20세기 이래로 거시적 내러티브를 내세우면서 많은 작가에 의해서 아방가르드라는 이름으로 시도되었던 다양한 조형 실험은 오늘날 이미 구태의 것이 되었지만, 미시적 내러티브로 둘러싸인 현대 미술을 꽃피우는 자양분으로 남았다. 오리지널리티의 전설은 패러디와 혼성모방이라는 이름으로 전유되어 모든 미술가의 흔한 조형 언어로 산포(散布)된 지 오래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영혜의 작업은 20세기 미술사를 자신의 조형 실험으로 곱씹어 반추하는 무엇이 된다.  
특히 윤영혜의 회화에서 ‘지우기’는 이러한 관점에서 작동한다. 그녀의 지우기는 이전 것에 대한 부정과 해체이기보다 ‘다시 쓰기(Rewriting)’의 관점을 취한다. 〈Nothing happened_Erased Project〉 연작은 이러한 지우기와 다시 쓰기의 관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작품 〈Painting〉, 〈Drawing〉, 〈Writing〉 등에서 연필로 ‘써진 그림’ 혹은 ‘그려진 글씨’는 실제로 지우개로 지워지고 애초의 그림과 글씨를 희미하게 흔적으로 남긴다. 자신의 몸을 종이 위에 비벼 지우기의 역할을 다한 지우개 가루, 즉 지우개의 분신들은 흑연으로 오염된 쓰레기가 되었건만, 작가에 의해 다시 물감으로 재현된다. ‘쓰고/그리고-지우고-다시 쓰고/다시 그리고’의 사건들이 같은 종이 위에서 순차적으로 벌어진다는 점에서 엄밀히 말해 이 작품들은 Repainting, Redrawing, Rewriting이라고 하겠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이전의 사건 위에 또 다른 사건을 겹쳐 쓰는 일이 되기도 한다. 작가에게 의미가 있는 두 연도와 일자를 겹쳐 쓴 작품 〈2021.6.12.2014.9.15.〉이나 자신이 결혼하면서 얻게 된 정체성을 이어 붙여 표기한 작품 〈daughterartistwifehousewifemotherdaughter-in-law〉도 대표적이다. 수많은 명명(命名)과 호명(呼名)으로 점철된 다중의 정체성은 현대인에게 대표적인 상징을 지우고 부수적인 이미지를 덧씌우기 십상이다. 어쩌면 그것은 ‘본문’을 지우고 ‘각주’로만 살아가는 일처럼 낯설기도 할 터지만 그것도 분명 우리/그(들)의 정체성이다. 캔버스를 흰 물감으로 페인팅한 후 캔버스의 정면이 아닌 측면에 ‘태커 심’이 정교하게 그려진 작품 〈Painting〉은 본문과 주석이 도치된 작품이다. 21세기 흰색의 모노크롬이라는 ‘지우기와 다시 쓰기’ 그리고 회화의 프레임 안/밖에서 실행하는 ‘겹쳐 쓰기’를 동시에 선보이는 작품이라 하겠다. 가히 본문을 지우고 주석을 다시 쓴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또 다른 작품인 바니쉬(VARNISH) 연작도 본문을 지우고 주석을 내세운 작품이다. 화려한 꽃들을 재현한 원화는 포장된 채, 수장고처럼 만든 전시장 구석에 있고 그것의 복사본이 버젓이 원작처럼 전시장 벽에 게시되는 방식을 통해 그녀는 회화에서의 원작의 의미, 예술 시스템에서의 전시의 의미를 질문하면서 ‘지우기라는 다시 쓰기와 겹쳐 쓰기’를 실행한다. 
달리 말해 윤영혜는 창작의 과정을 통해 완성된 결과물에 집중하는 전시 방식이 아닌, 한 평론가의 말처럼, ‘전시 이후의 방식’을 고민한다. 그녀는 ‘지우기/다시 쓰기/겹쳐 쓰기’를 실행함으로써 완성과 미완성, 결과와 과정, 본문과 주석, 원본과 사본, 실재와 허구의 간극이 그다지 큰 차이가 없음을 확인하는 다양한 미술 실험을 거듭하는 중이다. 





II. 열림의 -n을 위하여 
무엇을 위한 실험인가? 클랭(Yves Klein)의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IKB)’나 로스크(Mark Rothko)의 ‘검은색 위의 검은색’처럼 미학 내부의 문제로 잠입하거나, 피카소(Pablo Picasso)나 뒤샹(Marcel Duchamp)이 천착했던 ‘발견된 오브제’의 실험이나, 만조니(Piero Manzoni)가 자신의 배설물과 같은 비루한 일상을 예술화했던 실험처럼 미학 외부의 문제로 뛰쳐나가는 일이란 결국 과거와는 다른 새것들(nouveautés)을 찾아 나서는 20세기의 미술 모험이었다. 아서라! 그러나 우리는 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했듯이, 애초에 내 안의 원전과 오리지널이란 없으며 바르트(Roland Barthes)의 텍스트(texte)론이 언급하고 있듯이, 모든 것들이 그저 내 밖에서 발원한 “수많은 문화의 온상에서 온 인용들의 짜임”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21세기에는 인용과 가짜의 얽힘 그리고 시뮬라크르의 만남만 인정될 뿐 더는 어떠한 것도 새것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래서 “헛되고 헛되다”는 성경의 오래된 아포리즘(aphorism)이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에게서 “모든 것이 무가치하고 무가치하다”는 ‘회의론적 무가치론’과 겹쳐진다. 
윤영혜는 비교적 최근작인 <THIS IS NOT ANYTHING> 연작을 통해서 자신이 시도하고 있는 조형 실험들이 ‘특별한 무엇’이 아님을 선언한다. 그녀는 자신의 작업이 20세기 미술을 자신의 몸으로 맞닥뜨리며 복기(復棋)하는 ‘그저 그런 그러나 스스로 치열한 조형 실험’임을 3인칭의 언어로 고백한다: “윤영혜는 이 문장이 쓰인 그림으로부터 파생된 여러 작품을 통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니 굳이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는 듯한 제스처로 비쳐낸다. 요컨대 이 의미를 가리는 페인팅을 다양하게 양산하는 듯 보이나 사실상 ‘이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님’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렇다. 작가 윤영혜는 자신의 작품이 모두에게 ‘특별한 무엇’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허섭스레기와 같은 누추한 것’이 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자신에게나 혹자에게 ‘유의미한 무엇’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회화의 여러 담론과 경계를 오가는 소위 ‘비트는 회화’에 작가 윤영혜가 천착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가상의 미술평론가 ‘황윤역’의 글을 빌려 그녀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녀의 작업이 ‘주제를 가리는 가리개인 동시에 주제를 드러내는 이미지’이길 기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자신의 작업이 빤한 주제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특정 양식으로 트렌드화된 ‘닫힌 회화’이길 거부하고, 21세기를 이끄는 실험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시대에 유의미한 여러 해석으로 ‘열린 가능성의 회화’이길 기대하는 셈이다. 윤영혜의 최근작 <‘n’의 풍경> 시리즈는 이러한 ‘열린 여러 가능성’을 전제한다. 즉 이 연작은 ‘n’의 자리에 “nature, name, number, nothing 등과 같은 의도적으로 제한된 언어 기호”를 대입하거나, “개개인의 인식 체계와 그에 따른 상념을 거쳐 얻은 또 다른 n”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두는 작업을 지향한다. 구체적으로는 이 연작은 ‘자신의 회화 속 일부분 장면과 붓 터치를 크게 확대하는 방식’으로 ‘이미 그린 그림을 재현’한 것으로, 저부조의 마티에르를 부여한 ‘클레이 페인팅(Clay painting)으로 이미지의 물성을 극대화하거나, “회색조의 페인팅 위에 흰색 물감을 오일과 섞어 불투명하게 덧입힌 ‘화이트 글레이징(White glazing)’ 기법을 통해서 거의 완성된 이미지를 안개가 낀 듯한 흐린 풍경으로 전환하면서 이미지의 모호성을 강화한다. 텍스트로 만든 이미지이되 읽기 어렵고, 간신히 읽어낸다고 하더라도 텍스트의 의미가 이미지 덩어리로 흩뿌려진 희미한 무엇! 무심한 관객에게 보이지 않는 작품으로 해독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불친절한 작품을 표방하지만, 면밀한 관객에게는 보이지 않는 작품 이면에서 비로소 해석과 소통의 문을 여는 무엇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윤영혜의 <‘n’의 풍경> 연작은 마치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Félix Guattari)가 언급하는 n-1의 차원의 복수성과 연계한다. ‘n-1 차원’이란 무엇인가? n-1 차원은 수학적 구조이기보다 리좀(Rhizome)처럼 복수적 존재를 지칭하는 철학적 메타포이다. 여기서 n은 일반적 개체이고 1은 우월한 어떠한 존재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론에서 복수성의 규칙(Principe de multiplicité)’에 대해서 설파하고 있듯이, n+1 차원이 어떤 개체 n에 하나의 우월한 어떤 존재를 덧붙임으로써 가능한 복수성이라면, n-1 차원은 오히려 반대로 우월한 어떤 존재를 없앰으로써 가능한 ‘리좀’과 같은 복수성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지우기와 다시 쓰기’ 그리고 ‘겹쳐 쓰기’를 시도하는 윤영혜의 <‘n’의 풍경>은 n-1 차원을 공유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녀의 <‘n’의 풍경>을, 일반적 개체 n에서 우월한 존재인 1을 빼는 것으로 평가하기보다 주체가 되는 개체 n이 스스로 지우기와 다시 쓰기를 통해서 변신을 거듭한다는 차원을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즉 ‘스스로 지우고 다시 쓰기’를 행하는 –n차원을 말이다. 따라서 윤영혜의 <‘n’의 풍경>은 민주적인 네트워크와 연합체인 n-1 차원의 복수성이기보다 한 주체가 다양한 인격으로 분열하고 겹쳐지는 불완전한 -n차원의 정체성을 공유한다. 메타포로 치자면 조현병(schizophrenia)과 같은 정체성인 셈이다. 나를 지우고 타자를 수용하는 -n차원은 그래서 언제나 가능성을 잉태하고 열어둔다. 




에필로그 
여기, 〈THIS IS NOT ANYTHING〉 연작을 통해서 자신의 작품이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고 겸손하게 선언하면서도 정작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무엇’이기를 기대하는 화가가 있다. 그러한 기대는 결코 작가 윤영혜만은 것은 아니리라. 그런데 그녀는 남들이 관성적으로 매몰되곤 하는 ‘진부한 회화’의 방식을 거부하면서 유의미한 회화 실천을 스스로 과업으로 삼으면서 오늘도 끊임없이 자신만의 조형 실험을 모색하는 중이다. 오늘도 작가 윤영혜는 20세기 미술사를 조형 실험을 통해서 횡단하고 직접 체험하면서도 그것을 자양분 삼아 오늘날 요청되는 ‘형식적 새로움 이면’의 것들이 무엇인지를 되묻고 그것을 찾아 나선다. 
본문 아닌 주석, 원본 아닌 시뮬라크르, 주체 아닌 타자와 대상으로 관심의 초점을 모으고 자신을 지우고 다시 쓰는 -n의 차원에 대한 작가 윤영혜의 탐구가 조만간에 결실을 얻길 기대한다. ●


출전/
김성호, 「열린 회화 -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무엇을 위해」, 『윤영혜』. 전시 카탈로그, 2021.
(윤영혜 회화전, 2021. 5. 5~5. 11, 갤러리 아트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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