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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 이예선 / 생명의 밥알 - ‘살아 있음’의 발랄한 현현

김성호

생명의 밥알 - ‘살아 있음’의 발랄한 현현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짓는 밥 - 삶에서 길어 올린 밥알 조형
인류의 삶에 있어 필수적인 의식주! 우리는 그것을 영위하는 행위를 ‘짓다’라는 동사로 표현한다. ‘옷을 짓고, 밥을 짓고, 집을 짓는 행위’는, 매슬로(A. H. Maslow)의 인간 욕구의 5단계 이론을 빗대어 볼 때, 가장 기초적인 1단계의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에 해당한다. 이러한 의식주를 재화를 통해 해결하는 시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식(食)’은 직접 요리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의(衣)와 주(住)가 매슬로 이론에서 2단계의 ‘안전 욕구(safety needs)’와 3단계의 ‘사랑과 소속 욕구(love & belonging)’마저 공유한다면, 그것에 비해, 식(食)은 1단계의 가장 기초적인 욕구에 머무른다고 볼 수 있겠다.  
작가 이예선은 밥을 짓고 그것으로부터 얻어진 밥알을 재료로 해서 자신의 예술 활동을 펼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매슬로 이론의 5단계인 ‘자아실현 욕구(self-actualization)’를 유감없이 실현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밥 짓기를 거쳐 밥알로 무엇인가 만드는 작가 이예선의 조형 세계’를 ‘가장 기초적인 1단계의 생리 욕구로부터 발원해서 가장 이상적인 5단계의 자아실현 욕구에 이르는 작업’이라고 정의해 볼 수 있겠다. 달리 말해 그녀의 작업은 ‘삶의 심층으로부터 견인하는 생명 예술’, 혹은 ‘삶에서 길어 올린 밥알 조형’이라고 할 만하다. 
작가 이예선은 왜 밥알을 작업의 재료로 사용하게 되었을까? 그녀는 말한다: “대식구에 먹거리가 부족하던 시절, 어머니께서는 반찬이라고 할 만한 반찬을 상에 올리지 못한 민망한 심정을 그저 밥으로 대신하셨다. 밥알이 살아 있네. 밥이 아주 잘됐어, 어린 나는 밥알이 한 톨씩 일어서서 움직이는 상상을 했고, 어른이 되어서는 매일 먹는 밥을 보면서 ‘그래, 밥알을 일으켜 살려 보자’라고 생각했다.” 
옛말에 ‘밥이 보약’이라고 했던가? 밥이 삶을 지속하게 하는 생명의 근원임을 체득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소환한 그녀의 밥알로 만든 조형 작업은 이처럼 ‘살아 있음’에 주목한다. 자신을 ‘밥알 작가(rice artist)’로 자처하는 이예선에게 있어 밥 짓기로 만든 밥알, 그것도 점성(粘性) 가득한 밥알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재료이다.  
딱딱하지 않고 습기를 먹어 ‘차지고 끈끈한’ 밥알! 인류는 어떻게 타작(打作)으로 골라낸 생곡(生穀)의 쌀을 이러한 점성을 함유한 밥으로 만들 생각을 했을까? 건조하고 딱딱한 곡식을 온기와 습기를 먹은 차진 밥으로 변화시켜 먹기 좋게 하기 위해서일 게다. 이렇게 쌀의 물성을 밥으로 변화시키기까지 물, 불, 공기는 필수적이다. 쌀을 씻고 불려 밥을 안치는데 필요한 물, 그리고 밥물을 끓이고 뜸을 들이는데 필요한 솥 외부의 불과 솥 내부의 공기, 마지막으로 주걱으로 다 된 밥을 뒤섞어 풀 때 혼성되는 공기층이 그것이다. 갓 지은 밥이 함유한 특유의 점성, 즉 “쌀의 전분이 화학 작용을 거쳐 소화하기 좋은 촉촉한 알파 전분의 상태로 변화하는 호화(糊化) 현상”은 이러한 물, 불, 공기의 3중주로 만들어진다. 
여기서 확보되는 밥알의 점성은 작가 이예선이 자신의 작업에서 중요하게 고려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그녀의 작업에서 밥알의 점성이란 ‘살아 있음’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탐구하는데 있어 제격이기 때문이다.  







II. 살아 있는 밥알 - 인간 실존에 대한 성찰
작가 이예선은 지금까지의 개인전 주제를 “밥알이 살아 있다(rice is alive)”로 제시해 왔다. ‘밥알이다’라고 하는 ‘~이다’로서의 ‘본질존재(essentia)’가 아닌 ‘밥알이 있다’라고 하는 ‘~이 있다’는 ‘현실존재(existentia)’의 의미를 공고히 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전시 주제는 ‘실존주의(exsistentialísmus)’ 개념을 가시화한다. 특히 ‘밥알이 살아 있다’라고 하는 ‘~이 살아 있다’는 ‘~이 있다’는 의미보다 더 강력한 ‘인간 실존주의’의 의미를 구체화한다. 더욱이 그녀가 밥알을 하나하나 붙여 가며 사람들을 만드는 작품을 먼저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작업에 있어 밥알이 구축하는 ‘인간 실존주의’라는 화두는 의미심장한 차원마저 지닌다. 
주지하듯이, 실존주의는 19세기 합리주의적 관념론과 실증주의에 반대하여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으로, 현실 속에 살고 있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주체적 존재성을 강조하는 철학을 지칭한다. 실존주의가 바라보는 인간이란, 자신의 몸이 이 세계에 내던져진 기투(企投)의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하는 것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한 채 불안의 상태로 이 세계에 유기되어 있는 인간, 그래서 늘 ‘신과 마주하는 단독자’로서 선택의 갈림길을 결정해야만 하는 주체로서의 인간, 자신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창조하도록 운명지어진 개인 주체로서의 인간과 같은 것이다. 대개 19세기 키에르케고르(Sören Aabye Kierkegaard)의 사유로부터 기원하는 이러한 실존주의는 불안, 선택, 단독자로서의 개인 주체의 개념이 강조된다. 키에르케고르의 이러한 개념을 잇는 야스퍼스(Karl Jaspers)의 한계상황(Grenzsituation)은 실존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을 일깨운다. 죽음, 싸움, 고뇌, 번민, 죄악 등 실존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상황을 직시한다. 키에르케고르의 단독자로서의 개인 주체는 이제 야스퍼스의 나(우리)와 관계하는 너(당신들), 그(들), 그(녀)들 사이의 실존적 소통을 요청한다. 
작가 이예선이 밥알로 만드는 인간은 대개 복수로서의 사람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로 표현될 만한 인간 군상은 야스퍼스의 ‘인간 주체 간 실존적 교제’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세계-내-존재’라고 하는 실존주의적 개념을 소환하기에 족하다. 작품을 살펴보자. 
캔버스천이나 삼베천 혹은 패널 위에 밥알로 만들어진 사람들은 얼굴과 팔 다리가 있는 형상이지만 저마다 각기 다른 제스처를 하고 있다. “하루에 30g씩 초밥 한 덩어리 분량의 새로 지은 밥”으로 “매일 조물주가 되어” 점성의 밥알을 하나하나 이어 붙여 만든 사람(들)은 작가의 언급대로, “마치 어머니의 출산처럼 고되게 만들어진” 것이다. 고단한 창작의 노동을 거쳐 탄생한 작가 이예선의 피조물인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형상을 띠면서 ‘~이다’라고 하는 보편적 인간의 ‘본질존재’를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이 있다’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현실존재’를 극대화한다. 이러한  실존적 인간상의 차원에서 갓 지은 밥이 만든 하얀 ‘밥알 몸’이나 뜸을 오래 들여 누룽지처럼 만들어진 누런 ‘밥알 몸’ 그리고 흑미로 지어 만든 검은 ‘밥알 몸’과 같은 다양한 밥알의 변주(變奏) 양상은 눈여겨 볼만하다. 
그뿐인가? 필요에 따라 작가는 밥알 몸에 색을 칠해서 자연색 위에 인공색을 추가하기도 한다. 각기 다른 주제에 따라 때로는 노란색이나 황금색의 인물로, 더러는 녹슨 듯 푸른색의 인물로 등장한다. 예를 들어 그녀의 피조물들은 작품 〈금쪽같은 장병들- 내 아들아〉에서 보듯이 제목에 걸맞게 금색의 인물상으로, 작품 〈나는 자연인(人)이다〉는 제목에 부합하게 흙색과 같은 인물상으로. 〈제주 토르소〉 연작은 제목처럼 검푸른 현무암 색의 인물상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저마다 각기 다른 포즈로 꿈틀거리는 인간 군상은 마치 한 장소에 모인 실제의 군중 모습처럼 다양하다. 특히 작품 〈춘화도, 진화란 없다〉 연작에서 우리는 다양한 포즈로 사랑에 열중하고 있는 수많은 연인들을 목도한다. 게다가 작가 이예선은 군상을 때론 한 장소에 몰려 있게 하거나 흩어져 있게 할 뿐만 아니라, 길처럼 보이는 장소에 군상을 비우기도 하면서 개성 없어 보이는 작은 인물상에 생명의 옷과 더불어 다양한 개성의 옷을 입힌다. 
이처럼 각기 다른 색과 재질의 밥알 몸이 만든 다양한 인간 형상에서 우리는 ‘사회적 인간상’ 즉, 하이데거 식의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 키에르케고르의 불안과 싸우는 인간, 야스퍼스의 한계상황 속 실존적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가히 살아 있는 밥알이 만든 ‘실존주의 인간상의 발현’이라고 하겠다. 







III. 생명을 품은 ‘밥알 몸/정신’  
작가 이예선의 밥알 작업에서 실존주의 철학과 개념보다 더 주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생명이다. 작가는 말한다: “나는 밥의 지독한 DNA를 신뢰한다. 산자와 망자(제삿밥)에게 독점적으로 공급되고 있는 밥! 너의 정체는 무엇이나. 혈연보다 끈끈한 관습의 제물, 관습의 공동체, 밥은 이미 생존의 역할을 포함한 포괄적 의식이다. 사람이 소우주라고 하니 밥은 생명이었는가 보다.” 작가노트의 발언은 그 무엇보다 자신의 작업이 생명과 관계하고 있음을 증언한다.  
보라! 이예선이 끈적거리는 점성을 지닌 밥알을 하나하나 붙여가며 이른바 ‘밥알 몸’으로 된 사람을 만들어 나갈 때, 팔다리를 지닌 인간 형상은 이내 ‘밥알 정신’을 담은 사람으로 변환되어 간다. 몸과 정신이 어우러진 ‘밥알 몸/정신’은 실존주의를 아우르며 그것을 넘어선다.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유명한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의 언명에서 우리는 현실계 속 개별적 인간 주체의 실존을 확인하지만, 이예선이 추구하는 ‘밥알 몸/정신’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과 소통에 보다 더 주목한다. 얼추 본다면, 실존주의에 영향을 미친 베르그송(Henri Bergson)이나 니체(F. W. Nietzsche)의 생철학적 개념과 더 닮아 있는 셈이다. 아서라! 그러한 철학자들의 사상이 어떻게 현대의 예술가의 직관을 중시하는 복잡다기한 사유와 딱 맞물릴 수가 있을까. 실존주의와 생철학은 다만 작가 이예선의 ‘밥’으로부터 출발한 생명주의 사유를 이해하는 기초적 바탕이 될 따름이다. 
피조물의 몸과 정신을 따로 나눌 것 없는 작가 이예선의 ‘밥알 몸/정신’은 그녀의 평면의 지지대 위에 올라선 사람들 연작뿐 아니라, 다양한 오브제 작업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따스하게 갓 지은 밥의 밥알로 부조 형태의 사람을 만들거나 커다란 환조의 형상을 만들 때도, 또 밥공기, 화분, 주발 등 부조로 만든 ‘그릇 형상’ 안에 밥알로 만들어진 천태만상의 사람들을 담고 있을 때도 나아가 누군가 쓰다 버린 ‘발견된 오브제’를 작품 속에 끌어 들여 밥알로 된 ‘만들어진 오브제’와 혼성해서 디오라마(Diorama)처럼 연극적 장치를 구현할 때도, 생명의 밥 정신은 곳곳에 드러난다. 밥알을 짓이겨 만든 소위 ‘밥알 타일(rice tile)’을 일정한 간격으로 잘라 만든 모듈을 통해서 마치 색색의 모자이크화처럼 꾸민 다양한 부조형 회화 작업들은 또 어떠한가? 〈책 읽는 소녀〉뿐 아니라 만국기 작품 〈세계를 데려오다〉, 풍경화 작품 〈연못을 데려오다〉 등에서도 생명은 여실히 안착해 있다. 밥알을 짓이겨 꽃잎 하나하나를 이어 붙여 커다란 장미 화환을 만든 〈Rouge〉 연작이나 수많은 드로잉과 영수증을 모아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신작 실험에서도 이러한 생명 의식은 잠재해 있다. 그녀가 밥알 회화와 함께 천착하고 있는 오브제 작업에 대해서 ‘마저 죽지 못한 생명과 물건’에 대한 관심이라고 언급하고 있듯이 말이다.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그녀가 갓 지은 밥이 지닌 온기와 점성 가득한 밥알로 작품을 완성한 후에 시신에 염(殮)을 하듯이 ‘밥알 몸/정신’의 피부 위에 코팅을 해서 공기를 차단하고 상하지 않게 박제하듯이 되살려 내는 조형 과정에 대해서 말이다. 최종 결과물에 이르게 하는 창작의 완성인 이 과정은 ‘죽음이 아닌 생명’이라는 작가가 지향하는 생명 의식을 고스란히 품어 안는다.  
글을 마무리하자. 작가 이예선의 생명 의식은 거창하지 않다. 현실계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자아 성찰이 혼성된 생명 의식은 때론 잔잔하게 때론 유머와 해학이 뒤섞인 채로 ‘살아 있음’의 의미를 되새긴다. 가히 생명을 품은 밥알 몸/정신’의 ‘살아 있음의 변주’이자 발랄한 현현(顯現)이라고 할 만하다.  ●
  

출전/

김성호, 「생명의 밥알 - ‘살아 있음’의 발랄한 현현」, 이혜선 작가론, 미발표,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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