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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권순익 / 창작 노동이 남긴 물질 흔적과 시간의 틈

김성호

창작 노동이 남긴 물질 흔적과 시간의 틈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작가 권순익의 최근작인 〈적‧연(積‧硏)_틈〉 연작은 이전의 〈무아(無我, Absence of Ego)〉나 〈틈(interstice)〉 연작을 한데 품어 안는다. 물감에 고운 흙을 섞어 바르고 마른 후 같은 행위를 반복적으로 수행한 후 흑연을 물감층과 또 다른 물감층의 ‘사이 공간’ 위에 문질러 올리는 방식은, 무수한 도트(dot) 문양 위에 흑연을 지속적으로 문질러서 쌓아 올리는 〈무아〉 연작과 화면의 틈 사이에 흑연을 쌓아 올리는 〈틈〉 연작의 특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의 전체적인 작업은 개별 연작에 나타나는 다양한 조형 특성을 공유하면서 일관된 주제 의식을 지속한다고 평할 수 있겠다.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이 무엇이며 그것이 작업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펼쳐지는지 〈무아〉 연작과  〈틈〉과 〈적‧연_틈〉 연작을 순차적으로 살펴본다.  






II. 무아: 노동이 도달하는 명상과 물질 흔적 
권순익은 도예와 구상 회화를 거쳐 2010년경 ‘명상적인 추상화’로 평가할 만한 〈무아〉 연작의 세계로 접어든다. 그것은 모노톤으로 밑칠을 한 후에 사각이나 원형 혹은 파형의 패턴을 구획한 후 그 위에 붓으로 색점을 반복해서 그린 후 그 위에 흙과 안료를 미디엄에 섞어 만든 ‘또 다른 점’인 ‘덩어리 점’을 만들어 나이프로 올린 작업이다. 최종적으로 캔버스 위에 도드라지게 올라선 이 점들이 마른 후에 그는 다음 단계에서 흑연을 입히고 문질러 검은 광택을 만든다. 
원형 혹은 사각의 패턴이 만든 자리에 위치한 점들과 그 위에 겹쳐지거나 어긋나게 올라선  부조적 점들은 캔버스 바탕 위의 점을 채우거나 비우기도 하고, 바탕 위의 점과 대비하여 자신의 몸체를 크거나 작게 만들기도 하고 길게 늘어뜨리기도 하면서 ‘점의 변주’를 실험한다. 반복적으로 집적된 ‘점 위의 점’은 힘의 방향과 움직임을 선보이는 패턴 문양의 반복과 더불어 크기와 형태의 변화와 같은 여러 변주를 통해서 전체적으로 기하학적 추상을 만들거나 때론 상형문자와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연작에서 흑연을 문질러 올리면서 작품을 마무리하는 조형 언어에 관한 것이다. 평평한 캔버스의 평면으로부터 납작한 형태로 돌출한 점들 위에 흑연을 문질러 만든 ‘검은빛의 덩어리 점들’은 마치 아프리카나 호주의 원주민들이 피부 위에 상처를 내서 흉터로 남긴 ‘반흔(瘢痕)문신’처럼 평면 위에 강렬한 부조적 효과를 강화한다. 그것은 마치 상처와 치유의 과정을 거친 일련의 ‘사건의 흔적’처럼 보인다. 검은빛의 덩어리 점들은 전형적인 볼록(凸)의 마티에를 만들면서 임파스토(impasto) 회화처럼 화면에 깊이의 공간을 만든다. 그것은 노동의 시간을 투여한 집적 행위가 만든 자연스러운 결과이면서도 보기에 따라서는 노동을 통한 명상이나 신성한 제례 의식의 결과물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정신 과정이 투여한 질료의 흔적으로서 말이다. 
권순익의  〈무아〉 연작은 이처럼 창작의 노동이 만드는 무아의 명상과 같은 정신 과정을 강렬하게 드러낸다. 그가 사용하는 무아(無我)란 용어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나(我)’라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이 용어는 원래  인도 산스크리트로 ‘나(自我)라는 의미의 아트만(ātman)’에 대비되는 ‘아나트만(anātman)’에서 비롯되었다. 이 ‘아나트만’이라는 용어는 ‘내가 아닌 것(非我)’이라는 뜻과 ‘나를 소유하지 않은 것(無我)’이라는 두 가지 뜻으로 변별되는데, 인도에서는 유일의 주재자로서 참된 나인 아트만을 주장하고 강조하기 위해 반대편의 아나트만을 거론한 것이었다. 
그러나 후일에 석가에 의해서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무아설’이 비로소 확립되었다. 불교에서 생멸, 변화하는 일체의 존재는 모두 무상(無常)한 것이기에, 불변하는 주체로서의 ‘나’라는 것은 없다는 사상이 무아설이다. 그런데 이 무아설은 불변의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할 뿐, 어느 정도 독립적인 기능을 하는 현상으로서의 자아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다. 즉 실천 주체로서 자아의 존재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무아(無我)라는 부정(否定)의 방식을 통해 ‘자아의 집착’을 멸(滅)하고 그것을 초월함으로써 ‘자아의 진실한 모습’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 불교에서의 무아설의 본질이다.   
권순익의 작업에서 ‘나에 대한 집착을 멀리하고 나를 비우는 행위’라는 무아는 창작의 노동에 기인한 명상과 같은 상황에서 비롯된 결과다. 점을 찍는 단순한 행위와 덩어리 점의 표면 위를 흑연으로 지속적으로 문지르는 행위를 수행하듯이 반복하면서 그는 자신에 대한 집착을 떨치고, 자기 생각을 비운다. 그것은 마치 불교의 백팔배(百八拜)처럼 현실의 번뇌와 고통(苦痛)을 잊기 위해 몸을 통해 ‘단순하지만 지난한 수행’을 반복하는 예배 의식처럼 신성한 무엇이다. 
권순익의 〈무아〉 연작에서 원들이 중첩되는 패턴을 만든 작품 〈회회(廻回)〉를 보라. 돌고 돌아오는 순환의 세계를 표현한 이 작품은 마치 깨달음을 위해 우주 법계의 진리를 표현한 밀교의 불화인 ‘만다라(曼茶羅, Mandala)’처럼 영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또한 권순익의 〈무아〉 연작 중 무아를 하이픈으로 잇는 〈-신기루〉, 〈-그림자〉, 〈-연〉이란 부가적 제명을 통해, 티베트 승려들이 다색의 모래를 이용해서 그린 만다라를 완성 후 허물어 무의 경지로 되돌리는 것처럼, 명상이나 종교 의식을 치르듯이 삼라만상이 담은 ‘무아와 공(空)의 철학’을 우리에게 순연히 선보인다.    
이처럼 그의 작업에서 ‘무아’라는 것은 현실의 고통이 여전할지라도 그 번뇌로부터 탈주하기 위해 몸을 움직여 실천하는 명상이자 일련의 수행이라고 하겠다. 관건은 이러한 ‘무아적 실천’이라는 것이 작가에게 부여하는 미적 쾌와 희열뿐 아니라 관객에게 선사하는 위안이라는 사실이다. 









III. 틈 또는 적‧연: 사이 공간에 축적되는 시간의 틈 
작가 권순익의 〈틈〉 연작이나 〈적‧연_틈〉 연작이 지닌 조형 미학은 캔버스 위 넓게 포진하는 몇 개의 면들이 맞부딪히면서 만들어내는 긴장감 속에서 발현된다. 그것은 대개 색이 다른 둘 이상의 화면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구성 속에서 삐죽하게 자리한 무엇이다. 캔버스 위에 물감을 바르고 마른 후 또 다른 색의 물감을 바르는 식으로 지속적인 물감층을 만들면서 집적한 수행적 붓질은 종국에 각자의 화면 위에 몇 겹의 두꺼운 물감층을 만들게 되는데 이웃하고 있는 물감층과 마주하게 되면서 그사이에 양쪽에서 밀려서 생긴 듯한 기다란 화면을 만든다. 
이처럼 그의 〈틈〉 연작이나 〈적‧연_틈〉 연작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캔버스 위에 물감층을 만들면서 쌓이는 면, 그려지지 않고 남겨진 여백, 그리고 물감층과 물감층이 마주하고 있는 곳에 놓이는 사이 공간이 그것이다. 
먼저 둘, 셋 혹은 네다섯으로 분할되는 물감층의 면들은 좌우나 상하 대비가 주를 이루나 간혹 대각선으로 서로 마주하기도 한다. 이러한 대비는 시메트리(symmetry)와 에이시메트리(asymmetry) 사이를 오가면서 비정형적인 기하학을 구축한다. 즉 대칭과 비대칭이 조화를 이루면서 서로의 만남을 변주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대비에는 동류의 난색이 마주하기도 하고, 화이트와 다른 색들이 마주하기도 한다. 물감층은 쌓일 때마다 가장자리로부터 미세하게 점점 중심으로 몰리면서 가장자리에 여러 층의 물감의 흔적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구성된다. 간혹 물감층이 자리한 단색의 면 위에 작은 크기의 여러 색의 도형이 군집하면서 기하학적 추상이 어떤 풍경처럼 보이도록 만들기도 한다. 마치 거대한 자연 풍경 위에 올망졸망 집들이 모여 있는 것 같은 풍경은 관객의 심리적 기제에 반응하면서 추상과 구상이 혼재된 마인드스케이프(mindscape)를 만든다. 물감이 남긴 마티에르와 물질의 흔적이 만드는 심리적 풍경인 셈이다. 
여기에 덧붙여 색면과 마주하면서 넓게 포진한 여백은 그의 추상을 심리적 풍경처럼 만드는 데 일조한다. 화면의 가장자리에 미세하게 남은 여백은 또 어떠한가? 이 또한 심리적 긴장을 촉발하면서 심상(心象)으로서의 이미지라고 하는 ‘이미저리(imagery)’를 관객에게 선명하게 전한다. 행한 것과 행하지 않은 것, 채워진 것과 비워진 것이 상응하는 그의 작품은 여백이라는 비회화적 결과물마저 회화적 행위 안에 넉넉하게 포섭한다.  
한편, 면과 면 사이에서 생성된 유선형의 길쭉한 사이 공간을 그는 ‘틈’으로 호명한다. ‘틈’이란 주지하듯이 무엇과 무엇 사이의 사이 공간(interspace)이자, 접점(interface)의 공간이다. 그것은 여백의 공간처럼 대개 결여의 차원에 거주한다. 이쪽과 저쪽이 만나는 접점에 있으면서도 이쪽을 결여하고 저쪽을 결여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사이 공간으로서 말이다. 그것은 대개 네거티브처럼 움푹 팬 오목(凹)의 공간으로 자리한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듯이, 양쪽의 물감층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것의 ‘사이 공간’의 네거티브의 차원은 깊어진다. 
그러나 권순익의 작품에서 이 사이 공간은 양자 사이의 간극을 잇기라도 하는 듯, 자신의 사이 공간 위에 살을 채워 올린다. 마치 깊이 베인 상처가 아물면서 볼록한 흔적인 ‘반흔’을 남기듯이 이쪽도 저쪽도 아닌 사이 공간은 스스로 양쪽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반흔을 만들어 올린다. 물론 ‘상처와 치유 그리고 반흔’이라는 우리의 명명은 작가 권순익이 캔버스 위 사이 공간에 연필을 문질러 짙은 흑연의 광택의 옷을 겹겹이 입히는 작업 방식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metaphor)로 마련된 것이다. 이러한 메타포의 차원에서, 연작의 제목인 〈틈〉에 대한 영문으로 권순익이 크랙(crack)이나 갭(gap)이 아닌 “암석 내부에 나타나는 공극이나 절개부”를 지칭하는 인터스티스(interstice)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의 작업에서 ‘틈’이란 마치 평생을 암석 사이에 끼어 있는 이질적인 존재로 폄훼되었으나 훗날 자연금이나 수정으로 밝혀진 존재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 권순익의 작업에서 ‘틈’은 하나의 몸체가 균열하거나 이지러지면서 만들거나, 여러 몸체가 이웃하면서 그사이에서 만들어진 결여와 소외의 공간이라는 네거티브의 위상으로부터 이제 치유와 자생적 반흔이라는 포지티브의 위상으로 변환한다. 그것은 ‘흑연의 광택 입히기’라는 단순하지만 지난한 창작의 노동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연작의 제목 ‘적연’에서 적(積)은 ‘쌓다’를, 연(硏)은 ‘갈다’를 의미하듯이, ‘물감층의 쌓기’와 더불어 ‘흑연층의 쌓기와 갈기’가  맞물리는 작업이 되는 셈이다. 
특히 사이 공간인 틈은, 작품 내부의 전체적인 기학학적 형태와 전혀 다른 유선형의 길쭉한 형태도 그러하지만, 그 위에 올라선 ‘흑연의 광택’으로 인해 게스탈트 심리학(Gestalt psychology) 차원의 가시적 주목도를 높이면서 존재의 의미를 강화한다. 권순익의 작업에서 쌓기와 갈기가 맞물린 틈은 이제 ‘무가치에서 가치로, 없음에서 있음으로, 그리고 열등에서 우등의 존재’로 가치 변환한다. 그것은 분명 물질의 흔적에서 발현되는 것이지만, 지난한 노동의 시간이 물감의 층을 만들면서, 사이 공간 위에 흑연을 갈아 얹어서 검은 광택을 만들어 나가듯이 궁극적으로 시간의 흐름이 집적된 것이라 하겠다.








IV. 에필로그
글을 마치자. 작가 권순익에게 창작이란 표현 행위가 남기는 쾌와 희열의 순간이자, 지난한 노동을 통해 예술의 세계에 잠입하는 명상과 수행의 과정이다. 한쪽에는 아틀리에에서 창작 행위를 통해 성취하려는 ‘미적 쾌’가 자리하고 또 한쪽에는 불확정적인 예술 세계에서 노동과 명상으로 모색하는 예술의 가치가 자리한다. 전시라는 시스템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한쪽에는 전시를 통해서 자신의 창작 결과를 발표하는 기쁨과 쾌가 작동하고, 또 한쪽에는 예술계 속 자신의 예술에 대한 타인의 비평을 열어 두는 예술의 가치가 작동한다. 
그런데 권순익의 작업에서 명상과 같은 지난한 창작의 노동이 남긴 자국이 시간의 흔적일진대 필자가 ‘물질 흔적’이라고 부르고, 물감과 매질의 혼합체가 층을 이루면서 이웃하고 있는 물감층 사이에 만들어진 사이 공간이 물질의 틈일진대 필자가 ‘시간의 틈’이라 부르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것은 여러 물질을 오랜 노동의 시간을 들여 연금술처럼 다루는 권순익의 작업이 자신의 현재적 시간을 구원하고 최종적으로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에서 관객에게 안식과 위안을 주려는 창작의 목적에 집중하고 있음을 풀이하는 필자의 해석이다. 창작의 기쁨을 자신에게 돌려주고 따스한 위안을 관객에게 주는 일! 예술의 유의미성이란 그런 것이리라. 우리가 권순익의 다음 전시를 또 궁금해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러한 사유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는 그의 작가 노트를 언급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오늘(현재)’을 잘 살 때 지금 이 순간은 완벽해진다. 현재에 충실한 삶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작품을 통해 힘든 시기에 현재의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위로와 위안을 전하고자 한다.” ●

출전/
김성호, 「창작 노동이 남긴 물질 흔적과 시간의 틈」, 『권순익』, 카탈로그, 2021
(권순익 개인전, 아트소향, 2021. 4. 28~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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