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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신흥우 / 만남이 절실한 시대의 사람들

김성호

만남이 절실한 시대의 사람들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만남의 관계 지평
누구에게나 만남의 관계 지평은 다르게 펼쳐진다.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 자주 연락하는 친한 사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자주 만나는 사람, 만나도 관계가 데면데면할 뿐인 그저 아는 사람, 유난히 싫은 사람, 아주 미워하는 사람, 미워하면서도 보고 싶은 애증의 사람들, 이처럼 한 사람이 알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 지평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의 관계는 아무리 유명 인사라도 규모가 작은 퍼즐 속에서 작동한다. 유명 정치인이나 대중 연예인의 경우 많은 사람이 자신을 알고 있어도 자신은 정작 그 사람들을 알지 못한다. 하물며 일반인들은 서로가 서로를 잘 알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간다. 이 지구상에 서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과의 뜻밖의 만남은 이 세상에서 요원할 수 있다. 고작 내가 알고 연락하는 사람들이라는 지인(知人)의 범주와 만남의 관계는 내 몸이 움직이는 흔적과 그 반경 내의 작은 울타리 안에서 작동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II. 도시민의 불특정 다수의 집단 초상 
작가 신흥우는 이러한 만남의 관계 지평과 인간관계가 지닌 딜레마를 자신의 회화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의 회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다. 누군지 확인할 길 없는 집단 초상이다. 그의 회화 속 인물들은 빌딩이 즐비하게 서 있고 자동차와 버스 등이 오가는 거리 풍경이거나, 바(Bar)나 레스토랑 또는 화랑이나 연주회장 같은 곳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개 도시민들로 파악된다. 그러니 신흥우가 그리는 인물화는 가히 ‘도시인의 집단 초상’이라고 할 만하다. 
그의 회화 속 인물들은 서로 아는 사이일까? 실제의 도시인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대개 서로를 알지 못한다. 공적 공간과 사회적 시스템 속에서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면서 함께 있을 따름이다. 도시의 거리로 쏟아져 나온 군상을 보라. 주머니에 손을 넣고 터덜터덜 걷는 청년, 가방을 팔에 걸고 한껏 멋을 부린 채 길을 걷는 여인, 핸드폰으로 통화하면서 길을 걷는 사람, 쇼윈도를 보고 가던 길을 멈춘 여인, 그들은 서로 정해진 자신의 길을 가는 노정 속에서 우연히 부딪히는 사람들을 만날 뿐이다. 물론 혹자는 직장의 동료들 혹은 특정 그룹의 구성원들과 함께 길을 나섰을 수도 있다. 그림 속 대개의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길을 가느라 바쁘지만, 혹자는 옆 사람들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듯 바라보기도 하고 논쟁을 벌이는 듯 격렬한 제스처를 취하기도 하지 않는가?  
가로등이 불을 밝힌 도시의 밤길에도 사람들은 북적인다. 버스 안에 자리를 잡고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과 버스 손잡이에 피곤한 몸을 의탁한 채 퇴근길에 나서는 사람, 자동차  뒷좌석에서 졸고 있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과 길거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손목시계를 보며 서 있는 사람을 보라. 그들은 혼자이거나 누군가와 함께 있기도 하다. 어떤 이는 홀로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도로 위 사람들을 구경하고, 또 어떤 이는 레스토랑에 마주 앉은 지인과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도시 속 실내 공간은 어떠한가? 갤러리처럼 보이는 공간 안에는 벽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거나 서로 대화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뿔테 안경을 쓰고 나비넥타이를 맨 채, 화면 가운데 있는 사람은 마치 전시의 주인공인 작가처럼 보인다. 전시를 여는 사람과 전시회를 축하하러 모인 사람들! 또 다른 전시장으로 보이는 공간을 보자. 그곳에는 사람들이 둘러 모여 한 손에 와인 잔을 치켜들고 있다. 전시 오프닝을 막 시작한 듯한 풍경이다. 벽면에 술병이 가득한 바 혹은 프렌치 카페처럼 보이는 실내 공간에 지인들이 삼삼오오 서로 둘러 모인 풍경은 또 어떠한가? 하루의 시름을 잊고 반가운 사람들과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 있는 모습이다. 
이처럼 사회의 공적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의도하지 않은 불특정 다수의 집단 초상을 만드는 중이다. 어떤 이들은 영원히 서로를 모른 채 지나치고, 어떤 이들은 소개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는 인간관계를 시작하면서 말이다.   





III. 사회적 인간, 익명의 사람들 
유념할 것이 있다. 앞에서 그의 그림을 해설하듯이 쓴 필자의 텍스트는 허공에 날아간다.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그의 그림에 대한 해설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 읽기 혹은 그림의 의미 찾기 행위에 관객의 상상을 촉발하게 만드는 이러한 지점은 신흥우의 인물상이 그다지 구체적이지 않아서 생긴 현상이기도 하다. 
그의 인물상은 웃고 있는지, 슬픔에 빠져 있는지, 즐거운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 판별하기 어려운 표정을 우리에게 선보인다. 실리콘으로 쏟아내는 즉발적 드로잉으로 만들어진 탓에, 그의 얼굴 형상이 품은 감정 표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가가 의도하는 바다. 구체적인 감정 상태를 가늠하기 어려운, ‘그림 속의 사람들’의 얼굴 표정은 ‘실리콘 건’에 의해서 밀려 나오는 실리콘이라는 질료를 단숨에 그려내는 즉발적 회화 행위를 통해서 무작위적으로 화면 위에 드러난다. 실리콘이 끊어지지 않게 단숨에 그려내는 즉흥적 회화 방식은, 때로는 카툰의 해학적 인물처럼 때로는 친근하고 익숙한 아동화 속 인물처럼, 형상을 왜곡하면서 투박한 외곽선을 만든다.
마치 신이 인간을 창조하듯이 실리콘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 형상을 만들어내는 신흥우의 창작은 또 다른 창작으로 연결된다.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무수한 얼굴 드로잉 형상을 빈 캔버스에 옮겨 부착하고 집단 초상화를 만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는 캔버스 위로 옮겨 부착한 실리콘 얼굴에 어울리도록 몸의 형상을 그려 넣으면서 캔버스 위에서 무한 변주하는 회화의 마법을 펼친다. 그는 실리콘으로 외곽선을 잡은 얼굴 형상의 빈 부분을 여러 색의 물감으로 채우거나, ‘다양한 포즈, 형상의 몸’을 얼굴 아래 그려 넣는다. 미리 만들어진 실리콘 얼굴들은 빈 캔버스로 옮겨져 길거리를 걷는 사람 혹은 갤러리를 방문한 사람이 되거나 음악 연주회에 초대받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그가 실리콘으로 부지런하게 그린 얼굴 형상은 그가 부여하는 새로운 몸을 입고 새로운 환경 속으로 잠입해 들어가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그려나간다. 
화가 신흥우가 실리콘 얼굴 형상을 새로운 맥락 속에 위치시켜 만든 이야기는 무엇에 관한 것인가? 그것은 ‘사회적 인간(social man) 혹은 익명의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다. 그것은 목적지를 향해 길을 걷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함께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의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다. ‘누구’라는 특정인이 아닌 ‘누구나’라는 보편적 사람들의 이야기 말이다. 여기에는 사회 제도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회적 인간’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존재라고 하는 ‘익명성의 인간’이라는 주제 의식을 표방한다. 
'사회적 인간'이란 '개인이 끊임없이 집단과 관계하며 사는 모습'을 지칭하는 사회학 용어이지만 철학적으로는 “인간이 사회적으로 되지 않을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사람이란 홀로 살 수 있다고 선언하더라도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는 표현으로 논증한 바 있다. 헬라어로 쓰인 이 용어를 세네카(Seneca)가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사회적 동물’로 바꾸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원래적 의미는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이었다. 주지하듯이, 폴리스(polis)란 그리스 시대 도시국가를 지칭하는데, ‘폴리스적 동물’을 오늘날 의미로 풀이하면 ‘도시인’과 같은 셈이다. 
신흥우의 그림에서 거주지와 일터를 고층으로 쌓아 올린 빽빽한 아파트와 빌딩 숲은 오늘날 새로운 버전의 폴리스다. 그의 그림에서도 보듯이 이곳에서의 인간의 만남은 익명성 안에서 벌어진다. 서로를 특별히 신경 쓰지 않고 관성처럼 스쳐 지나가듯이 말이다. 한편, 오늘날 사회적 인간 개념의 실천은 인터넷과 같은 가상공간 안으로 들어가 익명성을 더욱 강화하기도 한다. 그것이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사회적 인간’과 ‘익명성의 인간’은 동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의 ‘집단 초상의 원형’과 같은 것이다.     








IV. 만남이 절실한 사람들 
누구에게나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자리한 사람, 여행지에서 우연히 스치듯 만났던 사람, 한때는 사랑했지만 이별한 사람, 돌아가신 부모님 그 외에도 부지기수이다. ‘보지 못해 보고 싶은 사람’은 대개 연락이 두절되어 어떻게 사는지조차 알 수 없는 사람, 다시 연락해서는 안 될 사람, 혹은 연락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나는 그(그녀)들을 보고 싶고 만나고 싶다.” 
사회 속에서 성장해 가면서 인연을 맺었던 많은 사람에 대한 ‘지속적인 자각’은 인간의 존재 의식을 타자를 통해서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이다. 지금의 결여와 부재가 외로움과 소외라는 이름으로 욕망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신흥우는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집단 초상을 그린다. 현대인은, 글로벌 시티를 통해서 국가와 도시의 경계를 넘으며 유목하고 탈주한다고 할지라도 엄밀하게 말해 한 국가와 도시의 구성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현대인은 타자를 통해서 자신을 확인한다는 ‘사회적 인간’의 조건을 벗어나지 못한다. 현대 도시인의 ‘집단 초상’은 오늘날 나의 삶을 공유하는 또 다른 존재들이다. 언젠가 어떤 모습으로 인연을 맺을지 모를 예측 불가능 속 가능한 ‘만남의 대상들’이기도 하다. 
코로나 19의 느닷없는 침범이 야기한 ‘포스트 팬데믹 시대’에, 사람과의 만남 자체가 두려운 사건이 되어 가는 오늘날, 작가 신흥우는 건조한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현대인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위안을 던지는 그만의 ‘집단 초상’을 그린다. 그들 속에 내 친밀한 이웃이 있고 또 있을 거라는 ’무한한 긍정의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   

출전/
김성호, 「만남이 절실한 시대의 사람들」,  『신흥우』, 카탈로그. 2020 
(신흥우, 2020. 무기한 특별 상설전, 가가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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