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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일반│일하지 않는 감독

김성호

일하지 않는 감독

김성호(미술평론가)

최고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 지역의 비엔날레의 큐레이터로 채용되었으니 말이다. 대개는 감독이 함께 일할 사람을 직접 채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공개 채용이었다. 감독이 인재 발굴 능력이 없거나 그것이 아니면 투명한 공채 소식으로 비엔날레 흥행을 도모하려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둘 다 아니었다. 감독이 아는 사람 쓰는 게 귀찮아서 공채로 뽑자고 그랬단다. 아는 큐레이터 불러서 일하다가 상처 주는 게 싫었단다. 그래! 친한 사람이라도 같이 일하면 서로 미워하는 경우가 다반사니까, 이해한다.
그런데 감독이 모르는 게 하나 있다. 나는 그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존경하고 흠모해 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십여 년 전, 대학의 새내기 시절 시간강사로 강의를 맡았던 그는 나의 우상이었다. 예술에 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은 혀를 내두르게 했고, 수업 시간에 보여준 학생들에 대한 배려는 내가 그를 깊이 존경하게 만들기에 족했다. 내가 미술 현장의 큐레이터로 일하게끔 강의를 통해서 미래의 길을 열어 준 이는 바로 그였다. 그가 나를 직접적으로 어떤 기관에 추천한 적도 없고 여전히 나를 기억조차 못 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 그가 싫어졌다. 아니 이제는 그를 미워한다. 왜? 갑자기? 그가 내게 막 대했냐고? 아니, 그는 여전히 옛날의 그로 있었을 뿐이다. 다만 이유가 있다면 그가 감독으로서 일을 너무 안 한다는 것이었다. 격식을 갖춘 지시와 예의 바른 주문만 있을 따름이었다. 그가 툭하고 내던진 주제어를 분석하는 설명문도 내가 만들었고, 실제 참여 작가의 3배에 이르는 예상 목록도 나와 다른 큐레이터가 몇 주일을 고생하며 만들었다. 실제 섭외하면서 변경된 작가 목록은 내가 전부 만들었다. 다른 큐레이터가 과중한 업무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모습으로 지쳐서 중간에 사직하고 떠났기 때문이다.   
일하지 않는 감독! 어쩌면 그는 미술계의 감투만 탐하는 처세술 뛰어난 야바위꾼이다. ‘자기가 일하지 않고 사람을 잘 부리는 사람’이 진짜 ‘리더’라고 하지만, 일도 같이하는 리더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를 통해서 큐레토리얼 업무도 배우고, 현장도 경험하겠다는 애초의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다. 외려 감독이 해야 할 일을 대행하면서 감독의 업무를 어떻게 실행하는지 알게 되었다고 할까? 그가 해야 할 일을 방기하면서 만들어진 역설이다. 그의 방임으로 현장 경험과 큐레토리얼 업무를 터득할 수 있었지만, 그가 고마운 것은 아니다.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관람객조차 받을 수 없었던 상태로 전시 개막을 준비할 때도, 참여 작가들과 큐레이터가 노동에 가까운 작품 설치를 할 때도, 국제컨퍼런스를 좌충우돌하면서 온라인 중계로 준비할 때도, 그는 현장에 없었다. 다만, 행사 전에 지시 사항을 적은 메모를 꼬박꼬박 보낼 따름이었다. 그렇지만 코로나 상황이 진정되어 개최할 수 있었던 개막식에도, 지역 기자 간담회 때도 그는 빛나는 모습으로 거기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빛나야 할 자리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일하지 않는 감독! 논리 정연했던 그의 언변은 뛰어난 처세술로 남을 기만하는 사기성 허풍이었고, 남에 대한 배려의 제스처는 달콤한 사탕발림일 뿐이었다. 꼴 보기 싫고 밉다. 
그런데 말이다. 오늘 그가 울고 있다. 사무실 밖 스산한 바람이 부는 건물 벽 뒤에 움츠리고 서서 무엇이 그를 낙망하게 했는지 연신 줄담배를 피워가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무실에 일찍 나와 하루 종일 어디다 그렇게 전화를 하더니만, 무슨 일일까? 아까 운영위원장과의 대화 중 꾸지람을 듣는 듯,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데 무슨 일이 정말로 생긴 듯싶다. 복도로 지나가는 속삭이는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인다. 
“아까 감독이 위원장한테 엄청 깨지던데.”
“응, 기자회견 일정을 못 잡았다나. 중앙 일간지 기자단의 기자회견 일정이 줄줄이 잡혀서 틈이 없다나 봐.”
“그거 쌤통이다. 일 하나도 안 하고 명예만 탐하더니, 코로나로 방심했던 거지. 그나저나 어쩌나? 감독이 홍보에 사활을 걸더니만 비엔날레 죽을 쒔네.”  

* 이 글은 팩션(faction)이다. 

출전/
김성호, 「일하지 않는 감독」, 섹션-지금, 한국 미술의 현장, 『서울아트가이드』, 2020.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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