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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희 / ‘고향’에 이르는 길

윤진섭



 ‘고향’에 이르는 길 



윤진섭 미술평론가

Ⅰ.
 유주희는 단색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이다. 그것도 ‘청색(Anthraquinne blue)’을 사용하여 그리길 즐긴다. 이 색은 어두운 밤하늘이나 서늘한 그림자처럼 반투명하고 깊은 맛이 우러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유주희는 유독 수많은 청색 중에서도 이 색깔을 선호한다. 왜 그럴까?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밝힌 적이 있다. 

 “제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컬러입니다. 제가 선택한 안트라퀴논 블루는 엷게 칠하면 밝음, 나아가 희망을 나타내지만, 여러 번 중첩하면 깊은 암연의 세계를 표현합니다. 또 내적 사유와 철학적인 모든 것을 아우르며 적절히 표현할 수 있어 제게는 특별한 컬러지요.” 1)

 사실 유주희가 검정, 흰색, 녹색, 빨강 등 다른 색깔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유독 이 색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Anthraquinne blue’는 이제 유주희의 ‘색’이 된 듯한 느낌이 짙다. 그런데 이 색은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것처럼, 깊고 어두운 느낌이 들기 때문에 다른 화가들은 대체로 피하는 편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지중해의 내음이 물씬 풍기는 ‘울트라마린 블루(Ultramarine blue)’나 가볍고 밝은 느낌이 드는 ‘스카이 블루(sky blue)’, 혹은 아주 깊고 진한 청색인 ‘IKB(International Klein Blue)’ 2) 를 많이 사용한다. 

 그렇다면 유주희는 왜 유독 청색을 좋아하게 됐을까? 그녀의 회상에 의하면 경상남도 하동 출신인 자신의 유년기 체험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한다. 하동의 섬진강에서 친구들과 뛰어놀며 본 푸른 강물과 송림, 모래밭 등등 주변을 에워 싼 자연 경관이 자신의 미의식 형성에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나 짐작한다. 그리고 실제 이러한 요인들이 훗날에 그린 일련의 청색 단색화 연작에 잘 나타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반복-명상의 흔적(Repetition-Trace of Meditation), Acrylic on canvas, 100x100cm, 145x145cm, 2017> 연작들은 각기 미묘한 색의 뉘앙스는 서로 다르지만, 엷은 물결이 치는 수면을 위에서 바라본 풍경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단색의 추상화라기보다는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본 물의 풍경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물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3) 따라서 데이비드 호크니의 물결 그림이 물결 부분에 한정시켜 보면 구상이 아니라 추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처럼, 유주희의 스퀴지(squeegee)로 죽죽 밀어 그린 단색 그림을 가리켜 추상화가 아니라 구상화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어느 국면에서 보면 물결이 이 그림에서 표현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도출된다. 도대체 추상이란 무엇이고 구상이란 무엇인가? 구체적인 형태가 보이면 구상(具象/figurative)이고, 재현적 속성이 없으면 추상(抽象/abstract)인가? 실타래처럼 엉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으면 추상이고, 실타래처럼 엉긴 지렁이들을 똑같이 그리면 구상인가? 도대체 구상과 추상의 경계는 과연 어디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분명 예술철학의 과제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유주희의 작품은? 마찬가지 의미에서 중요한 예술철학의 질문을 낳는다고 볼 수 있다. 


Ⅱ. 
 유주희의 <반복-명상의 흔적(Repetition-Trace of Meditation)> 연작은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반복적인 행위의 결과이다. 그것은 유주희가 작품을 시작한 2000년대 초반 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전개해 온 스퀴지를 사용해 그림을 그린 그녀 특유의 회화적 기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서 ‘그녀 특유의’라고 한 것은 한국의 정평있는 단색화 작가들 중에서 스퀴지를 그처럼 오랜 세월 지속적으로 사용한 작가는 유주희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퀴지에 의한 반복적 수행의 제작법은 유주희가 고안한 그녀 특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에 해당하는 2001년 무렵의 유주희 작품들을 살펴보면 최근 작품들과는 현격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우선 거기에는 ‘스타카토’식으로 똑똑 끊어서 스퀴지의 자취를 남기는 기법이 보이지 않는다. 생짜의 아사천 위에 검정과 흰색의 아크릴 물감을 얹은 뒤 스퀴지로 민 <형(形)-태(態)/Shape> 연작은 구성적인 색채가 농후한 작품들이다. 그것은 처음에 ‘ㄴ’자 형태로 화면을 가르는 구도를 지니고 있었으나, 같은 해에 실험한 ‘전면회화(all-over painting)’의 관습에 따름으로써, 검정 주도에 흰색이 따르는, 즉 흰색이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내는 검정회화의 형태로 곧바로 넘어가게 된다. 물론 그 중간 과정에 캔버스의 한쪽 귀퉁이를 여백으로 남기는 실험이 있기도 했지만, 그 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Ⅲ.
 <존재 너머의 풍경(Landscape over Being)> 연작에 이르러 유주희는 비로소 ‘풍경’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한다. 그때가 대략 2004년에서 2009년에 이르는 시기이다. 4) 

 이 시기 그림의 특징은 캔버스 화면의 하단부에 단색으로 말끔하게 색칠이 된, 가로로 긴 색면이 나타나는 점이다. 그리고 그 색면은 청색, 검정, 갈색, 베이지, 연녹색 등등 다양한 색상을 지니고 있으며, 그 윗부분에 예의 검정과 흰색이 혼합돼 스퀴지로 민 넓은 색역(色域)이   나타난다. 이것은 하나의 풍경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특히 이 그림을 ‘추상 풍경화(abstract landscape)’로 볼 수 있는 근거는 화면을 가로지른 수평선과 그 위에서 요동치는 듯한 과격한 스퀴지의 자취들에 있다. 일견 보기에 이 연작의 그림이 자아내는 풍경은 한바탕 폭풍우가 몰아치는 거칠고 황량한 밤하늘을 연상시킨다. 찐득하게 갠 검정과 흰색 아크릴 물감을 스퀴지에 얹어 가로 세로로 반복해서 온 힘을 다해 민 기세(氣勢)가 이 연작에서 생생하게 느껴진다. 유주희의 이 생동감이 느껴지는 퍼포먼스는 화면의 아래에 있는 차분히 가라앉은 넓은 색면이 자아내는 평온함에 의해 더욱 증폭된다. 마치 희로애락의 감정이 들끓는 인생에 비유라도 하듯, 중년의 연륜에 접어들어 나타난 유주희의 관조적 표현이 눈길을 끈다. 

 비교적 짧은 시기의 <청색(Blue)>와 <무제(Untitled)> 시기를 거쳐 유주희는 드디어 가장 긴 기간을 점유한 <반복-명상의 흔적(Repetition-Trace of Meditation)>(2009-현재)의 시기로 넘어가게 된다. 이 시기에 나타난 기법이 바로 ‘스타카토’식으로 짧게 끊어지는 스퀴지의 흔적들이다. 색깔은 주로 청색이나 때로는 베이지, 연녹색, 갈색, 검정, 빨강 등등 다양한 양태로 나타나고 있다. 유주희는 오래 지속한 ‘스타카토’식의 스퀴지 기법이 지루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상자를 이용한 설치작업을 실험하기도 했으며(사라예보/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감성생태(Eco-Sensibility)’전), 스퀴즈로 민 뒤 손가락으로 행위를 가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물이나 하늘, 숲 등등 자연에 대한 은유로서 유주희의 단색화는 명상적이며 치유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유주희가 자기 작업의 소재로 선택한 자연은 곧 영적 인간이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면 ‘고향(die Heimat)’에 해당한다. 언젠가는 고향을 찾게 될 운명에 처한 인간은 자연의 품에 안김으로써 비로소 심적인 안식을 취하게 된다. 유주희의 그림은 바로 그런 관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김수영의 그림편지, 유주희 작 ‘Repetition Trace of Meditation’, 영남일보 2018년 10월 19일 자. 

2)  프랑스의 신사실주의 작가인 이브 클랭(Yve Klein)이 발명한 청색을 가리킴. 

3)  이와 연관시켜 볼 수 있는 작품의 뚜렷한 예는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의 <A Bigger Splash, 1967>, <Portrait of an Artist(Pool with two figures)/1972> 등 일렁이는 물결을 흰색의 가는 곡선으로 단순하게 묘사한 일련의 풍경화들이다.  

4)  유주희 화집, 01-19 YOO JU HEE, Repetion-Trace of Meditiaton/Blue/Untittled/Landscape over Being/형(形)-태(態) Shape,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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