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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희/'잃어버린 낙원(Lost Paradise)’을 향한 회귀 의지

윤진섭


'잃어버린 낙원(Lost Paradise)’을 향한 회귀 의지

윤 진 섭(미술평론가)


Ⅰ.
 조성희는 어린 시절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전통 한옥에서 자랐다. 꽃을 매우 좋아한 그녀의 아버지는 정원 가꾸기가 취미였다. 각양각색의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있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뛰어놀며 그녀는 마음속으로 ‘꽃의 왕국’을 꿈꿨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월이 흘러 이제 조성희는 어렸을 적 마음에 품었던 ‘꿈의 정원’을 주제로 작업을 펼친다. 유년시절에 본 정원이 낙원이라고 한다면, 70대 중반의 노년에 이르러 한 사람의 작가로서 펼치는 현재의 작업은 이른바 ‘복락원(復樂園)’인 셈이다. 조성희는 잃어버린 낙원을 꿈꾼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현재의 작업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 떠나는 긴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만일 타임캡슐을 타고 과거로의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우리는 긴 인생을 살아오는 과정에서 맺힌 단단한 매듭들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감당하기에 결코 녹록치 않은 슬픈 감정이 축적된 삶의 분비물, 그 매듭들을 가리켜 ‘한(恨)’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도덕원리로 삼은 유교적 가부장제하의 전통사회에서 여성의 신분은 특히 취약했다. 따라서 감정의 도피처가 마땅치 않았던 여성들은 길쌈이나 바느질을 하면서 부르는 노동요(勞動謠)로 사회적 신분관계에서 오는 차별과 억압을 풀고자 했다. 노래와 춤, 그림, 문학과 같은 예술의 형식은 그러한 억압을 풀 수 있는 훌륭한 대리만족의 수단이었다. 


Ⅱ. 
 실로 엄청난 공력을 들인 조성희의 한지작업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녀는 저처럼 힘든 일을 자청해서 벌이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든 이유는 손으로 일일이 만들고 붙이는 그 힘겨운 작업과정이 자동화된 현대의 공정(工程)에 역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NFT와 메타버스가 운위되는 사이버 시대에 느리고 품을 팔아야 하는 수작업(手作業)에 의존한다는 사실이 도무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조성희가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수작업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다. 우선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속도에 대한 거부와 저항이다. 이것은 특히 효율성과 기능을 중시하는 현대의 자동화 시스템에 대한 저항으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예술의 경우 현란한 사이버 세계의 구축을 통해 환상적인 ‘시각적 스펙타클’을 지향하는 현시점에서 눈앞에 현존하는 물질(오브제)로서의 작품은 매우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이른바 가상과 실제의 대결이 가능하다면, 그 판정은 언제 어떻게 내려질 것인가? 아니 도대체 그런 가정이 예술에서 합당하기나 한 것인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예술을 비롯한 모든 인간활동이 나름대로 행위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이버 세계를 기반으로 한 예술도 이 시대를 대변할 수 있는 예술이고, 조성희처럼 일일이 손에 의존하는 작업도 나름대로 의의와 행위의 정당성을 지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공존이 불가피하지 않은가? 물론이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시대의 흐름에 뒤쳐진 것처럼 보이는 어떤 현상이 지닌 시사점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이다. 나는 그것을 조성희의 작업에서 발견한다. 이를테면 조성희의 작업에 나타나고 있는 ‘꿈의 회복’과 관련된 어떤 메시지가 그것이다. 

 알다시피 조성희는 엄청난 양의 강도 높은 노동을 통해 ‘잃어버린 정원(낙원)’이란 주제를 자신의 예술로 구현해 내고 있다. 그녀가 만일 정원사였다면 ‘정원가꾸기’, 즉 조경으로 그 꿈을 이루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조형예술가인 그녀는 조형작업, 즉 회화와 조각, 설치와 같은 방법을 통해 그 꿈을 이루려 한다. 그리고 그 꿈은 아직 완성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에 있다. 이것은 예술에서 매우 중요하다. 예술이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 그것은 삶이 늘 진행형인 것처럼 예술 또한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의 예술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Ⅲ.     
 여기서 잠시 조성희가 하는 작업의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녀는 작품에 필요한 여러 가지 부속품들을 만든다. 한지를 다양한 크기의 원으로 오려서 만든 꽃잎과 사각형으로 잘라 일일이 말아서 만드는 꽃대 등등이다. 조성희는 한지를 바른 캔버스 위에 일일이 대여섯 개의 꽃대를 모아서 붙이고 그 위에 꽃잎을 얹어 풀로 고정시킨다. 그 다음에는 채색의 과정에 들어가는데, 테레핀으로 묽게 푼 유성물감을 듬뿍 묻힌 커다란 붓으로 뿌려 색을 입힌다. 여기서 그녀가 테레핀을 쓰는 이유는 송진 성분이 있는 테레핀이 천연의 재료여서 물감이 한지에 잘 스며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을 십수 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행한다. 

 미지의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한 조성희의 지칠 줄 모르는 반복적 행위는 작품 속에 그대로 유입돼 특유의 아우라(aura)를 만들어낸다. 붉은색의 단색화가 됐든, 마치 꽃밭 속의 꽃들처럼 다채로운 색상을 지닌 다색화가 됐든, 조성희가 만든 작품들은 아름다운 정원에 대한 유비(analogy)로써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에게 심리적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줌으로써 치유의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나는 그녀의 이전 개인전 도록에 수록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조성희의 작품은 인생의 축도이자 지나온 삶과 세월의 응축이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별이나 연못 위에 가득 찬 연잎, 혹은 초원 위를 뒤덮은 클로버처럼 화면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는 무수한 작은 원형의 한지 조각들은 하나하나가 작가의 상념을 담고 있는 듯 하다. 그것들이 하나의 집합적인 양태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그것을 통해 작가의 내면을 읽는다. 하나의 예술작품이 지닌 독특한 존재 양식은 작가와 관객 간의 소통을 위한 매개물이다. 그것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작가와 기나 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무엇이 작가로 하여금 이런 엄청난 열정을 불러일으켰는가? 우리는 작가의 지난한 삶의 분비물인 작품을 바라보며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우리는 그녀의 작품을 통해 섬세한 내면과 작업을 향한 불굴의 의지, 무쇠도 녹일 듯한 예술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감지할 수 있다.” 

-윤진섭, 우주와 인생에 대한 통찰, 조성희의 한지작업에 대하여-

 그렇다면 조성희가 광기에 가득 찬 창조적 열정으로 뿜어내 놓은 저 상상의 꽃밭들, 즉 아름다운 오브제 작품들은 과연 무엇인가? 이 시대에 어떤 미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는가? 그것은 실제인가, 아니면 단지 하나의 허구로써 실제를 대리하는 감정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조성희의 이 노동집약적인 작업이 현실과 이상을 연결하는 가교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관객들에게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 즉 ‘잃어버린 낙원’으로 향하는 다리가 돼 줌으로써 고단한 현실을 잊게 해 주는 치유를 효과를 낳는다. 특히 강렬한 붉은색과 푸른색 등등 단색화의 작품은 강한 에너지의 발산을 통해 이를 바라보는 자에게 열정을 불어넣게 될 것이다. 단색으로 이루어진 조성희의 한지작품들은 가까운 거리에서 보면 복잡해 보이지만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면 단색으로 보이는 특수한 국면을 지니고 있다. 그녀의 작품을 반복성과 수행성, 촉각성을 특징으로 하는 ‘단색화(Dansaekhwa)’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조성희의 단색화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노동집약적인 수공(手工)에 의해 제작되는 조성희의 한지 작품은 반복되는 수작업(手作業) 특유의 아우라를 지닌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 혹은 극기(克己)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런 류(類)의 작업은 시간의 축적 혹은 과정으로서의 예술적 특징을 보여준다. 그것을 일러 우리는 ‘수행(Suhaeng:performance)’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최근에 국제적으로 부상되고 있는 한국의 단색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평가는 유교, 도교, 불교가 어울려 혼효(混淆)되는 가운데 형성된 한국 특유의 문화에 대한 이해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렇다고 할 때 조성희의 한지 작업에 대한 이해와 평가도 이제는 이러한 문화적 준거틀 내에서 이루어져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윤진섭, 우주와 인생에 대한 통찰, 조성희의 한지작업에 대하여-

 조성희의 한지를 이용한 작품들은 예술가의 특권인 상상의 산물이다. 창호지를 바른 격자창과 완자창으로 둘러싸인 한옥에 얽힌 유년기의 추억은 조성희 예술의 원천 가운데 하나이다. 그녀가 지금 벌이고 있는 저 창조의 에너지로 가득 찬 작업은 어렸을 적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놀던 유희 본능과 깊은 연관이 있다. 

 네덜란드 출신의 탁월한 역사가인 후이징아(Johan Huizinga)가 문화의 본질로 본 ‘놀이 정신’이 조성희의 작업 맨 밑바닥에 깔려 있음을 본다. 그렇지 않다면 그처럼 고된 작업을 장구한 세월에 걸쳐 지속하지 못 했을 것이다. 놀이는 무엇보다 재미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늘 새로운 작업을 향한 창조의 더듬이를 통해 작업의 반경을 넓혀나가는 조성희의 예술에 대한 열정은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기 위한 끊임없는 놀이의 천착이 아니겠는가? 70대 노령에도 불구하고 불처럼 뜨거운 정열로 창작에 몰두하고 있는 조성희는 단색화에 대한 자신의 독자적인 영역의 구축을 위해 오늘도 정신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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