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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복/슬픈 역사-문화의 원형 찾기

윤진섭


슬픈 역사-문화의 원형 찾기  

윤진섭(미술평론가)


Ⅰ.
 1970년대 후반의 대학 시절에 한국화를 전공했지만, 이재복은 일찍이 오브제와 설치미술에 주력,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작업의 초기가 대략 1990년대 초반이었다. 학부를 졸업하고 떠난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뒤, 이재복은 화선지를 비롯한 한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부채를 비롯하여 다양한 질감의 고서(古書), 형형색색의 자수를 놓은 베갯모, 방패연, 계란판 등등의 오브제를 사용, 화단의 비상한 주목을 받기에 이른다. 

 이재복의 작업이 당시 화단의 주목을 받은 이유는 단지 그가 오브제나 설치미술과 같은 특정한 작업을 해서가 아니라, 작품의 탁월한 예술적 가치 때문이었다. 가령, 각별히 나의 눈길을 끈 <슬픈 역사-고귀한 인간>(140x40x40xcm, 혼합재료, 1994)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의 구조는 3층으로 돼 있는데, 맨 아래 기단부를 이루는 소반, 몸체에 해당하는 베갯모, 그리고 맨 상층부의 부채이다.(도판1) 

 이 작품의 구조는 절에서 흔히 보는 3층 석탑의 구조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우연히 도출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작가의 설명에 의하면 당시 자신은 한국적인 것, 다시 말해서 한국 문화의 ‘원형(prototype)’을 찾기 위해 국립박물관을 비롯하여 민속박물관, 사찰, 서원, 민속촌, 골동품점 등지를 샅샅이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처럼 전통에 뿌리를 둔 구조의 발현은 작가적 의지의 발로로써, 그러한 의지에 작가 자신의 강렬한 열정과 예술의욕(Kunstwollen)이 덧붙여져 형상화한 것이다.  
 
 이재복이 전통적인 문화유산에 기울이는 열정적인 탐구는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데, 그 오랜 탐구의 과정을 거쳐 특유의 작업유형이 비로소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 유형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기성의 사물(found objet/objet trouve)에 약간의 손질을 가하거나 원형 그대로 제시된 것. 
 2) 다수의 오브제들이 결합하여 또 다른 오브제 혹은 설치의 형식을 띤 것. 
 3) 그가 자주 활용하는 방패연의 구조에서 보듯이, 중앙선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구조를 지닌 것. 
 4) 동일한 단위가 좌우 혹은 상하로 반복, 배열된 구조를 지닌 것. 

 이러한 유형은 특히 그의 오브제, 설치작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는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조국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한국에 두고 온 산하(山河)와 어렸을 때부터 봐 온 각종 문화유산들, 석탑, 한옥, 옹기, 고서화와 전적(典籍), 민화, 탱화, 각종 민속 생활용품들.....그것들은 내게 있어서 과연 무엇인가?”라고 자문했다. 이재복이 머나먼 타국땅에서 품은 이러한 생각은 하나의 화두를 형성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통의 현대화’란 명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유럽 문화예술의 중심지인 프랑스 파리에서 현대미술의 정수(精髓)를 호흡한 그로서는 서구에 대응하여 한국을 대변할 수 있는 미의식의 현대적 발현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그것은 어쩌면 한국인은 한국인의 유전자가 작품의 저변에 면면히 흐르는 작품을 보여줘야 한다는 일종의 당위적 욕구였는지도 모른다. 안에 있을 때는 잘 몰랐던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이 밖에 나가서야 비로소 인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품고 한국에 돌아온 이재복이 맨 처음 착수한 것은 각종 민속 생활용품을 비롯하여 고서화, 한지로 된 옛날 서책 등 작품의 재료가 될 수 있는 오브제들을 수집하는 일이었다. 각종 한지를 비롯하여 부채, 배갯모, 키, 삼베, 모시, 방패연 등등은 작품제작을 위해 그가 각별히 관심을 가지고 모은 재료들이다. 
 

Ⅱ. 
 이재복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공들여 모은 재료들을 결합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의 컴바인 페인팅(Combine painting)을 연상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서로 이질적인 사물들이 한 공간에서 만나 새로운 풍경을 자아내는 것, 60년대 이후 이 네오다다 풍의 물결이 지구촌을 휩쓴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이재복이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집한 기성의 사물들을 사용하여 제작에 임했다. 한국화를 전공한 이재복은 고서화를 찢어붙인 후, 그 위에 가필을 하거나 서로 이질적인 질감을 지닌 천이나 한지를 덕지덕지 붙이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서구적인 맥락이 아닌 전통의 현대화란 맥락에 연결시키고자 했다. 그 중심에 전통이 있었다. 그는 전통적이지 않은 재료는 철저히 배제하였다. 한국적인 문화의 온기를 지닌 것들, 조상의 얼이 살아 숨 쉬는, 역사성이 돋보이는 오브제들이 우선적으로 선택되었다. 부채, 베갯모, 키, 고서(古書) 등등 자칫하면 복고적이거나 이국적인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위험이 다분했다. 그뿐만 아니라 작가 스스로 ‘지역적(local)’인 미적 가치에 작업을 옭아맬 수 있는 한계를 드러낼 수 있는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작가적 역량이다. 선택한 재료들을 어떻게 결합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높은 수준의 예술적 가치를 획득하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이재복의 예술적 재능과 감각이 발휘된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이때 이재복이 주목한 것이 바로 ‘한(恨)’이라는 한국 고유의 정서다. 굳이 조윤제가 말한 ‘은근과 끈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오천 년 역사를 통해 면면히 형성된 한민족 고유의 정한인 이 ‘한’의 정서를 작품을 통해 드러내는 것, 그것이 필요한 시점이 현재이고 작가인 자신에게 그러한 과업이 주어졌음을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다. 작가적 승부는 과연 어느 것이 당대의 현실에서 높은 설득력을 지니느냐 하는 문제와 깊이 연루돼 있다. 말하자면 검객이 상대방의 급소를 치는 것에 비유된다. 철 지난 사조, 그래서 미술사적으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따라서 몰가치적인 주제에 빠진다면 그처럼 허망한 일이 있을 수 없다.  

 그런 연유로 이재복의 작업에서 이 한(恨)의 정서를 도출하는 일은 비평적으로 매우 가치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모로 보나 추상적인 정조에 해당하는 이 ‘한’에 대한 글을 어떻게 설득력 있게 개진해 나갈 것인가. 

 우선 주목해 볼 것은 이재복의 오브제 작업 전반에 흐르는 죽음의 그림자이다. 특히 삼베로 된 금줄과 한지, 검정색 안료를 중첩해서 바르거나 부착한 작품의 표면 등은 명백히 죽음을 염두에 두고 한을 형상화한 것으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의 전통 상례(喪禮)에서 행해지는 곡(哭)은 망자에 대한 애도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곡을 하는 당사자의 한풀이 일 수도 있다는 중의성을 띤다는 점에서, 죽음은 한의 대표적인 표출의 매개물이다.  

 이 지점에서 이재복의 작품 제목이 <슬픈 역사>라는 사실도 염두에 두도록 하자. 그는 이 땅의 역사를 ‘슬픈’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부정적 현실을 애써 회피하려 하지 않는다. 현실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도피처가 죽음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한의 승화로서의 예술 형식 또한 가치가 있을 터이다. 그렇다면 슬픈 것이 단지 슬픈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높은 감정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승화)는 점에서, 그러한 감정의 매개물로서 이재복의 작품은 중요한 역할과 가치를 지닌다. 

 그 다음에 살펴볼 것은 키와 베갯모가 지닌 문화적 상징성이다. 주지하듯이 쌀이나 곡식에서 뉘를 고를 때 주로 사용하는 키는 전통적 농경사회에서 고된 노동의 상징물이다. 주로 여성들이 사용한 이 키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억압된 여성의 한을 대변하기에 충분하다. 전통 농경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은 참으로 가혹했다. 자녀의 양육에서 밭일에 이르기까지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게다가 층층시하의 가족구조에서 오는 심리적 갈등은 한을 형성시키는 주요인이었다. 

 여성의 바느질은 주로 가사(家事)가 끝난 저녁이나 농한기의 한가한 틈을 타 이루어졌다. 이재복이 사용한 자수 베갯모는 베개를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한 심미적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낮의 고된 노동이 밤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가부장적 제도가 낳은 불합리한 모순과 착취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품목이다. 그러나 이재복은 <슬픈 역사-고귀한 인간>에서 이 배갯모를 층층이 쌓아올림으로써 시간을 통한 역사적 기념비성을 강조하고자 한 것 같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부채나 베갯모, 혹은 소반이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무속적 느낌이 물씬 나는 낡은 부채와 색이 바랜 베갯모의 자수문양, 혹은 소반에 화선지를 부착하여 제의성을 강화시킨다.
 
 
Ⅲ. 
 이재복의 작품 중에서 나의 시선을 강하게 사로잡은 것은 <슬픈 역사Ⅰ>(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4x122x5cm, 혼합재료)이다.(도판2) 모두 5개의 패널로 이루어진 이 대작은 고서를 찢어 붙인 뒤 우려낸 담뱃물과 먹으로 바탕을 검게 칠했다. 그 위에 각 패널마다 검은 먹으로 거칠게 칠한 키를 부착했다. 각 패널마다 중앙에는 키를 늘어트린 끈을 고정시키기 위해 부착한 자수 베갯모가 있다. 키에는 삼베로 된 노끈들이 늘어져 있어 한눈에 봐도 죽음을 연상시킨다. 각 패널의 위에는 마치 영정사진에서 보이는 죽음의 상징처럼 검정색 막대 두 개가 사선으로 마주보며 붙어 있다. 

 이 작품은 죽음의 한 상징임이 분명하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죽음의 분위기는 검게 칠한 아홉 개의 낡은 부채를 고서로 뒤덮은 패널에 부착한 <슬픈 역사-인간의 굴레>(120x86cm, 혼합재료, 1999)에서도 공통적으로 맡을 수 있다. 이재복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얼을 말살시키고자 한 위기적 상황에서 용케 살아남은 고서를 의도적으로 구입, 작품제작에 활용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은 “역사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을 도모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검정색이 불러일으키는 묵시적 분위기는 역시 부채와 고서 위에 검정색 먹을 칠한 <슬픈 역사-유산6>과 <슬픈 역사-날 수 없는 연>에서도 똑같이 맡아진다. 

 <슬픈 역사-상심한 슬픈 노래>(397x8146cm, 혼합재료, 1994)는 가로 길이가 무려 8미터에 달하는 대작이다.(도판3) 검게 칠한 대형 패널에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부채 48개를 12개 4줄로 부착했다. 전체적으로 대칭구조가 두드러진 작품이다. 길게 도열한 부채를 서로 묶은 끈들이 마치 상가집의 금줄처럼 늘어져 있다. 이 역시 짙게 드리워진 죽음의 묵시적 분위기가 당집처럼 금기의 영역임을 암시해 준다.  


Ⅳ.
 이재복의 작품에서는 시간성이 공통적으로 느껴진다. 그는 시간의 오랜 흔적을 지닌 실제의 오브제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먹이라든지 담뱃물 등을 사용하여 의도적으로 시간을 앞당기는 조작을 행하기도 한다.

 이재복의 오브제 작품들은 자수 베갯모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찌들고 빛이 바랜 재료를 사용하여 지나간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해 주기도 하나,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그는 그보다는 오히려 검게 칠하거나 한지를 패널에 붙이는 행위를 통해 지난 시간을 추체험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간 세월의 실제 상황 속에 신체를 직접 투사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일종의 심리적 가상을 통해 과거를 현재화하는 예술의 마술 속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예술이 지닌 신비한 기능이 아니겠는가.  


 <미술평단 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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