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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 / ‘선의 미학’에서 ‘깊이의 미학’으로

윤진섭


‘선의 미학’에서 ‘깊이의 미학’으로 

윤 진 섭(미술평론가)

 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김현식의 작품을 볼 때마다 드는 질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현상인가? 아니면 실체인가? 굳이 말하자면 현상이기도 하고 실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김현식의 작품은 단순히 관조를 통해 작품을 감상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사물의 본질을 묻는 철학적 질문과 연계된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신비스럽게 느껴지는 김현식 작품의 제작 과정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준비한 나무 패널을 수평으로 놓고 투명 에폭시 수지를 그 위에 붓는다. 에폭시 수지가 굳어 얇은 투명막이 생기면 그 위에 바늘로 예리한 선을 반복해서 긋는다. 그러한 과정을 10여 차례 반복하여 미세한 에폭시 수지의 층들(layers)을 만든다. 선들은 프레임의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가장자리로 갈수록 엷어져 미묘한 색의 차이들을 드러낸다. 

 이러한 제작 과정을 염두에 두고 김현식의 작품을 감상할 때 관객들은 비로소 새로운 미적 체험을 하게 된다. 그 체험은 비유컨대 대나무 숲과 같은 자연에서도 유사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지는 대나무 숲의 아득한 공간은 매우 깊어서 어둡고 컴컴한데, 그 느낌은 검다기(黑)보다는 차라리 무한한 어둠(玄)에 가깝다.  

 그런 연유로 김현식은 선과 선 사이에 존재하는 투명하고 미세한 공간 속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유도해서 관객들 스스로가 마음에 다가오는 대로 서로 다른 미적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어 줄 뿐이다. 김현식의 작품들은 비록 평면적 형태를 갖추기는 했지만 사실은 오브제에 해당한다. 즉, 그 자체 일정한 부피와 깊이를 지닌 입체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레진의 층들이 겹쳐진 김현식의 작품은 대체로 매우 무겁다. 그 무게에서 새로운 양태의 미적 체험이 나온다. 그것은 가령, 얇은 캔버스 평면 위에 그은 무수한 선들로 이루어진 옵티컬 아트 회화와는 다르다. 김현식 작품의 경우, 그 자체 실체로서의 선들이 주는 느낌은 결국 허상에 불과한 옵티컬 아트 회화의 선의 느낌(일루전)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바로 이 점이 이 글의 서두에서 “그것은 하나의 현상인가? 아니면 실체인가?” 하고 물은 질문의 요지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상이기도 하고 실체이기도 하다. 옵티컬 아트 회화의 선들이 물감의 엷은 두께를 지닌 실체인 것처럼, 레진 위에 송곳으로 예리한 선을 그어 그 속에 물감을 채워 넣은 한 김현식의 선들은 일정한 두께를 지닌다는 점에서 개념적인 측면에서 보면 일종의 입체라고 할 수 있다. 

 무수한 선의 다발들의 집합(옵티컬 아트)과는 다른, 무수한 층들 속에 잠긴 심원한 공간에 대한 탐색은 결국 작가 김현식이 추구하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갈망”(김현식)을 낳았으며, 그 갈망이 낳은 예술적 탐색은 실제일 수도 있고 가상일 수도 있는 절대공간을 향해 치닫고 있는 중이다. 그 현묘함의 끝이 과연 어디일까 하는 질문은 우문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 궁극의 지점에 대한 끝없는 항해를 김현식이 지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지난한 연조는 이 작업이 시작한 90년대 초반 이후 무려 30년째다. 

 이번 개인전에 김현식은 약 300개의 원형 작품 시리즈 <거울>을 출품했다. 새롭게 시도한 이 신작들은 빨강, 청색, 바이올렛, 녹색, 갈색, 마젠타 등 에폭시용 반투명색을 투명한 레진에 타서 만든 것들이다. 나는 이 작품들을 본 순간, 유년시절에 본, 맑은 가을날 시골의 수로용 통구(通口)에 고인 맑고 깊은 물을 뇌리에 떠올렸다. 투명한 에폭시 수지 용액이 무수히 겹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 서로 다른 느낌의 300개의 작품의 조합! 그 입체물 속에 담긴 투명한 색의 깊이는 과연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가? 그것은 단순히 검은(黑) 색이 아니라 “너무 깊어 아득하다보니 차라리 무색의 공간에 가까운 현(玄)”의 세계가 아니던가.   
     
 찻잔 속에 고인 물 속에 담긴 자신의 모습에서 착안하여 새로운 형태의 원형 작업을 세상에 드러낸 <거울> 연작은 이제까지 김현식이 추구해 온 ‘선의 미학’을 잠시 접어두고 맑고 투명한 ‘깊이의 미학’으로 방향전환을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1차 출처: 아트인컬처 202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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