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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턴의 유적(流謫), 김창열의 ‘물방울’이 의미하는 것

윤진섭


코스모폴리턴의 유적(流謫), 김창열의 ‘물방울’이 의미하는 것

윤진섭 | 미술평론가


Ⅰ. 한국현대미술사에서 김창열(1929-2021)이 차지하는 위상은 전후 화단에 저항세력으로 등장한 ‘비정형(앵포르멜/Informel) 회화운동’의 주체란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1957년에 결성한 <현대미술가협회(약칭 ‘현대미협’)>의 창립 회원이었다. 8.15해방에서 6.25전쟁으로 이어진 어수선한 정국에서 피 끓는 20대의 젊은 작가들이 창립한 이 단체는 보수적인 기성작가들의 아성인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약칭)’에 적대적인 전위미술을 지향했다. 당시 국전은 이들의 스승세대격인 일본 유학파 출신 작가들이 심사를 독점하면서 파벌을 비롯한 많은 비리와 폐단을 낳았다. 

 김창열, 박서보, 하인두 등이 벌인 반(反)국전 성격의 비정형 회화운동은 일제강점기와 전후 시기의 화단을 통틀어 전위적 재야작가들이 벌인 최초의 행위였다. 김서봉, 김영환, 김창열, 김청관, 김충선, 나병재, 이명의, 이양로, 이수헌, 박서보, 안재후, 장성순, 전상수, 정건모, 조동훈, 하인두 등등 현대미술가협회 회원들이 참가한 [현대]전은 초기에는 구상과 추상풍이 혼재된 반추상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1958년 12월에 열린 제3회전부터 서서히 추상화(抽象畫)로 선회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안료의 생생한 물질감과 거칠고 격렬한 터치에 의한 추상회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수백 호에 이르는 ‘괴이한 작품들’이 기성화단을 홍소(哄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새로운 문제를 던진 제4회 [현대]전에 이르러 한국의 비정형 작가들은 비로소 그 존재감을 세상에 뚜렷이 각인시켰다. 김창열은 박서보와 함께 이 전시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 전시에 대한 미술평론가 방근택의 “식민지적 기형성의 기존적인 영향에 대한 자주정신의 확립과정에 의한 반항”이라든지 “한국 최초의 소위 앵포르멜의 집단적 출현”과 같은 평가는 당시 이들이 추구한 비정형 회화의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김창열과는 평생 화업을 같이 한 동료인 박서보는 당시 안국동미술연구소를 중심으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안국동 일대는 전후의 피폐한 상황에서 살아 돌아온 궁핍한 화가들의 무대였다. 이들은 낮에는 이 연구소에서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안국동로타리에 있는 남매다방이나 도라지다방 혹은 그 주변의 술집을 전전하며 술을 마시다 통금이 다가오면 덕성여고 관사, 안상철의 집으로 몰려가 잤다. 

 당시 경위 계급을 달고 부천경찰서에 근무하던 김창열은 퇴근 후에 안국동에 어김없이 나타났다. 당시 비정형 회화 운동을 이론적으로 지지한 미술평론가 방근택의 회고에 의하면, 김창열은 6.25때 입대한 전투경찰대 출신으로 퇴근길에 안국동에 들러 박서보와 함께 현대미협의 활동을 주도했다고 한다. 그는 문학을 논하는 독서가로서 “나이프를 사용하며 화면을 잘 닦아서 액센트 효과를 내거나, 번쩍이는 양철을 붙여서 효과 포인트를 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당시 김창열의 문학적 소양은 다음과 같은 선언문의 작성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모든 것이 용해되어 있는 상태다. 어제와 이제, 너와 나, 그리고 사물들의 전부가 철철 녹아서 한 곬으로 흘러 고여 있는 상태인 것이다. 산산히 분해된 나의 제 분신들은 여기저기 다른 곳에서 다른 성분들과 부딪쳐서 뒹굴고들 있는 것이다. 아주 녹아서 없어지지 아니한 모양끼리 서로 허우적거리고들 있는 것이다. 이 몸짓이 바로 나의 창조행위의 전부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고정된 모양일 수가 없다. 이동의 과정으로서의 운동 자체일 따름이다. 파생되는 열과 빛일 따름이다. 이것이 나에게 허용된 자유의 전체인 것이다. 이 오늘의 절대는 어느 내일 결정(結晶)하여 핵을 이룰 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덥기만 하다. 지금 우리는 지글지글 끓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김창열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이동의 과정으로서의 운동’으로 파악하고 있다. 즉 그런 관점에서 비정형 회화운동을 파악함으로써 전위의 운동체로서 현대미협의 정신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를 포착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그 정신을 ‘산신히 분해된 나의 제분신들’이 다른 분신들과 충돌함으로써 허우적거리는 상태, 즉 혼돈 속의 창조행위로 파악했다. 

 이 무렵 김창열의 비정형 회화작품은 50년대 후반 대다수 동료작가들의 작품이 그런 것처럼 검정색과 갈색 위주의 형해화한 인체가 특징인 어둡고 음습하며 우울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60년대 중반에 이르면 지리멸렬한 해체의 징후를 노정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당시 비정형 회화운동이 보인 일반적인 추세였다. 이 무렵에 제작한 김창열의 <제례(祭禮)> 연작은 어두운 갈색이나 검정색 계통의 바탕에 단순히 그어진 직선들이 병치되거나 혹은 “거칠고 활량한 느낌의 점들을 한바탕 거센 바람이 할퀴고 지나간 것 같은 황량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그 시대의 풍경이기도 했던 것이다.  
 

Ⅱ.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난 김창열은 유교를 신봉하는 넉넉한 지주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김창열의 이 출신 성분은 매우 중요하다. 훗날 그는 예의 물방울 작업에서 캔버스 바탕에 한자를 도입하는데, 이는 어릴 때 배운 서예가 계기가 되었다. 

 1929년생인 김창열이 8.15해방을 맞이한 때는 열 일곱 살 이었다. 그의 세대는 일본에서 미술교육을 받고 귀국한 [선전]출신의 작가들이나 해방공간에서 국공립 미술대학의 창설 멤버인 구세대의 제자들에 해당한다. 박서보나 하인두처럼 1930년대 초반에 출생한 이들은 청소년기까지 일제의 교육을 받은 관계로 일본어에 익숙하며 한글에 서툰 세대적 특징을 보이는데, 이는 전위적 후발주자로 등장하는 60년대의 4.19세대가 한글에 친숙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비정형 회화 세대는 그뿐만 아니라 유년시절부터 유교식 교육이 배태한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사회질서와 규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덕목을 어린 시절부터 강요받고 자랐다. 즉, 체제순응적 사고에 길들여진 세대인 것이다. 그런 세대가 비정형 회화운동에서 보는 것처럼 선배 세대에 도전과 저항을 꾀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Ⅲ. 
 김창열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물방울에 착안하게 된 것은 1970년대 초반 프랑스에 채류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 이전, 한국에서 비정형 회화 운동을 할 시기인 1964년에 제작한 <제례>(162x130cm)에 이미 그 싹이 보이고 있었다. 이 작품의 오른쪽 상단에 보이는 찐득하게 흘러내린 물방울이 그 원형이다. 그 물방울에는 6.25전쟁 시기에 겪은 참상이 하나의 상징처럼 응고돼 있었다. 그 원형이 김창열의 뇌리에 각인돼 있다가 다시 순화돼 맑고 투명한 물방울로 변질돼 나타난 것은 1970년대 초반 프랑스에 거주할 때였다. 김창열은 록펠러재단의 후원으로 1966년부터 8년까지 3년 동안 뉴욕의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미술을 공부하는 동시에 미술관을 순례하며 드 쿠닝을 비롯하여 마크 로스코, 잭슨 폴록, 애쉴 고르키 등 거장들의 그림을 접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폐허가 된 조국의 척박한 문화적 환경에서 자란 그가 접한 세계적 도시인 뉴욕은 그의 개안(開眼)을 일깨운 자극처였다. 거대한 문화적 충격으로 방황하는 그에게 도움을 준 사람은 다름아닌 백남준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김창열은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하게 되는데, 이 행사를 끝으로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파리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물방울이 탄생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내가 김창열의 물방울을 처음 본 것은 1976년 현대화랑에서 열린 초대전에서 였다. 물방울을 소재로 한 많은 작품들이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제 막 떨어질 것만 같은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들. 그것은 현실적인 존재라기 보다는 어떤 이상적 상태를 동경하는 듯 보였다. 그것은 마치 어렵고 지난한 현실적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일종의 정신적 위안일는지도 모른다. 김창열의 물방울들은 마치 현실이란 땅을 딛고 서있는 인간 존재가 그 고통을 승화하고 치유하기 위해 반대급부로 이상향을 꿈꾸는 것처럼, 현실을 초월한 존재자인 것이다. 눈 앞에 있으되 하나의 환영으로 존재하는 존재, 눈으로는 보이나 손으로 쥘 수 없는 존재, 그것을 가리켜 과연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을 일러 나는 “김창열의 물방울은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비현실적인 존재다. 현재 나의 눈앞에 보이되, 현실로는 존재하지 않는, 다시 말해 현실과 비현실의 중간항으로서의 존재자인 그것은 허상의 시각적 트릭이 빚어낸 한 편의 드라마인 것이다. 라고 쓴 바 있다. 

     
Ⅳ. 
 일견 지루하게 지속된 스타일상의 반복 때문이었을까? 좀처럼 변화의 기미를 보이지 않던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 것은 1986년 무렵이었다. 천자문이 도입되면서 한문을 바탕으로 한 물방울 그림들이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이때는 물방울 그림이 탄생한 1970년으로부터 15년이 경과한 시점이었다. 긴 시간의 우회로를 거쳐 드디어 동양문화의 정수인 한문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김창열의 60년 화업을 크게 구분할 때, 50년대 중반에서 60년대 후반에 이르는 앵포르멜의 시기, 70년대 초반에서 80년대 중반에 이르는 물방울의 시기, 그리고 80년대 중반에서 현재에 이르는 물방울과 한자와의 만남의 시기는, 일견 지루한 듯 보이지만 거기에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변형과 숙성의 등식이 놓여 있다. 20대의 젊은 시절에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은 바 있는 그로서는 장년에 찾아 온 안정된 기간을 거치면서 한자를 통해 우주의 철리를 통찰하는 시기에 당도한 것이다. 그것은 첫째, 물방울을 통해, 둘째, 한자와의 만남을 통해 가능했다.“

 이제 김창열은 이 세상에 없다. 50년대에 그와 함께 비정형 회화 운동을 펼쳤던 훗날의 단색화 작가들도 서너 명을 제외하곤 대부분 세상을 떴다. 그렇다면 우리는 김창열의 삶과 예술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평생토록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이어온 코스모폴리턴, 그의 예술은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훗날 그에 대한 미술사적 평가는 과연 어떻게 내려질 것인가. 파란 많고 굴절에 가득 찬 한국 근현대사를 몸소 살아오면서 지난한 역사를 그림 속에 용해시켜온 작가 김창열, 그는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천상 어디에선가 분란이 그치지 않고 있는 이 땅을 고즈녁한 시선으로 내려다 보고 있을 것이다.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주최 에콜 드 파리의 거장들전 도록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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