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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수 / ‘제3의 영역’에서 전면적 극사실 회화로의 전이(轉移)

윤진섭



‘제3의 영역’에서 전면적 극사실 회화로의 전이(轉移)




윤진섭 미술평론가


Ⅰ.

 양귀비꽃이나 풀잎에 맺힌 영롱한 물방울을 주로 그려 온 이영수가 이번에는 노랗게 물든 은행잎으로 새로 변신한 화풍을 대중에게 선보인다. 선화랑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따라서 개인전을 무려 30회나 치른 바 있는 그가 이제까지 견지해 온 관점을 바꿔 어떻게 대상에 새롭게 접근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사실 어떤 작가든 오랜 연륜을 통해 자신에게 익숙해진 소재를 버리고 새로운 소재에 대한 탐구를 시도한다는 것은 큰 심리적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는 마치 발명특허처럼 소재의 개발이 곧 그 작가의 브랜드가 되어 지명도를 높이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이 독특한 소재의 개발에 골몰하게 되며, 작품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숱한 노력을 기울인다. 이는 마치 시인이 단 한 편의 시로 높은 대중적 인기를 얻는 것과 유사하다. 

 이영수는 꽃과 풀을 주로 그리는 작가다. 즉, 푸근한 정감을 주는 자연이 작업의 소재다. 유년시절부터 집의 넓은 정원에 가득 핀 꽃을 보며 자란 관계로 일찍 미감이 형성되었다. 그런 삶의 과정을 통해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형성되고 자연스럽게 예술적 감흥이 싹트게 된 것이다. 이영수는 단순히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그리는 풍경화가가 아니다. 바로 이 점이 그가 통상적인 의미의 풍경을 그리는 풍경화가와 다른 점이다. 


Ⅱ.

 이영수의 풍경 그림은 그의 심미안(心美眼)에 의해 걸러진 특정한 대상을 소재로 한다. 이른바 ‘선택과 집중’인 셈이다. 따라서 오랜 세월 이영수가 천착해 온 작업의 소재를 열거하면 연꽃을 비롯하여 양귀비꽃, 청보리, 수국, 풀잎, 낙엽, 은행잎 등등이며, 연대기적으로 볼 때 이들은 각기 시기를 달리하며 탐구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다음에 언급해야 할 두드러진 특징은 접사(close up)의 방식이다. 이는 물론 카메라의 촬영기법에서 보는 것 같은 아주 정밀한 묘사는 아니지만, 강조할 대상을 크고 자세히 묘사하는 기법은 이영수의 작품이 지닌 전반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가령, 풀잎에 맺힌 영롱한 물방울을 묘사할 때 이영수는 이 방식을 선호한다. 

 이러한 태도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종의 ‘객관적 거리두기’이다. 가급적 정감적 접근을 억제한 상태에서 사물을 관찰하고 이를 냉엄한 시각에서 화면에 옮기는 것이다. 따라서 물방울을 그린 이영수의 특정한 작품들(Natural ImageⅠ,Ⅱ, 130x70cm, oil on canvas, 2017, 2018)은 사진을 연상시킨다. 이 점은 특히 채색의 기법에서 두드러지는데, 풀잎 등 주변의 대상이 투영된 맑고 투명한 물방울의 정치(精緻)한 묘사와 녹색과 청색의 단색조로 과감히 처리한 배경에서 그러하다. 즉, 근접한 대상(물방울)을 강조하기 위하여 배경을 단순히 처리하는 방식은 유사한 사진효과를 연상시킨다. 커다란 풀잎 위에 놓인 단 하나의 물방울이 앞도적으로 관객의 시선을 끄는 가운데 주변의 녹색을 단색조로 약간 흐릿하게 설정한 것은 결과적으로 이 그림을 여타의 극사실주의와 차별화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영수는 자신의 화풍을 통상적인 의미의 목가적인 풍경도 아니고 극사실화도 아닌 ‘제3의 영역’에 안착시킨다. 왜냐하면 주대상을 크고 자세하게 묘사하는 가운데, 배경을 단색조의 계조(단계별 흐리기/gradation)로 처리하는 방식은 정상적인 인간의 눈이 대상을 보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영수가 즐겨 사용하는 이 회화적 방식은 사물을 바라보는 눈의 지각과 인식, 그리고 대상 사이에서 파생되는 끌고당김, 즉 길항(拮抗) 관계를 드러낸다. 

 <Natural ImageⅠ>이란 제목의 작품은 나무줄기에 대롱대롱 매달린 10여 개의 큰 물방울과 그 위에 붙어있는 20여 개의 작은 물방울을 그린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그림의 배경은 녹색의 단색조로 전체적으로 약간 흐리며 어둡게 표현돼 있다. 이 그림을 그리며 작가는 특히 영롱하게 빛나는 큰 물방울의 묘사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이유는 각 물방울들에 비친 주변의 풍경이 약간 각도를 달리하면서 서로 다른 모습이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크고 작은 물방울들이 어울려 자아내는 풍경의 객관적 효과를 높이려 하니 의도적으로 배경을 단순하게 처리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과는 아주 훌륭했으며, 극사실적 기법을 사용하되 극사실주의가 아닌, ‘제3의 영역’을 창출하고 있다. 이 영역은 통상적인 풍경화가 주는 정감적이며 서정적인 느낌과 극사실주의가 지닌 냉엄하고 객관적인 효과의 사이에 존재한다. 그리고 무엇을 그리느냐 하는 소재에 따라 정감적인 효과와 냉엄한 심리적 효과를 왕복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양귀비꽃을 소재로 한 넓은 들판을 그린 작품은 전자에 해당하고 풀잎에 맺힌 물방울을 그린 작품은 후자에 속한다. 


Ⅲ. 

 이번 전시를 통해 이영수가 새롭게 선보일 작품들은 은행잎을 비롯하여 비에 젖은 낙엽과 녹색의 잎새들, 그리고 예의 나뭇가지에 맺힌 물방울을 그린 것들이다. 전체적으로는 완전히 극사실적이지는 않지만, 냉엄한 시각에서 대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려 한 흔적이 느껴진다. 특히 은행잎을 그린 대작은 다른 작품들도 그렇지만 완전히 대상에 몰입하여 열성을 다한 매우 성실한 작품이다. 

 이번 초대전에 출품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위에서 직각으로 아래를 내려다 본 부감법으로 그린 것들이다. 이것이 그 이전과 다른 새로운 시점의 변화이다. 작가가 대상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고 그린 그림을 벽에 고정시킴으로써 관객은 수평으로 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현상을 만나게 된다. 만일 벽에 고정시키는 회화적 관습(convention)에 무지한 어린이나 원시인이 이 그림을 본다고 가정하면 “저 잎새들이 왜 땅에 안 떨어지고 벽에 붙어있지?”하는 의문을 갖게 할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영수의 그림은 이미지와 사물 사이에서 파생하는 존재론적인 역설을 드러내 보여준다. 즉, 기존의 회화적 관습에 익숙한 관객은 이영수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낙엽이나 은행잎들이 벽에 걸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길 위에 수북이 쌓여 있는 것으로 착각하면서 가을의 정취를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낙엽들이 뒤엉킨 땅바닥의 장면을 정치(精緻)한 필치로 묘사한 이영수의 그림들은 정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은행잎을 그린 그림보다 더욱 정감적인 느낌을 준다. 비 때문이다. 이 그림은 추척추적 내린 비로 인해 번질거리는 낙엽들의 표면 질감을 아주 빼어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통상 유채물감으로 물에 젖은 효과를 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도 낙엽의 굴곡진 이랑을 따라 얕게 흐르거나 고여있는 상태에서 번질거리는 물과 다양한 형태로 잎새 위에 펑퍼짐하게 퍼져있는 크고 작은 물방울들의 표면 질감을 이처럼 생기 있게 묘사하기는 더욱 어렵다. 실제의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 그림들은 극사실주의의 본령에 가까운 작품들로서 냉엄한 객관성이 오히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로 연상되는 애상감을 불러일으킨다.  
      
 
Ⅳ.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영수의 그림은 이전의 그림들과는 매우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 변화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가장 두드러진 것은 시점(視點)의 변화이다. 수평적 시점에서 수직적 시점으로의 이동, 그 부감(俯瞰)의 세계는 대상의 이미지를 캔버스의 표면과 일치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전면적인(all-over) 화면 효과를 낳는바, 이는 모더니즘 회화의 핵심이다. 관례적으로 볼 때 이 전면성(all-overness)이란 용어는 흔히 추상표현주의나 색면추상, 혹은 미니멀 아트 등등 추상화적 경향에 적용돼왔다. 그러나 이영수 그림의 경우 비록 형상을 지닌 극사실화이긴 하나 작가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대상을 전면적으로 화면에 배열했다는 의미에서 이전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새로운 시도가 아닐 수 없다.

 다음에 살펴볼 것은 물방울 그림의 변화이다. 이번에 발표하는 4점의 신작 물방울 그림은 이전의 작품과 달리 물방울 표면에 비친 풀잎의 존재감을 더욱 정밀하고 뚜렷하게 표현한 반면, 배경의 풀잎 부분을 짐짓 서툰듯한 붓질로 대상의 윤곽선을 흐림으로써 이전 작품의 배경에서 보이던 사진과 같은 느낌을 제거하려 한 의도가 엿보인다. 말하자면 회화성을 강조하고자 한 것인데, 이 회화적 요소는 전면성의 추구와 함께 앞으로 전개될 작업에서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변의 풍경을 오롯이 담아내는 볼록거울의 역할을 하는 물방울에 대한 묘사는 전의 작품보다 더욱 치밀해지고 밀도도 높아 사물의 존재감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즉, 회화의 전면성과 더불어 사물의 존재감에 대한 깊은 관심은 향후 이영수의 작업을 새롭게 이끌어나갈 컨셉트이거니와, 이에 대한 열정이 어떻게 투사될지 앞으로 그의 작업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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