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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현대화’에 따른 문화전략의 필요성

윤진섭



‘전통의 현대화’에 따른 문화전략의 필요성

                       
                    
윤진섭(미술평론가)

Ⅰ.

 전남도립미술관이 역사적인 개관을 맞아 준비한 [현대와 전통, 가로지르다]전은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다”라는 전체 주제전의 일부이다. 모두 세 파트로 구성된 이 특별기획전은 전시구성상 [의제와 남농 : 거장의 길]전과 [로랑 그라소 : 미래가 된 역사]전의 중간에 끼어 있어서 마치 몸통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시제상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를 암시하는 내용으로 돼 있어서 관객들은 전시를 둘러보면서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을 몸으로 체감할 수 있다. 

 1부에 해당하는 [의제와 남농 : 거장의 길]전은 과거에 해당하는 전시이다. 이 전시는 전남도립미술관이 위치한 전남의 문화예술적 특색을 상징하는 남종문인화의 거장들인 허백년(1891-1977)과 남농 허건(1908-1987)의 작품세계를 조명하고 있다.

 2부가 이 글에서 언급하게 될 [현대와 전통, 가로지르다]전이다. 이 전시는 미래의 세계를 설치와 영상을 통해 보여주는 제3부 [로랑 그라소 : 미래가 된 역사]전의 앞에 위치해 있다. 때문에 전시실에 입장한 관객들은 의재와 남농의 작품이 풍기는 그윽한 묵향의 세계를 관람한 후 그 정신을 계승한 현대작가들의 작품을 둘러보게 된다. 허달재, 김선두, 황인기, 조병연, 장창익, 허진, 세오 그리고 ‘김진란 & 바루흐 고틀립(Baruch Gotlieb)’ 팀이 그들로서 각자 개성있는 작품세계가 전시장 가득히 펼쳐지고 있다.  

 이 전시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남도 미술의 성과와 가치를 조명’하는 동시에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선보임으로써, 향후 미술관이 지향하게 될 목표와 이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즉, ‘다양성, 개방성, 창의성’으로 대변되는 전남미술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전시를 통해 펼친다. 그에 걸맞게 이번에 개관하게 된 전남도립미술관 건물은 산뜻한 외관 만큼이나 내부의 전시환경 또한 쾌적하고 기능적으로 조성돼 최첨단 매체의 전시도 가능하게끔 적합하게 지어졌다. 특히 국제적 추세를 감안하여 대규모 설치미술이나 미디어 아트 작품도 구현이 가능하게 설계된 전시실의 높은 천장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번 개관전은 이러한 미술관의 최신 시설에 걸맞게 설치와 미디어 아트 작품을 수용하여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현대미술의 흐름을 제공하고 있다. 


Ⅱ.

 그렇다면 이번 제2부의 [현대와 전통, 가로지르다]전에 초대된 작가들의 면모는 어떠한가? 또한 이들의 작품세계가 지닌 공통적인 특징들은 향후 전남미술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글의 서두에서 이 점을 우선적으로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공공미술관의 개관전이 갖는 상징성과 방향성을 초대작가들의 작품세계를 통해 짚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작가들의 출신을 살펴볼 때 대체로 호남 출신인 점이 두드러진다. 특히 의재의 화맥을 잇고 있는 허달재와 남농의 가계를 이은 허진의 경우에서 보듯이, 남종문인화의 유산을 현대화하는 작가들이 다수 포함돼 있어 향후 남도미술의 발신기지로서의 역할이 기대된다. 이러한 사실은 그동안 도립미술관을 갖춘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전라남도가 이제 현대식 공공미술관 시설을 갖춤으로써 국제 경쟁력을 지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전라남도는 4년 전에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를 창설함으로써 국제화 대열에 들어섰으나 국제적 규모의 미술관이 없어 아쉬웠던 터였다. 이제 비로소 숙원사업의 꿈을 이루었으니, 예컨대 남종문인화의 세계화와 같은 당면 과제를 실천해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한 과제를 수행해 나가는데 있어서 전남도립미술관은 중심에 설 위치에 있다. 이는 특히 전남도립미술관이 도내 최고 권위의 미술전문기관으로서의 위상임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자체 기획전을 통해 남종화를 비롯한 남도미술의 현대적 정립을 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화라고 하는 시대적 소명을 달성해 나갈 때 ‘다양성, 개방성, 창의성’이라고 하는 전남미술의 미래적 포부에 대한 청사진이 구체화될 것이다. 


Ⅲ.

 아마도 비엔날레를 비롯한 현대미술 전시에 익숙한 관람객이라면, 1부 전시를 본 뒤 2부의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발걸음을 빨리 할 수도 있으리라. 그리하여 전시를 보는 둥 마는 둥 대충 살펴본 뒤, 3부인 로랑 그라소 전시장으로 들어서면서 비로소 자신이 좋아하는 전시장에 들어서게 된 것을 기뻐할 지도 모른다. 

 동시대의 관람객들은 언제부턴지 요란하고 소란스러운 전시에 익숙해졌다. 아마도 설치와 오브제, 미디어 아트, 그리고 퍼포먼스가 자주 등장하는 비엔날레가 미친 영향 때문일 것이다. 하기야 요즘에는 아트 바젤처럼 성가높은 아트 페어에서도 설치와 오브제, 미디어 아트는 물론이요 심지어는 퍼포먼스마저 낯설지 않은 편이니 이러한 환경은 시대적 유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요란한 동적 흐름의 이면에는 고요한 정적이 도사리고 있는 법이다. 나는 최근 들어서 그 가치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하는 회화가 바로 그렇다고 본다. 비록 우리가 관례적으로 행해 온 서양화니 동양화니 하는 분류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지만, 여기서 그 문제를 거론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처럼 정적을 자아내는 회화라고 하는 예술형식이 자극적인 문명의 시대에 더욱 큰 호소력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는 정신적 평안을 주는 요가와 선방(禪房)이 서구사회에서 더욱 인기를 끄는 현상과도 무관치 않다. 

 여기서 어쩌면 4차혁명과 인공지능(A.I)이 운위되는 이 시대에 정신을 논한다는 자체가 시대착오적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느 날 홀연히 불어닥친 코로나 사태 이후 환경파괴의 주범인 현대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에 대한 재고(再考)의 계기를 낳았다.  

 이른바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싹트게 된 계기는 생태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제기된 코로나 사태 이후이다. 인간이 기대야 할 요람으로서의 자연은 그렇게 인류가 파국으로 치닫게 된 위기의 국면에서 마치 구원투수처럼 인간에게 새롭게 다가온 것이다. 그런 연유로 해서 ‘자연’이 이번 전시의 핵심어로 등장하게 되었으니, 거기에는 현사태를 바라보는 우려스런 시선이 자리잡고 있다. 
 

Ⅳ. 

 “손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려야 한다.”는 허달재의 발언은 문인화 정신을 잘 묘파하고 있다. 이 말은 달을 있는 그대로 그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느낌으로서의 달, 마음에 비친 달을 그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 마음이 관람객에게 제대로 전달되려면 그림을 감상하는 관람객의 마음이 작가의 마음에 조응돼야 할 터인데,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이 방식에 익숙치 못하거나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 한다. 그래서 감상의 품격이 부족하기 때문에 건성으로 쳐다보고 서둘러 지나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비단 허달재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전시에 초대된 대부분의 작가에게도 해당한다. 

 허달재의 매화 그림은 홍매든 백매든 간에 은은한 향과 기품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화면에 고르게 가득 퍼진 매화는 그 크기에 있어서 얼추 균일하고 모양에 있어서 엇비슷하다. 색의 톤이 고르기 때문에 균질적으로 느껴지는 바, 이는 그림에 현대적인 느낌을 부여하는 주요인이다. 도자기이면서 동시에 거대한 호수를 품은 산맥이기도 한 허달재의 최근 작품은 수많은 매화 가지들이 엉기고 모여 이루어진 형상일 터이다. 작가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나 자신 존재의 핵심 깊이 도달하고 내재적 자각인 순수 직관에서의 끊임없는 적공”에서 표출된 형상들은 우주의 질서에 대한 작가의 끊임없는 통찰의 결과물이며, 사물을 직시하는 마음의 반영물이다. 

 레고 블록, 리벳, 실리콘, 레이저, 인조수정 등 현대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안견의 <몽유도원도> 등 고전 명화를 현대화하는 작업에 몰두해 온 황인기는 이번 전시에 의재 허백년의 <목단화운근(牧丹和雲根)>을 오색이 영롱하게 비치는 사각 홀로그램 디스크 판 위에 검정색 실리콘을 사용하여 번안, 새롭게 창작한 작품을 출품하였다. 이른바 ‘디지털 산수’를 추구하고 있는 황인기는 거대한 화면을 창출하여 숭고미를 느끼게 하는 창작방법론을 주로 사용한다. 그리하여 멀리서 보면 풍경이나 대상이 뚜렷이 보이나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레고나 실리콘의 생생한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서 전체로서의 풍경이 사라지는 시각적 효과를 낳는 것이 작품의 특징이다. 이번 출품작가 중 유일하게 충북 출신인 그는 그런 연유로 남도 특유의 남종화 전통이나 정서와는 무관한 고전 명화들을 거대한 크기로 제작한 작품들을 출품하였다.  

 전남 영암 출신의 김선두는 붉은 산을 그렸다. 잘 익은 수박의 속을 연상시키는 밝고, 맑고, 고운 붉은 색은 화면 전체를 뒤덮을 듯이 장악하여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거대한 화면이 농익어 언뜻 보면 잘 익은 수박의 한 가운데를 쩍 가른 것처럼 시원하게 보인다. 오랜 만에 보는 채색화의 진풍경이다. 그런데 그것은 수박이 아니라 봉긋이 솟아오른 산 언덕을 그린 것 이다. 추상적으로 표현돼 있어서 잘 식별이 안 되나 그림의 하단부 동그란 백밀러 안에 비친 도로로 미루어 볼 때 운전 중에 본 풍경을 그린 것 같다. 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과 화면의 반쯤을 차지하는 언덕을 청색 단색조로 그린 거대한 크기의 풍경화를 통해 김선두는 곡선과 여백, 여운이 살아 숨쉬는 모던 이전(pre-modern)의 세계를 동경하는, 느림의 미학에 기반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 

 한국 남종화의 비조인 소치 허련과 남농 허건의 5대 화맥을 잇는 허진이지만, 여백의 미와 문기(文氣)가 충만한 남종화적 전통에서 벗어나 현대적 미감을 추구해 왔다. 그의 작품에는 “인간과 문명, 자연 간의 대위법적 등식”이 자리잡고 있다. 허진의 <이종융합동물+유토피아> 시리즈는 이러한 등식이 한색과 난색의 대비를 바탕으로 다양한 소재를 통해 나타난다. 이 연작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검거나 밝은 색상을 띤 익명의 도식화된 남녀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 인간군상이 퓨마, 사슴, 호랑이, 말, 코끼리 등 동물과 수도꼭지, 다이얼식 전화기, 좌변기 등등 다양한 사물들과 한 화면에서 어우러지면서 사건이 발생하는 것 같은데, 화면을 가득 채운 점선들과 그러한 점선들이 만들어내는 동선들을 시선이 따라가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하여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다. 허진의 작품에 대한 해독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도상 해석에 따른 중의성은 그의 작업이 지닌 장점이기도 하다. 

 이이남의 <반전된 산수>는 말 그대로 의재 허백련의 <산수팔곡병풍>에 그려진 이미지를 디지털 작업으로 전환, 상하가 바뀐 형태로 설치한 작품이다. 먹물이 가득 담긴 거대한 직육면체의 수조에 의재의 산수화 이미지가 거꾸로 비치고 있다. 전시장 벽에 동영상이 나타나면 처음에는 밤하늘에 명멸하는 크고 작은 빛들이 어지럽게 난무하다가 점차 거꾸로 된 산수화의 이미지로 바뀐다. 벽에는 거꾸로 된 산수화가, 그 아래에 설치된 먹물이 가득 들어찬 수조에는 바로 선 산수가 서로 대칭적인 모습으로 관람객의 눈에 들어오게 된다. <반전된 산수>라는 제목은 여기에서 유래하는 바, 이는 원작의 고정된 이미지가 디지털 작품을 통해 움직이는 이미지로 전환되었음을 말해준다. 이이남의 작업은 고전 명화를 디지털 기반의 테크놀러지로 전환하는 과정을 통해 세상은 늘 변화의 와중에 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세오가 그리는 세계는 유토피아적인 이상향을 연상시킨다. 인간이 부재한 가운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숲속에서 한 떼의 오리들이 물 맑은 연못에서 헤엄치며 노는 장면이 화려한 색상으로 묘사돼 있다. 연못의 물은 어찌나 투명한지 푸른 물 위에 하늘의 흰 구름이 둥둥 떠다닌다. 한국에서 동양화를 전공하였으나 독일로 유학, 독일 낭만주의와 신표현주의를 접한 이후 세오는 여러 차례의 변신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물들인 한지를 찢어 그림을 그리는 꼴라주 회화에 한동안 전념한 세오는 이번에 제작한 작품을 통해 신비스러울 정도로 화려하면서도 단 하나로 규정지을 수 없는 다면적 해석의 세계를 열어가고 있다. 

 순결을 상징하는 흰 오리들이 모여 노는 세계는 평화와 공존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그것은 반대급부로 투쟁과 반목으로 점철된 인간사회에 대한 완곡한 비판일 수도 있으며, 또는 인류의 행복한 공존에 대한 권유일 수도 있으리라. 예술작품이 우리들에게 뭔가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면 바로 이러한 지점일 것이다.  

 전남 영암 출신의 작가 조병연은 이번 출품작가 중 유일하게 정통 수묵산수화를 그린다. 남농의 원작을 재해석한 <삼송도>, <월출산>, <달마산> 등 남도의 절경을 수묵담채화로 묘사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인 <지리산>은 그 길이가 무려 10미터에 달하는 대작이다. 

 지리산을 비롯하여 조병연이 그린 월출산, 두륜산, 무등산, 달마산, 유달산 등등 전남지역의 산들은 작가 자신이 수없이 탐방하는 가운데 직접 몸으로 익힌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연유로 조병연의 수묵산수화들은 실경이며, 동시에 몸과 마음속에 육화된 풍경으로서의 그림들이다. 조병연의 대작 <지리산>에는 장엄한 기운이 흐른다. 산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산의 기세와 맥박이 조병연의 붓끝을 통해 체현돼 있기 때문이다. 

 장창익은 동양화 전공이지만 회화에서 평면성을 신봉하는 작가이다. 그는 평면에서는 평면에 충실해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평면적이며, 대개 단색조로 이루어져 있다. 청색이나 붉은색, 혹은 보라색에 금색으로 힘주어 쓴, 넓적한 평붓으로 그린 글씨 혹은 부적을 연상시키는 그림들이 주류를 이룬다. 

  서예를 연상시키는 그림들과 탈춤의 탈에서 유래한 가면을 그린 장창익의 그림들은 사회적인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한 것들이다. 가면 그림들은 기층민중의 저항을 담은 매체(탈)라는 점에서, 서체 그림들은 사회적 이슈에 대한 비판적 글을 중첩해서 쓴 글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장창익은 작가노트에서 자신이 그린 이 작품들을 전통의 재해석이라는 맥락에서 스스로 부과한 과제의 산물로 여기고 있으며, 그 일이 매우 어려운 것임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과업을 회피할 생각은 없으며, 끝까지 수행할 것임을 다짐한다. 

 김진란과 바루흐 고틀립은 공동으로 아트 & 디자인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개관전에 출품한 이들의 작업은 협업이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인 <익명의 역사의 절-전이 공간(Temple of Anonymous History-Transitional Space)>은 한국의 전통 단청을 디지털화한 작품이다. 궁궐과 사찰의 건축물을 장식할 목적으로 고안된 한국의 전통 단청을 2D와 3D로 디지털화한 이 영상작업은 생활세계 속의 시각적 패턴들을 예술의 문맥 속으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두 사람은 이 분야에 도전하고 있다. 

 김진란 & 바루흐 고틀립은 이번 개관전을 위해 독립된 전시실 안에 8개의 기둥을 지닌 사각 입방체의 건축물을 직접 설계했다. 이 절은 네 방향에 ‘들어걸개문’을 상징하는 문이 달려 있으며 지붕과 수평으로 매달린 문에는 디지털 단청 문양이 투사된다. 작품들은 전시장 밖의 벽면에 ㄱ자 형태의 디지털 단청 작품이 걸려있으며 카페 앞 로비 바닥에는 단청 무늬의 휴식공간도 마련돼 있다. 


Ⅴ. 

 앞에서 각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전통의 현대화’라는 공통의 과제는 단지 되풀이 논의된다는 의미에서 진부한 것만은 아니다. 전통의 현대화가 진부한 것으로 치부될 때에는 그 의제가 ‘구호화’될 경우이다. 어떤 것이 내용이 없이 구호화될 때 그것은 ‘선전(propaganda)’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만일 ‘전통의 현대화’에 작가들의 구체적인 노력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 공동체 혹은 국가가 외치는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번 개관전의 경우도 그러한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각 작가들의 작품 속에는 전통의 현대화를 위해 기울인 각고의 노력이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재료를 비롯하여 점, 선, 면, 색과 같은 조형의 기본 요소는 물론이고 준법(峻法), 기법, 매체, 시점(視點), 나아가서는 협업방식에 따르는 다양한 방법론에 대한 탐구를 통해 “전통을 어떻게 현대화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깊은 고심의 흔적을 남겨놓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한 특정한 시대에 작가들이 바라본 세계에 대한 비전의 집합장이자 실험의 용광로이다. 거기에서 불꽃 튀는 합금과 철철 녹는 금속의 융합이 이루어진다. 동질의 것과 이질의 것이 섞이면서 새로운 제3의 성질을 지닌 물질이 태어난다. 그 새로움이 진부한 사회에 새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작용을 하며, 그것을 일러 우리는 ‘새로운 창조’하고 부른다.

 따라서 ‘전통의 현대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진부하지 않다. 문제는 구호가 아니라 ‘실천’이다. 미술현장에서 그것을 어떻게 구현해 나갈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나의 화두로 삼아야 한다. 

 ‘전통의 현대화’는 다름 아닌 과거의 언어를 현재의 언어와 감각으로 탈바꿈시키는 일이다. 현재의 언어와 감각이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요, 현재 우리의 오감에 호소하는 감각이다. 따라서 구태가 나는 언어와 감각은 현대적 언어와 감각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과거에 사용했던 언어요, 옛날의 오감에 호소됐던 감각일 뿐이다.     
 
 ‘전통의 현대화’는 끊임없는 탈바꿈, 즉 전환의 과정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번역과 해석의 과정이 따른다. 뭔가가 끊임없이 소환된다. 사건을 비롯하여 인물, 물건, 태도와 기술, 기법 등등이 오늘의 현장으로 소환되며, 그것들은 궁구(窮究)되고 새로운 언어로 해석되고 번역되며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연마된다. 따라서 전통의 현대화란 다른 말로 하면 문화의 세련화(洗練化)라고 할 수 있다. 문화의 세련도가 고도로 높아질 때 그것은 보편성을 띠게 돼 비로소 국제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지역의 문화예술이 지역적 한계에 머물 때 보편성의 획득은 어렵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탁트인 시야의 확보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따라서 보편적인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열린 자세(개방성), 창의적 태도(창의성), 타문화를 인정하는 관용적인 자세(다양성)를 비전으로 설정한 전남도립미술관의 문화전략은 글로벌 시대를 겨냥한 적절한 포석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예술은 인간이 자아를 성찰하고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고 본 이지호 관장의 통찰은 코로나 19로 대변되는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마음의 지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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