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역사와 비평 (2)

윤진섭


 Ⅲ. 겁 없는 전사들 : ‘컴아트 그룹’의 북경 진출 작전(1993-1996)  

2017년 6월 6일, 수원에 위치한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서 한 기획전이 오픈을 했다. 《그것은 바로 그것이 아니다 Experimental Art of Suwon in the 1980-1990s It's Not Quite That》라는 타이틀의 이 전시는 1980년대 이후 수원에 기반을 둔 두 실험미술 그룹의 활동을 조명하는 회고전이었다. ‘컴아트 그룹(Com-Art Group)’과 ‘슈룹(Shuroop)’22)은 수원에 거주하는 작가들이 주축이 돼 결성한 실험미술 그룹이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컴아트 그룹’이 다루어져야 할 당위는 이 단체가 지닌 ‘아방가르드적 성격’과 ‘지역미술’에 대한 관심의 촉구에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지역미술에 대한 문제는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기존의 한국미술에 대한 미술사적 서술이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온 사실과도 무관치 않다. 특히 아방가르드 미술과 관련시켜 볼 때, 서울을 비롯한 중앙 중심 미술사 서술의 편중된 시각은 장차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우려되는 바가 없지 않다. 1980년대 후반부터 기류가 형성된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전개과정에서 그동안 ‘주류미술’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젠더(gender), 페미니즘(Feminism), 성소수자, 커뮤니티 아트 등 그동안 ‘마이너리티’로 간주돼 온 이슈들은 부각돼 왔지만, 그 가운데 하나인 ‘지역미술’에 대한 조명은 잘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나는 약 30여 년의 시간적 거리가 생긴 ‘컴아트 그룹’의 지난 활동을 소개함으로써, 차제에 지역의 전위미술에 대한 미술사 분야의 관심을 촉구하고자 한다.  우선 이 글의 성격과 집필 목적에 맞춰 어느 정도의 제한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컴아트 그룹’에 관한 자세한 소개는 생략하기로 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이경근, 김석환, 홍오봉, 박이창식 등 ‘컴아트 그룹’ 일부 회원들이 북경에서 벌인 일련의 전위적 활동을 소개하고자 한다.23) <도판4>
 
 1990년 1월 1일 창립된 이래 1992년 8월까지 2년 동안 약 26회에 걸쳐 국내외 전시를 기획하거나 전시에 참여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인 ‘컴아트 그룹’은 1992년에 이르러 중국 진출의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한 이래, 중국은 ‘죽의 장막’이 암시하듯 신비의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따라서 수교이전에 민간이 중국에 진출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컴아트 그룹’은 북경에 진출하여 중국의 아방가르드 작가들과 교류할 당돌한 희망을 가슴에 품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모색해 나갔다. 대표인 이경근을 비롯하여 김석환, 황민수 등 ‘컴아트 그룹’의 핵심 멤버들은 전시계획서를 들고 문화부를 방문하여 담당자에게 방문 계획을 타진하였지만, 문화부는 외무부로 가라하고, 외무부는 문화부로 가라는 등 일은 제대로 풀리지 않고 공전을 거듭했다. 일이 풀리지 않아 한 없이 답답했던 이들은 그 무렵『미술세계』에 한국 행위예술에 관한 현장감 있는 르뽀 기사를 기고하던 문필가 김제영 여사의 도움을 받아 이어령 문화부 장관을 면담, 도움을 요청하는 등 백방으로 해결책을 모색해 나갔다.24) 이러한 내부적 노력에다 때 마침 찾아온 중국과의 수교(1992)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돼, 일은 급물살을 타고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1993년 1월, 북경 소재 중국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북경ㆍ한국현대미술의 육성(肉聲)-장안문에서 천안문까지》(1993. 1. 12-18, 북경, 중국미술관+중앙미술학원미술관)는 당시 한국은 물론 일본 전체를 통틀어 봐도 유례가 없는 ‘개척적’인 전시였다.25) 이 전시는 1970년대 후반 덩샤오핑(鄧小平)이 추진한 개혁개방정책 이후, 중국의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1989년 중국사회를 뒤흔든 ‘천안문사태’와 맞물려 전개된《중국현대미술전(Chinese Avant-garde Art)》(1989)과 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행사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Chinese Avant-garde Art’란 전시명에서 보듯이 ‘전위(前衛)’를 표방한《중국현대미술전》은 중국 정부에 의해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는데,26) 이는 결과적으로 1990년대 초반부터 중국 언더그라운드 작가들이 모여 거주하던 ‘원명원’ 인근의 중국 최초의 미술인 마을이 당국에 의해 해체되는 빌미를 제공했다. 원명원 인근의 이 창작촌이 해체된 이후 많은 중국 언더그라운드 미술인들이 해외로 망명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페이다웨이(費大爲)와 후한루(侯瀚如)는 프랑스로, 차이쿠어창(蔡國强)과 후앙루이(黃悅)는 일본으로, 슈빙(徐氷)은 미국으로 반체제 성향의 미술인들이 살길을 찾아 세계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던 것이다. <도판5, 6, 7>

 앞에서 대략 살펴본 것처럼 ‘컴아트 그룹’의 중국 전시는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장안문에서 천안문까지’라는 전시 타이틀의 부제가 암시하듯, 수원의 상징인 ‘장안문’을 출발하여 북경의 ‘천안문’에 이르는, 전시기획을 둘러싼 그 동안의 험난했던 도정을 의미함과 동시에 한국미술이 드디어 중국에 입성했음을 알리는 일성(一聲)이었다. 이들은 행사의 출범 자체를 ‘퍼포밍(performing)’해 한 판의 제의(祭儀)를 벌였다. 일단의 작가들이 1993년 1월 1일 자정 수원의 장안문에서 출문제의(出門祭儀)를 가진 뒤, 북경을 향해 출발했다.27) 당시 커미셔너의 자격으로 이 행사에 참여했던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시 분위기에 대한 이해를 위해 다소 길지만 여기에 인용한다. 

 “당시 북경의 거리 풍경은 60년대의 서울을 연상시켰다. 황사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정초의 쌀쌀한 북경 날씨는 몸과 마음을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죽의 장막에 의해 가려져 온 신비의 나라 중국은 그렇게 초행길인 우리 일행에게 다가왔다. 중국문화통사의 부장 직책을 지닌 강명(姜鳴)은 유일한 대(對)중국 접촉 창구였다. 내일의 일이 불투명한 어려운 여건에서도 전시와 기자회견, 세미나 등 제반 행사들이 속속 실천에 옮겨졌다. 기자회견장에는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기자들이 참석했으며, 리시엔팅(栗憲庭), 인슈앙시(殷桑喜), 인진난(尹吉男) 등 중국의 저명한 미술평론가들과 왕광이(王廣義), 송똥(宋冬), 왕루엔(王魯炎), 왕지안웨이(汪建偉), 구더신(顧德新)(이상은 중국측 참여작가, 필자 주) 등등 오늘날 스타급으로 성장한 중국 작가들이 전시의 개막식과 세미나에 참석, 열띤 토론을 벌였다.”28)

 전시기획과 관련하여 당시 중국의 상황은 썩 좋은 편이 못 되었다. 내일의 일을 예측할 없는 상황이었다. 이듬해인 1994년 전시에 앞서 선발대로 북경에 간 김석환의 다음과 같은 술회는 이 무렵 중국과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실감케 한다.29)   우에다(上田)는 이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지금으로부터 22년도 더 지난 이야기”임을 전제하면서 “당시의 중국정부는 개인의 생각을 중요시하는 현대미술과 자유로운 발상과 자본주의적 생각을 하는 작가들은 그들 눈 밖에 나는 위험한 사상을 가진 주범”30)으로 봤다고 썼다.  그런 사정이었기 때문에 베이징에서의 공식적인 퍼포먼스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게릴라 퍼포먼스’였다. 김석환, 이경근, 박이창식, 황민수, 홍오봉 등 행위예술가들은 공안원의 눈을 피해 천안문광장을 비롯한 자금성, 만리장성 등지에서 퍼포먼스를 펼쳤다. 당시만 해도 중국 사회는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공안원들의 감시가 삼엄했다. 대중이 많이 모이면 집회로 오인을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퍼포먼스가 이루어질 리 없었다. 황민수는 자금성 앞에 있는 인민광장 한복판에 서서 두 팔을 번쩍 들어 양손의 손가락 끝이 멀리 보이는 자금성의 지붕 끝에 일치하도록 한 퍼포먼스를 했다.(<장안문에서 천안문까지>, 천안문 광장, 1993). 똑같은 포즈로 한 번은 자금성을 마주보고, 한 번은 등을 지고 찍은 기록사진이 남아 있다.31) 1993년, 홍오봉은 《북경-한국현대미술의 육성(肉聲)-장안문에서 천안문까지》의 전시 오프닝에서 얼굴에 자신의 명함을 덕지덕지 붙이는 퍼포먼스를 하려고 했으나, 미술관 측으로부터 “왜 당신의 얼굴을 가려지게 하는가? 불손하게.”라는 항변을 듣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으며, 나중에 자금성 안에서 비밀리에 행해졌다.32) 김석환은 1993년 자금성의 입구에서 커다란 입을 벌리고 앉아 있는 해태 석상과 마주 보고 서서 입을 벌리는 퍼포먼스를 하여 한국과 중국 간의 교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승택은 1994년 커다란 짐자전거를 빌려 짐칸에 자신의 작품인 바람빠진 대형 지구풍선을 싣고 천안문 광장을 도는 퍼포먼스를 수행하였다. 1994년, 북경 근교의 만리장성에서 이경근은 검정색 선글라스를 쓴 채 온몸에 신문지를 붙이고 이승택의 대형 지구풍선에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는 퍼포먼스를 했으며, 박이창식은 그 옆에서 연신 콘돔을 부는 작업을 보여주었다. 만리장성에 관광차 왔다가 이를 목격한 중국인들은 힐끔거리고 지나치거나 호기심에 다가가 유심히 쳐다보기도 했지만, 공안을 의식해선지 많은 사람이 현장에 모이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도판 8,9,10-1,2> 

 Ⅳ. 글을 나오면서  

우에다 유조가 제작한 《지금, 동(東)의 몽(夢) Now A Dream of East전》리플릿의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다. “지금, 동쪽에서 바람이 분다./역사적 관계가 깊은 중국, 한국, 일본이/영원한 꿈을 이루기 위해 3국의 젊은이들이 북경으로 모여든다./지중해는 과거의 바다,/대서양은 현재의 바다,/그리고/태평양은 미래의 바다로 넓게 펼쳐진다./지금 동쪽의 꿈이......” <도판11>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서두에 언급한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총감독 파올로 헤르켄호프를 떠올렸다. 그는 왜 비엔날레 주제의 키워드를 ‘카니발리즘’으로 잡았던 것일까? 그는 경제적으로 핍박받는 제3세계의 입장에서 미국으로부터 부는 신자유주의의 북풍을 의식했던 것일까? 그래서 6대주 권역의 큐레이터들에게 이 식인풍습의 관행을 각자의 입장에서 해석해 볼 것을 권유했던 것일까? 파올로의 권유를 받은 아피난 포샤난다는 이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막강한 국제금융 세력이 아시아에 가하는 약탈’로 해석했다. 그것을 침략으로 규정할 때, 침략을 당한 입장에서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는 과연 무엇일까? 굴욕을 견디며 던져주는 빵을 위해 참아야하는 것일까? 아니면 빵을 상대방의 면상을 향해 던지고 풀뿌리로 연명하면서 힘을 길러야 할 것인가? 서구와 연관시켜 볼 때, 내가 미술현장에서 부딪힌 문제들 중 상당수는 이런 심리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민주주의 요체라고 하는 다수결의 원리는 그것이 원칙대로 지켜질 때 금과옥조(金科玉條)인 것이지, 담합과 협잡, 눈속임과 매수, 패거리와 짝짓기가 횡행하는 사회현실에서는 허수에 불과한 것이다. 선의를 가장한 ‘보이지 않는 힘’은 미술현장에 출몰하여 질서를 교란시키며, 자의적으로 세계를 분리하고, 자기 입맛에 맞게 판을 짜는 도박장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오늘날 아방가르디스트들에게 요구되는 사명이 있다면, 이처럼 어둡고 전망이 불투명한 시대에 인류의 미래에 대해 희망을 줄 수 있는 ‘전사의 힘’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상업주의에 영합하는 무늬만의 사이비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목표와 이상이 행동과 일치하는 진정한 의미의 아방가르드 정신의 회복이 그 어느 때 보다도 필요한 시기가 바로 오늘이 아닌가 한다.  

 내가 1960년대의 해프닝을 다룬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 그들이 보여준 행동은 20대의 젊은이들이 한 때 치기로 벌인 철없는 장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그들은 어찌 보면 시대의 희생양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주간지를 비롯한 당시의 언론은 때로 그들을 어릿광대 취급을 하거나, 기이한 짓을 하는 부류로 취급한 부분이 없지 않으며33), 군사정권은 이들을 불순하고 불온한 퇴폐분자로 낙인찍어 사회적 매장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해프너들 중에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은 이미 고인이 돼 이 땅에 없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환되었고. 앞으로도 그들의 예술과 삶은 전시와 학술, 비평의 대상이 돼 늘 새롭게 해석될 것이다.  1970-80년대를 건너뛰어 1990년대 ‘컴아트 그룹’의 행위예술가들을 주목한 이유는 이들에게서 난관을 극복하고 목적을 성취하는 불굴의 ‘도전정신’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지역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 교류의 물꼬를 트기위해 죽의 장막을 헤치고 나간 이들의 저돌적 행동은 황금의 엘도라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성취를 통해 예술의 권리를 회복하고자, 스스로 설정한 좌표의 확인에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꿈이 있었다. 공략의 목표가 존재했고 행동의 지향점이 분명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거대한 두 산 사이에 존재하는 골짜기를 향해 진군하는 아방가르드 전사의 기개를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칠판 위에 무수히 뭔가를 백묵으로 쓰고 지우는 문약하고 약삭빠른 부류들과는 태생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왔다. 6년이란 1990년대의 공간을 살다 내파한 ‘컴아트 그룹’이 주는 교훈은 바로 이 점에 있다. 이들이 보여준 ‘전위적 급진성’은 진정한 가치의 기준이 무너져버린 이 시대에 다시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될 덕목임에 분명해 보인다. 그들이 가슴 속에 품었던 ‘동의 꿈’을 찾기 위해서는.  

 <미술사학연구회 세미나 기조발제문, 2017>



-----------------------------------------------------------------------------------------------------------------------
22) ‘컴아트’는 소통을 의미하는 ‘communication’과 예술을 뜻하는 ‘art’의 합성어이다. 이 그룹은 1990년 1월 1일 당시 수원에 거주한 이경근, 김석환, 황민수, 허종수, 홍오봉, 최병기 등 30대 초반의 젊은 실험미술 작가들이 주축이 돼 결성한 것이다. ‘대중과의 소통’과 ‘기존 예술형식의 부정’을 모토로 수차례에 걸쳐《교감예술제》를 개최하는 등 수원에 전위예술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슈룹(Shroop)’은 우리말로 ‘우산’을, 산스크리트어로는 ‘높은 곳에서 전체를 조망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그룹 역시 1990년에 김성배, 이윤숙, 도병훈, 전원길, 강성원, 안원찬을 주축으로 결성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특정한 조형이념이나 고정된 규율을 강제하지 않는 것’이 이 그룹의 특징이다. ‘슈룹’의 활동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하고 우선 이 글에서는 논지에 맞춰 ‘컴아트 그룹’의 중국 북경과 연계된 활동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23) ‘컴아트 그룹’의 6년간에 걸친 치열한 활동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그것은 그것이 아니다전》에 수록된 나의 글「꿈과 열정,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 : 결성에서 해체까지-컴아트 그룹 6년의 활동 전말기」를 참고하라.  
24) 김석환의 회고. 김석환과의 전화 인터뷰(2017. 7. 21). 
25) 일본 작가들이 컴아트 그룹과 함께 북경 전시에 참가한 것은 이듬해인 1994년이었다. 한편, 『경향신문』 1992년 8월 27일자 문화면 기사는 「중국미술 잇단 서울 나들이, 수교타고 한중교류전 러시」라는 제하에 “호암미술관의 중국 고궁미술관 소장품전을 비롯하여 월전미술관, 동산방, 진화랑 등 국내 유수의 화랑들이 한중교류전을 각각 기획, 풍부한 가을 시즌을 예고하고 있다”며 당시 한국 미술계에 기류를 형성하기 시작한 중국 미술 특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26) 베이징 민생미술관의 부관장인 구어샤오엔의 글에 의하면 가오밍루(高名潞) 기획의《중국미술전》이 중국 정부의 탄압을 받아 전시중단이란 사태를 낳은 직접적인 원인은 작가들이 전시 개막일에 행한 일련의 행위예술에 기인하기도 했지만, 직접적인 빌미를 제공한 것은 샤오루(Xiao Lu, 肖魯)와 탕송(Tang Song, 唐宋)이 전시개막식에서 벌인 ‘총기발사사건’ 퍼포먼스였다고 한다.   구어샤오엔,「약술 : 1976-1995년 중국 아방가르드 미술」,『an other avant-garde china-japan-korea』(Project 1 부산비엔날레 도록), p. 31.
27) “1993년 ‘닭의 해’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은 1월 5일 0시, 수원의 중심가에 위치한 장안문에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사모관대를 비롯한 자유분방한 복장을 한 이들은 젯상(祭床)을 진설하고 출문제의(出門祭儀)를 거행하기 시작했다. 젯상의 한 가운데에는 T.V모니터가 설치되었고, 거기에는 장안문(長安門)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비쳐졌다. 수천 년 전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문명과 문화의 전래경로를 거슬러 올라가기 위한 첫 출발의 의식인 셈이다. 대표인 이경근에 의해 제문이 낭독되고, 참여작가 전원의 신고를 알리는 절이 행해졌다. 이들이 중국에 입국하기 위해 행선지를 인천항-천진-북경 간의 수로와 육로를 택한 것은 일종의 역사적인 탐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국문화와 중국문화 간의 ‘근친적(近親的)’ 접근을 꾀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가교가 되는 셈이다.      
1월 6일 0시, 인천과 천진을 오가는 정기여객선의 선상에서 행해진 하나의 퍼포먼스는 이 행사가 갖는 의미에 상징성을 더하는 것이었다. 대표인 이경근이 참여작가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소지(燒紙)를 올리고, 행사개요가 입력된 디스켓이 든 투명 플라스틱 용기를 서해 바다에 수장(水葬)시키는 것으로 끝을 맺는 이 일련의 퍼포먼스는 행사전체를 이벤트(사건)化하려는 이들의 실험정신이 엿보이는 부분이기도 했다.”   
윤진섭, 「성곽도시의 전통건축과 관광자원 활용, 수원국제비엔날레」,『가나아트』( 1994년 1.2월호, p.61).
28) 윤진섭,「꿈과 열정,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 : 결성에서 해체까지-컴아트 그룹 6년의 활동 전말기」,《그것은 그것이 아니다전》(수원아이파크미술관, 도록), p .37. 
29) “한중일 전시를 얼마 앞두고 북경에 갔더니 한국에 있을 때 약속했던 사안들이 하나도 실행에 옮겨진 게 없었다. 무엇보다 전시장 확보가 문제였다. 전시장 없이 어떻게 행사를 치룰 것인가? 고민하던 차에 한국으로 연락, 김영광 의원의 도움을 받았다. 마침 북경 주재 한국 대사가 엣날 김영광 의원의 부하였다. 그래서 김의원이 연락, 대사의 주선으로 수도사범대학과 접선이 되었다. 대학 측에서 마침 전시장으로 쓰고 있던 공간에 ‘수도사범대학미술관’이란 간판을 걸어주어 무사히 전시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그렇게 해서 일이 풀렸다.” (김석환과의 전화 인터뷰, 2017. 10. 15.)     이와 관련하여 1994년 수도사범대학미술관에서 열린 한중일 전시《지금, 동(東)의 꿈(蒙)》전의 일본측 커미셔너인 우에다 유조의 술회는 이때 겪었던 심리적 고충이 어떠했는지 당시 상황의 이해를 위해 여기에 인용한다. ; “1994년 10월, 나는 베이징의 수도사범대학미술관(首都師範大學美術館)에서 중국, 한국의 친구들과 함께《중국ㆍ국제교감예술제-중국, 한국, 일본》(지금 동(東)의 꿈(夢)》전시와 동일한 전시임. 이 당시 우에다 유조는 리플릿을 직접 제작했는데 거기에 한문과 영문으로 ‘지금, 동의 꿈’을 표기했으나 여기서는 하나만 적었음. 필자 주)을 기획했다.....(중략)......당시 우리는 참여 작가와 함께 나리타공항에서 베이징 공항으로 작품을 수화물로 운반하여 전시를 했다. 베이징 출입국관리소에서 짐검사를 하는데 일본의 하치야 카즈히코(八谷和彦)의 <시청각 교환 머신>이라는 작품의 도청기 등의 기자재가 스파이 행위에 위배되는 바람에 나는 세관에 붙잡히고 여권을 빼앗긴 경험이 있다. 나는 정치적 불온분자, 위험분자로 여겨져 신원증명을 요구받았다. 함께 베이징공항에 도착한 친구들을 먼저 세관 밖으로 보내고, 나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일본대사관에 연락할 수 있도록 친구를 대기시켰다. 캐리어 속에는 도청기와 닮은 기계부품들과 함께 일본 공항에서 산 마일드세븐 담배를 100갑 정도 실어서 그 담배를 베이징의 세관원에게 건네주고 통관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는 긴급사태를 예측해 일본에서 가져온 수도사범대학미술관의 관장의 사인이 들어간 초청장을 제출하고 세관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사실 그 미술관의 초청장은 워드로 작성된 한자만 있는 초청장으로 (심지어는 비닐을 끼워서 복사했으며) 마치 베이징으로부터 팩스로 보내진 것처럼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해서 가독성이 떨어지도록 초점이 어긋나게 작성한 초청장이었다. 즉 ‘공문서위조’로 멋지게 보이는 ‘미술관으로부터의 초청장’이었다. 나는 베이징 공안에서 어려움 없이 빠져나와 무사히 공항을 나올 수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중국, 한국, 일본의 그룹전이 개최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수도사범대학미술관에서는 중국의 리시엔팅(Lixianting 栗憲庭), 한국의 윤진섭, 일본의 타니 아라타(谷新), 미나미시마 히로시, 그리고 중국의 조선족인 윤길남 미술평론가와 함께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그러나 겨우30분밖에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중국공안부로부터 중지명령을 받게 되었다.”   
우에다 유조, 「보편적인 예술의 역사」,『an other avant-garde china-japan-korea』(Project 1 부산비엔날레 도록』pp. 142-3). 참고로 이 전시에 참가한 한중일 3국의 작가명단은 다음과 같다.   중국:왕루엔(王魯炎), 왕광이(王廣義), 왕지안웨이(汪建偉), 구더신(顧德新), 왕유신(王友身), 웨이광칭(魏光慶), 리용빈, 송똥(宋冬)   한국:이승택(李升澤), 이경근(李勁根), 김석환(金錫煥), 황민수(黃敏秀), 최효원(崔孝媛), 안영준(安泳俊), 최필규(崔弼圭), 최준걸(崔俊傑), 박창식(朴昌植), 김 중(金 中)   일본:우에다 유조(上田雄三), 미사와 겐지(三澤憲司), 아베 마모루(阿部 守), 니시 마사키(西雅 秋), 곤도 토시노리(近藤等則), 다카하시 칸(高橋 寬), 미야마에 마사키(宮前正樹), 하치야 가즈히코(八谷和彦), 시부야 히로유키(涉谷浩之)   
1994년 10월 25일 오후 4시부터 북경 수도사범대학 세미나실에서 있었던 학술심포지엄에 참가한 발표자명단은 다음과 같다. 
중국:리시안팅(栗憲庭), 구시안팡(顧丞峰), 시안지지안(錢志堅), 한국:윤진섭(尹晋燮), 김진숙(金眞淑), 일본:타니아라타(谷 新), 미나미시마 히로시
30) 우에다 유조, 위의 책, p. 143. 
31) 발상 면에서 보자면 황민수의 이 퍼포먼스는 자금성을 향해 중지(中指)를 치켜세우고 찍은 아이 웨이웨이(Ai Weiwei)의 작품 <원근법 연구(A Study of Perspective)>(19995-2002) 보다 2년 정도 빠르다. 
32) 홍오봉, 필자에게 보낸 메시지 중에서. 2017. 10. 15.
33)  그러나 그나마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당시의 해프닝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당시『공간』을 제외하고 변변한 미술잡지가 없던 상황에서 이러한 언론매체들이 없었다면 이 부분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는 매우 빈약했을 것이다. 미술사가 조수진의 연구에 기대면 1964년 창간된『주간한국』을 필두로『선데이 서울』,『주간경향』,『주간여성』등 본격적인 주간지 시대가 열리면서 해프닝에 대한 대대적인 취재가 이루어졌다. “<제4집단>은 이처럼 가히 ‘주간지의 시대’로 불릴만한 언론 환경에서 등장해, 주간지 기자들의 주요 취재 대상이 되면서 대중오락 잡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조수진)할 수 있었는데, 이는『공간』을 비롯한 주류 미술언론이 해야 할 일을 당시 지식인들에게 저급한 매체로 여겨지던 대중지들이 대신한 꼴이 된 셈이다. 당시 정강자나 정찬승에 대한 『선데이 서울』을 비롯한 주간들의 흥미본위의 선정적 보도 내용과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는 조수진의 다음 논문을 참고하라. 조수진,「<제4집단> 사건의 전말 : ‘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국립현대미술관, 2015), pp. 75-102,  


<색인어> 
전위예술(Avant-garde art), 해프닝(Happening), 퍼포먼스(Performance Art), 실험과 도전(experiment and challenge), 겁 없는 전사들(strong-hearted explorers), 컴아트 그룹(Com-art Group), 도전정신(challenge spirit)        

<참고문헌>  
구어샤오엔,「약술 : 1976-1995년 중국 아방가르드 미술」,『an other avant-garde china-japan-korea』, Project 1 부산비엔날레 도록, 2016, p.31
김미경,「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과 사회-경계를 넘는 예술가들」,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1999년도 박사학위 청구논문, 2000 
레나토 포지올리, 박성진 옮김, 『아방가르드 예술론』, 1996
우에다 유조, 「보편적인 예술의 역사」,『an other avant-garde china-japan-korea』, Project 1 부산비엔날레 도록, pp.142-3 윤진섭, 『글로컬리즘과 아시아의 현대미술』, 사문난적, 2014
윤진섭 외, 『공간의 반란-한국의 입체, 설치, 퍼포먼스 1967-1995』, 미술문화, 1995
윤진섭,「꿈과 열정,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 : 결성에서 해체까지-컴아트 그룹 6년의 활동 전말기」,《그것은 그것이 아니다전》도록, 수원아이파크미술관, 2017
윤진섭, 「성곽도시의 전통건축과 관광자원 활용‘수원국제비엔날레」,『가나아트』, 1994년 1.2월         호, p.61
정강자, 『꿈이여, 도전이여, 환상이여』, 소담출판사, 1990
조수진,「<제4집단> 사건의 전말 : ‘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제7집』,국립현대미술관, 2015, pp. 75-102
Craig Owens, Byond Recognition-Representation, Power, and Cultur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2
Diana Crane, The Transformation of the Avant-Garde, The New York Art World 1940-1985,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and London, 1987
Edward W. Said, Orientalism-Western Conceptions of the Orient, Penguin Book, 1995
John Clark, 'Open and Closed Discourses of Modernity in Asian Art(1993)”, 
Contemporary Art in Asia-A Critical Reader edited by Melisa Chiu and Benjamin Genocchio, The MIT press Cambridge, Massachusetts London, England, 2011
Michael Kirby, Happenings-scripts and production by Jim Dine Red Grooms Allan Kapraw Claes Oldenburg Robert Whitman, Newyork / R.V Dutton & Co., Inc. 1966  

<도판목록> 
도판1. 해프닝, 한강변의 타살, 1968
도판2. 가두시위, 무동인과 신전동인, 1967
도판3, 투명풍선과 누드,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1968
도판4, 컴아트 그룹, 작업일지전, 팜플릿, 1990
도판5, 컴아트 그룹, 장안문에서 천안문까지전 도록표지, 1993
도판6, 홍오봉, 나는 누구인가?, 1993
도판7, 김석환, 한국과 중국의 대화, 북경 자금성, 1993
도판8, 한중일 3국의 작가들이 전시장 입구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 장면, 1994
도판9, 박이창식과 황민수의 즉흥 퍼포먼스, 북경 만리장성, 1994
도판10-1, 황민수, 원근법-몸의 확인, 북경 자금성, 1993
도판10-2, 황민수, 원근법-몸의 확인, 북경 자금성, 1993
도판11, 컴아트 그룹 동경전 전단지, 1995                            


국 문 초 록

 세계는 지금 자국(自國)의 이익을 좇아 빠른 속도로 재편되는 과정에 있다. 최근 들어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더욱 거세지고 있으며, 가공할 힘을 지닌 국제 금융자본의 무차별적 침투는 약소국의 삶의 질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아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이 재음미되어야 할 당위성은 경제와 정치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바로 이러한 세계 판도의 변화와 관계가 있다. 무엇보다 문화와 예술이 경제와 정치에 예속돼 가는 현상은 더 이상 분석의 고삐를 늦출 수 없는 시급한 사안이다.    차제에 아방가르드 미술이 다시 논의되어야 할 가장 큰 이유는 예술이 자본에 종속돼 가는 징후가 더욱 짙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여파로 미술시장은 서구로의 쏠림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바, 비록 중국이 부상 중에 있지만 이는 상대적으로 아시아의 힘의 약화로 풀이된다. 미술의 경우, 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아트 페어, 옥션, 미술관 등등 각종 제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래와 담함, 공모를 통해 서구 중심의 지배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는 바, 이는 앞서 말한 신자유주의의 물결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한국의 아방가르드 미술은 척박한 환경에서 출발했다. 60년대의 해프닝은 당대의 사회현실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면서 몸으로 저항했지만, 군사정권에 의해 퇴폐와 불온세력으로 몰리면서 4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존속하다가 좌초되고 말았다. 그러나 해외 미술 정보의 부족, 창작 여건의 미비, 대중의 몰이해, 경제적 궁핍 등 어느 모로 보나 좋지 않은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프닝은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특히 60년대의 해프닝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와는 달리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디딤으로써 ‘현실주의’적 특징을 보여준다. 이는 한국의 해프닝을 한낱 서구적 아방가르드 아트의 재탕이나 아류로 본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입장으로 앞으로 더욱 심화시켜나가야 할 부분이다.  

 전위적 관점에서 한국의 행위예술을 다룬 이 글은 소위 ‘논리와 사유’의 시대로 통칭되는 70년대의 이벤트와 ‘융합과 확산’으로 대변되는 80년대의 퍼포먼스를 건너뛰고 90년대 수원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컴아트 그룹>의 전위적 활동에 서술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 이유는 이 그룹에 속한 행위예술가들이야말로 비록 소수에 불과하지만, 60년대 해프닝의 실험적 전통을 계승하여 과감한 도전정신과 급진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90년대 초반 당시 중국은 1949년 정부수립 이후 ‘죽의 장막’이라 부를 정도로 폐쇄된 사회체제를 유지해 왔는데, 그런 정치적 상황을 극복하고 중국과의 교류를 시도한 이들의 용감한 행동은 전위의식의 발로라는 점에서 되새겨볼 충분한 가치와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컴아트 그룹>의 활동이 재음미되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기존의 미술사적 서술이 중앙과 지역 간의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했다는 사실에 있다. 25년 전에 수원이라는 지역에서 일어난 이 그룹의 활동 전체를 아방가르드 운동으로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그 중에서 김석환, 이경근, 홍오봉, 황민수, 박이창식 등 행위예술가들이 보여준 아방가르드적 행동은 소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졌다.  

 아방가르드 아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환되는 예술의 분야이다. 세계가 위기에 부딪쳤다고 판단될 때 아방가르드는 긴급제기의 형식으로 재소환돼 음미되고, 분석되어지며 새로운 위치 찾기의 시도가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시도의 이면에는 그것이 지닌 견제구로서의 탁월한 기능이 감춰져 있다. 이른바 세계를 지키는 파숫꾼으로서 아방가르드의 전사들은 호전적인 자세와 정의에 대한 불굴의 정신으로 인간정신을 일깨우는 역할을 자임해 왔던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아방가르드 아트에 대한 관심과 보다 심화된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