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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역사와 비평 (1)

윤진섭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역사와 비평
윤진섭(전 호남대 교수)
 
Ⅰ. 글을 열면서  최근 들어서 아시아1)의 미술에 대한 연구와 전시기획이 부쩍 활기를 띠고 있다2). 그 중에서도 특히 아시아의 아방가르드 미술에 대한 관심은 이의 핵심을 이룬다. 이처럼 아시아에서 아방가르드 미술에 대한 관심이 점증하는 이유는 여럿을 들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무엇보다 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금융자본과 상업주의의 횡포 때문이다.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의 세계적인 팽창과 자본의 무차별적 침투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아시아 제국의 문화적 정체성은 물론 아시아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술의 경우에 있어서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가 제3세계에 가한 폐해를 은유적으로 표현, 주제로 다룬 전시는 1998년에 열린 《제24회 상파울루비엔날레》이다. 당시 예술감독인 파울로 헤르켄호프(Paulo Herkenhoff)는 ‘식인풍습과 역사의 핵으로서의 카니발리즘(Antropofagia and Histories of Cannibalism of the Núcleo Histórico)’3)을 주제로 내 세웠다. 그는 비엔날레라는 예술행사를 통해 사람이 사람을 먹는, 문명인의 입장에서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야만적으로 보이는 식인풍습을 미술의 입장에서 해석하고자 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선진국들의 세계 금융지배는 바로 이와 같은 식인 행위에 빗대볼 수 있다. 근대에 들어와서 벌어진 이른바 서구문명의 동양지배, 즉 서세동점은 언어의 의미론적 차원에서 볼 때 ‘서양이 동양을 먹은’ 것에 다름 아니다4). ‘적자생존’이나 ‘자연도태’는 다 같이 약육강식의 지배원리를 설명해주는 생물학적 용어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아시아 미술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강자로 여겨져 온 서양과 약자인 동양, 즉 아시아5) 사이에서 벌어진 다양한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사회적 갈등과 이로 인해 파생된 심리적 상처와 육체적 고통에 대한 치유이자, 서양에 의해 왜곡되고 변형된, 즉 그동안 서양인들의 머릿속에 편견으로 가득 찼던 아시아 미술에 대한 시각을 교정시킴으로써 본연의 상태로 복원시키는 일과 관련된다.6) 여기에는 힘의 균형자가 필요하다. 그것은 『손자병법(孫子兵法)』 중 한 구절을 빌리자면 “남을 알고 나를 알면(知彼知己), 백번 싸워서 백번이기는(百戰百勝)” 전략과 관계가 있다. 서양을 단지 싸워서 이기자는 게 목적이 아니라, 최소한 서양과 대등한 위치에서 담론을 나누는 일, 즉, 산을 깎아서 골을 메우는 평탄작업이 요구되는 것이다.7) 그러나 이런 평화적인 노력에도 역시 싸움은 필수적이다. 이러한 싸움이 필요한 이유는 학문이건 예술이건 인간의 행위는 현실적 토대위에서 전개되고 실천에 옮겨지기 때문이다. 레나토 포지올리(Renato Poggioli)의 말을 빌리면, 그런 행위는, ‘예술사적’ 혹은 ‘미학적’ 측면보다는 오히려 ‘사회학적’ 측면에서 다루어질 성질의 것이다.8) 
 이 글은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짧은 분량의 글에서 60여 년에 걸친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역사를 통시적 관점에서 다루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제한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이 글에서 나는 우선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에 있어서 가장 도전적이고 실험적이며, 저항적인 미술로 간주돼 온 행위예술9)에 대해 1960년대의 ‘해프닝’을 중심으로 거론한 뒤, 이어서 90년대 초반에 결성된 ‘컴아트 그룹(Com-Art : Communication Art의 준말)’의 활동을 중심으로 논의할 것이다. 그 이유는 기존의 한국 현대미술사의 서술이 지나치게 서울 중심으로 편중돼 왔다는 사실에 있다.10) 왜 기존의 한국 현대미술사는 그동안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수원의 미술에 대해 침묵해 왔는가? 정보의 부족 때문인가, 아니면 아예 관심이 없어서인가? 아니면 시기가 아직 미술사가 다루기에는 너무 가까운 과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인가? 이 글은 이처럼 소박한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Ⅱ. 실험과 도전 : 1960년대의 해프닝(HAPPENING)   
 여담이지만 나는 한국의 ‘행위예술’이야말로 세계의 어느 곳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예술이라고 자부한다.11) 이는 작가이자 비평가, 전시기획자로서 40년 이상의 세월을 미술판에서 살아온 현장 경험을 통해 얻은 나의 소감이다.  1950년대 후반의 앵포르멜 작가들이 그랬듯이, 초창기 행위예술가들 역시 궁핍한 상황에서 예술혼을 불태웠다. 50년이 지난 지금의 관점에서 돌이켜 볼 때, 1960년대의 척박한 환경에서 서양을 비롯한 해외미술에 대한 정보의 부족은 역으로 매우 독자적인 ‘해프닝(Happening)’을 낳은 요인이 되었다. 1960년대 중후반 당시 해외미술에 대한 정보의 주된 공급원은 대학 도서관과 명동의 중국대사관 근처 서점에서 파는 『미술수첩(美術手帖)』이나 『미즈에(みづゑ)』,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LIFE』, 『TIME』이 고작이던 시절에, 영어에 익숙하지 못한 대부분의 작가들은 잡지에 실린 도판에 의존하여 작업을 하던 시절이었다.12) 심지어는 당시 해프닝의 기수로 간주된 정찬승(鄭燦勝, 1942-1994) 조차 아예 ‘해프닝’이라는 용어를 몰랐다고 술회한 바 있다.13) 해프닝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도판 몇 장에 의존하여 ‘해프닝’을 짐작, 상상력을 발휘하다보니 예컨대 앨런 캐프로(Allan Kaprow, 1927-2006) 식의 칸막이 구조와 같은 해프닝의 형식이 아닌14), 자유로운 형식, 즉 ‘고정된 형식이 없는 형식(沒形式)’을 해프닝의 특징 아닌 특징으로 갖게 된 것이다. 물론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 걸쳐 나타난 미국의 해프닝도 앨런 캐프로의 <6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18개의 해프닝>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고정된 구조(structure)나 형식이 없었다. 당시의 해프닝은 비단 극장이나 화랑뿐만이 아니라 음악홀, 주차장, 창고, 스튜디오, 거리등지에서 산발적으로 벌어졌는데, 장소와 내용을 둘러싼 이러한 몰(沒)형식적 특성은 곧 현대 퍼포먼스의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도판1>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미국의 해프닝은 미국의 해프닝이고 한국의 해프닝은 한국의 해프닝이란 사실이다. 이 점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가령, 앨런 캐프로의 <Coca Cola, Shirley Cannonball?>과 레드 그룸즈(Red Grooms)의 <The Burning Building>은 미국인의 삶의 방식과 사고, 역사, 현실이 녹아든 작품이다. 반면에 한국의 초기 해프닝인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1967)을 비롯하여 <가두시위>(1967), <한강변의 타살>(1968), <기성문화의 장례식>(1970)에는 그 당시의 사회 현실이 깊숙이 반영돼 있다.  ‘해프닝’이란 용어와 약간의 형식적 유사성을 빼면 그 어떤 작품에서도 미국적인 냄새를 맡을 수 없다. <가두시위>는 국립현대미술관을 짓자는 염원이 담겨 있거나(‘4억의 도박 국립종합박물관’), ‘좌상’만 그리는 ‘국전풍’을 풍자하고 있으며(‘국전파 좌상’), <한강변의 타살>은 ‘문화사기꾼’(문화를 빙자해 돈을 챙기는 사기꾼), 문화부정축재자(문화를 빙자해 부정 축재하는 국전 심사위원)15)를 향해 질타의 예리한 칼을 휘두른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들은 ‘현실주의자(Realist)’였다. 전위의 허울을 쓰고 허공에 붕 떠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을 부르짖거나,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들의 피부에 와 닿는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들의 언어(몸)를 통해 사회적 문제가 지닌 폐해의 심각성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몸은 이들이 지닌 유일한 무기이자 자기표현의 매체였으며, 부패한 사회를 향해 던지는 폭탄이었다. 그들은 과연 자폭이라도 하려들었던 것이었을까?16) 
 이 호전적이고, 기존의 질서에 대해 저항하며, 권력자들에게 도전장을 던진17) ‘겁없는 전사들’18)에 대해 당시 대중이 보인 반응은 한 마디로 경악 그 자체였다. 심지어는 당시 《제17회 국전》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으나, 사전 담합에 의한 심사 부정을 목격하고 심사장을 박차고 나와 이를 폭로함으로써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남관(南寬) 조차 “외국에서는 벌써 쇠퇴되어 가고 있는 일이다. 무시는 못하지만 모방이라면 비평해야 한다. 너무 심한 것 같다. 그렇게까지 할 거야 없지 않은가?”라는 촌평을 남겼다.19) 이는 비록 그가 프랑스 유학까지 한 유명작가였지만 당시 ‘해프닝’이란 첨단의 예술에 대해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르테가(Ortega Y. Gasset)의 말을 빌면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의 발길질’ 즉, 적대감의 발로임에 분명하다. <도판2>, <도판3>     
 아무튼 저항과 도전정신에 가득 찼던 이 ‘이단아들(outsiders)’은 6, 70년대의 어둡고 암울했던 독재의 터널을 지나는 과정에서 ‘문화 테러리스트’의 역할을 자임했다. 나는 최근 몇 년간 이들과 대화를 나눌 소중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는데, 책임연구원의 자격으로 수행한  ‘1960-70년대 한국 행위예술가 구술채록 사업’이 그것이다.20) 여담이지만, 김구림, 성능경, 이강소, 이건용, 이승택, 정강자, 장석원 등 1960-70년대 행위예술의 주역인 이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동안 미술계에 잘못 알려져 있거나, 모호한 사실들을 당사자들의 증언과 자료의 확인을 통해 바로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사업이 얻은 성과이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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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정학적 측면에서 볼 때 아시아의 범위는 논자들의 견해와 입장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가령, 호주의 미술사학자인 존 클락(John Clark)은 아시아를 북으로는 인더스 골짜기에서 사할린 반도까지, 남으로는 인도양과 티모르 해협에 이르는 지역을 지칭하고 있다. (John Clark, 'Open and Closed Discourses of Modernity in Asian Art(1993)”, Contemporary Art in Asia-A Critical Reader edited by Melisa Chiu and Benjamin Genocchio (The MIT press Cambridge, Massachusetts London, England, 2011), p.27.) 반면에 나는 아시아 미술을 다룬 한 글에서 아시아를 일본에서 동남아를 거쳐 인도와 터어키, 그리고 서아시아(중동)에 이르는 지역을 아시아로 지칭한 바 있다. 여기에 호주를 합치면 아태지역으로 그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윤진섭, 「문화의 스밈과 섞임, 그리고 짜임」, 《Rainbow Asia : 세계미술의 진주, 동아시아전》(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2010) 도록 p. 54. 
2) 아시아 미술 및 아방가르드 미술을 주제로 한 대표적인 세미나로는 <아시아 아방가르드 미술(Avant-Garde in Asian Art)>(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2010. 10. 9,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과 한국미술평론가협회가 2005년부터 2015년까지 5차례(2005, 2006, 2013, 2014(AICA 콩그레스의 한 섹션), 2015)에 걸쳐 연 <아시아비평포럼>을 들 수 있다. 한편, 이를 주제로 한 최근의 전시로는 《Rainbow Asia : 세계미술의 진주, 동아시아전》(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2010)을 비롯하여 전북도립미술관 주최의 ⟪아시아 현대미술전⟫시리즈(2015-2017)와 《2016 부산비엔날레》의 Project1 ⟪an/other avant-garde/china-japan-korea⟫(부산시립미술관) 등을 꼽을 수 있다. 
3) 원제는 Núcleo Histórico : Antropofagia e Histórias de Canibalismos
4) 이 ‘먹는다(to eat)’는 행위는 의미론적 입장에서 볼 때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힘의 관계를 뜻한다. 이 말은 아이들의 ‘땅따먹기’ 놀이에서 점령의 뜻으로 사용되며, 경제 분야에서는 예컨대 “CJ가 대한통운을 먹었다(합병했다)”는 표현도 가능하다.  또는 장기나 바둑을 비롯하여 축구, 농구, 배구를 비롯한 각종 운동 경기에서도 이 말은 흔히 쓰인다. 가령 축구에서 “(골을) 한 방 먹었다”거나 “엄마, 오늘 나 금메달 먹었어.“ 등등. 
5) 아시아(Asia)라는 용어는 유럽, 북미, 남미,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와 함께 중성적이며 가치중립적인 개념으로 서양이나 동양보다는 정치적 내지는 문화적 함의가 덜한 편이다. 이는 ‘해가 지는 곳’을 의미하는 서양(Occident)이나 ‘해가 뜨는 곳’을 의미하는 동양(Orient)과는 달리, 지배와 종속의 관계에서 오는 심리적 트라우마가 비교적 적다. 한편으로 보면 서양의 입장에서 볼 때 동쪽에 있는 땅을 가리켜 ‘동양(East)’으로 부르고, 반대로 동양의 입장에서 볼 때 서쪽에 있는 땅을 가리켜 ‘서양(West)’으로 부르는 것도 공평하고 타당한 듯 보이나, 문제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도 지적하고 있듯이, 이 말은 18세기 후반 이후 서양의 동양에 대한 편견과 동양인에 대한 서양인들의 우월 의식을 조장하는데 한몫을 했다. 한 마디로 그것은 “동양(Orient)을 지배하고, 재구축하고, 그것에 대해 권위를 갖는”, 다시 말해 학문과 예술을 비롯하여 철학, 경제, 교육, 행정 등등 인간 활동의 전 분야에 걸쳐 역사적으로 형성돼 온, 서양이 동양을 바라보는 뿌리깊은 관점이자 서양인이 정교하게 체계화시킨, 말하자면 서양의 총제적인 담론 스타일인 것이다. Edward W. Said, Orientalism-Western Conceptions of the Orient, (Penguin Book, 1995), p. 3.    
오리엔탈리즘을 둘러싼 제반 논의와 아시아 미술에 대해서는 필자가 쓴 다음의 글들을 참고할 것.「아시아의 풍경을 찾아서」,「속(續)) 아시아는 불타고 있는가?」,「아시아 미술의 현황과 미래적 비전」등등, 특히 아시아 미술의 비전에 대해서는 필자와 홍가이 박사가 나눈 대담 「아시아 미술의 중흥과 미래적 전망」을 참고하라. 이 글들은 졸저『글로컬리즘과 아시아의 현대미술』(사문난적, 2014)에 수록돼 있다.     
6) 해석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가령 상파울루비엔날레의 헤르켄호프 감독이 제시한 주제의 키워드인 ‘카니발리즘’을 후기식민주의의 관점에서 해석한 태국의 미술사가 아피난 포샤난다(Apinan Poshananda)의 관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인육을 먹는 ‘카니발리즘’을 경제적 관점에 빗대어 해석했다. 즉, 사람의 고기를 먹는 행위를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적 금융기관이 아시아의 통화에 가하는 공략이나 약탈”에 비유한 것이다. 윤진섭, ⌜상파울루비엔날레에 관한 소고⌟ 『국립현대미술관 논문집 제13집』, (국립현대미술관, 2003). 졸저, 『글로컬리즘과 아시아의 현대미술』, (사문난적, 2014, pp. 202-3).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육을 먹는 행위가 벌어지는 현장이 다름 아닌 카니발이라는 사실이다. 알다시피 카니발은 축제의 한 형식이다. 춤과 노래, 시각적 조형예술이 한 마당에서 어우러진 한 판의 축제를 통해 이제까지의 잘못된 일을 반성하고 보다 희망에 찬 미래로 나아가는, 빅터 터너(Victor Turner)의 잘 알려진 용어를 빌면, 문턱(threshold)을 넘는 ‘리미널(liminal)’한 순간이 바로 축제와 제의의 현장인 것이다. 카니발에서 인육을 먹는 행위의 기원이나 이유는 설이 분분하지만, 축제와 제의가 지닌 정화(淨化)의 기능을 상기해 볼 때 일종의 상징적 의미가 크다. 이 카리브가 카니발이 되는 단어의 변천에는 카리브 해의 식인종족인 카리브족을 스페인 인(人)의 시각에서 재단한 정복자적 시각이 담겨있다. ‘이름을 붙이기 좋아하는(nominophiliac)’는 유럽인들의 취미와 연관시켜 볼 때 이러한 행위는 소유와 동일한 의미로 간주되며, 이는 곧 ‘타자를 시각화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Craig Owens, Byond Recognition-Representation, Power, and Cultur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2). p. 286.    
7) 이러한 작업에는 무엇보다 항상성이 요구된다. 꾸준한 연구와 토론, 담론의 생성 등 학문적인 성취와 업적은 물론, 예술현장에서 벌어지는 서양의 교묘한 책략과 전술에도 담대하게 대응해 나가는 불굴의 자세가 필요하다. 가령, ‘베니스비엔날레’나 ‘카셀도큐멘타’와 같은 서구 중심의 미술행사에서 아시아의 작가들은 여전히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최근에는 다소 개선된 측면이 있지만 그래도 그 이면에는 여전히 서구중심의 패권주의적 시각이 도사리고 있다)을 주목하라. 이는 명백한 ‘전시성 끼워넣기’가 아닌가? 반대로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한 아시아의 비엔날레에는 서구 작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현실은 이러한 평탄작업을 게을리 하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꼴이다. 오늘날 한국의 미술계에 만연돼 있는 학문과 예술의 사대주의는 그 뿌리가 매우 깊기 때문에 이의 극복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8) 이와 관련하여 레나토 포지올리가 예로 드는 파레토(Pareto)의 ‘잔여물(residui)’ 개념은 흥미로운 관점을 시사해 준다. 파레토에 의하면 인간행위가 지닌 ‘비합리성’과 관련된 잔여물은 여섯 개의 성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결합의 본능, 집단 추대, 외부적 표출 욕구, 사회성, 개인성, 성적 욕구’ 등이 그것이다. 파레토는 “인간은 이 비합리적인 성격의 잔여물들 위에서 수많은 신념체계를 구축한다.”고 보았다. 레나토 포지올리, 박상진 옮김, 『아방가르드 예술론』, (문예출판사, 1996), p. 21. 예컨대 인간의 행위는 가장 이성적이며 합리적이어야 할 학문과 전시기획, 비평 등의 영역에서조차 이러한 잔여물들의 영향 때문에 비합리적이며 반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게 될 위험에 처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인간행위를 결정하는 수많은 변수들 간의 상호의존적 양상”(Pareto) 때문에 집단적인 패거리 문화와 따돌림, 게토와 같은 현상들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비단 미술의 경우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정치현장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나타나는 광범위한 현상이다.     
9) 퍼포먼스(performance art)에 해당하는 용어로서 행위미술(行爲美術)과 유사한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행위예술은 미술을 비롯하여 무용, 음악, 연극, 마임, 의상 등 장르간의 혼융현상이 나타난 1980년대 이후의 경향을 지칭한다. 1980년대에는 퍼포먼스와 행위예술 혹은 행위미술이라는 용어가 혼용되었다. 그러나 행위예술이건 행위미술 혹은 퍼포먼스건 간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동일한 개념으로 봐도 무방하다.   
10) 미술사 분야의 이런 편중된 관점과는 달리 일찍이 1980년대부터 몇몇 미술잡지들은 지역미술에 대한 조명작업을 해 왔다. 『공간』은 1983년 10월호부터 대구를 시작으로 ‘미술거점도시’를 연재하기 시작해서 부산(1983년 11월호), 전주(1983년 12월호), 광주(1984년 1월호) 등 지역의 대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술현장을 소개하였으며,『미술세계』또한 80년대 중반부터 <이즘과 그룹>, <지역문화의 검증> 시리즈를 통해 전국에 산재한 도시 미술을 다룬 바 있다. 1990년대 초반에 금호미술관은 ‘미술문화의 중앙집중화’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지역의 작가들을 선정하여 서울에 소개하는《지역미술전》을 지속적으로 개최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1970년대 이후의 한국현대미술을 주제로 한 논문들이 미술사학계에서 발표되고 있는 현상에 비쳐볼 때, 지역미술에 대한 미술사학계의 관심은 여전히 미흡하다 할 수 밖에 없다. 아방가르드 미술과 관련해서 살펴보면 현대미술의 거점도시로 알려진 대구를 비롯하여 대전, 공주, 수원은 눈여겨봐야 할 곳이다.    
11) 최근 들어 한국의 행위예술이 연이어 해외에 소개된 일은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오랜 기간 ‘아웃사이더’로 냉대를 받으며 살아온 몇몇 원로 작가들에게는 ‘아방가르디스트’로서 과거 도전과 반항을 일삼던 저항적 삶에 대해 미술계에서 헌정한 훈장이랄 수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걸친 한국의 행위예술이 서구 미술계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김구림은 영국 테이트모던미술관이 주최한《A Bigger Splash : Painting after Performance>(2012. 11. 14-2013 4. 1)에 이강소와 함께 초대를 받았는데, 이 전시는 1950년대 이후의 미술사에서 나타난 회화와 퍼포먼스 간의 영향관계를 잭슨 폴록, 니키 드 생팔, 신디 셔먼, 조지 앤 길버트 등의 작품을 통해 살펴보는 전시였다. 김구림의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는 이 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이승택 역시 최근 들어 부쩍 국제적인 조명을 받고 있는 원로작가이다. 테이트모던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기도 한 그는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와 인터뷰를 갖는가 하면(Flash Art 2013년 1-2월호), ArtasiaPacific 2010년 7-8월호의 표지작가로서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특집이 게재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이강소, 이건용, 성능경 등 1세대 행위예술가들에 대한 국제 미술계의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이들에 이어서 행위예술 2-3세대들의 작품세계는 해석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아직 ‘채굴되지 않은 광맥’이며, 오염되지 않은 진귀한 버섯의 ‘군락지’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책을 참고하라.    윤진섭,『행위미술 이야기-윤진섭과의 대화』, 대담 이혁발, (사문난적,2011). 윤진섭,『행위예술의 이론과 현장』, 진경, 2012.
12) 김구림 회고,『해프닝과 이벤트:1960-70년대 한국의 행위예술』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문화아카이브 보고서4, ACC, 2017, p. 16. “어느 날 책방에 가니까 한쪽 구석 바닥에 무슨 잡지 쪼가리 같은 게 쌓여 있더라고. 그래서 이거는 뭔가 하고 말이지, 들척거렸더니 전부 다 영어로 돼 있는 건데. 어니 거기 보니까 뭐 바닥에다가 질질 흘리고 다니는데 세계적인 작가고 말이야(잭슨 폴록을 가리킴. 필자 주). 뭐 막 희한한 게 나오더라고. 그래서 이게 뭔가 하고 말이지. 표지를 보니까 『라이프』지야. 그래 가지고 그때 이제 서점 주인한테 이거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 했더니 이거는 우리나라에는 수입도 안 되고 미군들이 보고 미군부대에서 버린 걸 자기들이 끌어와 가지고 갖다 놨다 이러는 거야......(중략)......그 다음에 보니까 『타임』지도 그런 게 나오더라고.....(중략).....그 당시에 벌써 나는 세계 현대무용가 말이지. 머스 커님햄(Merce Cunningham)이라는 사람이 있었고, 이런 것까지 내가 다 알게 된 거야. 그래서 예를 들어서 머스 커닝햄 같은 같은 사람은 말이지, 어느 날 기사가 실린 걸 보니까 고압선 밑에서 혼자 고압선 주위를 빙빙 돌아다니면서 ”이것은 무용이다.” 이런 소릴 하는 거야. 무용이라면 그냥 춤추는 걸로만 생각했거든. 무대 위에서 조명 비춰가지고, 이 기가 막히는 게 내 가슴을 확 때리는데 말이지. 근데 보통 사람 같으면 그런 거 보고 ”이게 뭐야” 하고 웃었을 텐데, 나는 그런 것들이, 그런 걸 볼 때마다 가슴이 날 때리고 용솟음이 치는 거야. 뭐든지.”   
13) 정찬승과 금누리와의 대담,『보고서 보고서 6호』(주/안그라픽스, 1991). p.38.     “금 ; 서울에서 한 것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정 ; 정강자와 세시봉 미술관(음악싸롱의 착오임 : 필자 주)에서 68년 쯤에 한 것. 제목은 ‘투명풍선과 누드’로 정강자를 모델로 썼다. 그때는 해프닝이라는 말을 우리는 몰랐는데 신문 기자들이 알란 카플로를 알고 그런 말을 썼다. 빛과 누드와 소리와 풍선이 있는 작품이었다. 해프닝이라는 말은 프랑스에서도 썼다. 뉴욕에서 나온 말인데 그 당시 서울 평론가들은 모르고 있었다. 외신부 기자들이 더 빨랐다.“ 
14) Allan Kapraw, <18 Happenings in 6 Parts,>(1959),《Happenings-scripts and production by Jim Dine Red Grooms Allan Kapraw Claes Oldenburg Robert Whitman written and edited by Michael Kirby》(New York / E. p. Dutton & Co., Inc. 1966) pp. 44-83. 앨런 카프로의 이 작품은 지시문을 받은 관객들이 비닐과 각목을 이용, 칸막이가 처진 공간 안에 들어가 행위를 하는 일종의 관객 참여형 해프닝이었다.      여기서 잠깐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만일 이 때 영어에 능통한 한국의 어느 작가가 마이클 커비의 『Happenings』을 읽고 미국의 해프닝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가정하면, 그/그녀는 캐프로의 칸막이 구조를 모방하여 유사한 형식의 작품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그녀는 지문이 찍힌 카드 모양의 지시서를 관객들에게 나누어 주고 감자튀김을 요리하게 할 수도 있고, 남대문시장의 미제물건 상점에서 초콜렛이나 버터를 사서 관객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그러한 행위는 서구 모방의 혐의로부터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15) 여기서 <가두시위>에 등장한 구호들은 작가들이 시위를 할 때 손에 든 피켓에 적힌 내용들이며, <한강변의 타살>에 나오는 단어들은 제2한강교 교각 부근에서 해프닝을 벌인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이 어깨에 두른 녹색 비닐 띠에 흰색 페인트로 쓴  것이다. 
16) 1960-70년대 당시 활동한 1세대 행위예술가들 중에서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은 김구림, 김용민, 이건용, 이승택, 이강소, 성능경, 장석원 등이다. 강국진(1939-1992), 정찬승(1942-1994)은 이미 이십 여 년 전에 작고했고, 정강자(1942-2017)는 최근에 세상을 떴다. 그러나 비록 몸은 이곳에 없을지라도 이들이 이룬 업적과 행적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미술사의 지평에 다시 떠오르며 후학들에 의해 소환된다. 평생을 보헤미안으로 산 정찬승은 한국적 히피의 전형(서양화가 김령의 평)으로 프랑스와 미국을 전전하다 생을 마감했지만, 한국미술사에서 저평가된 작가들 중 3위를 차지한 바 있으며(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앙케트), 강국진은 최근 다시 부상하는 중에 있다. 정강자는 《한국실험예술제》에 몇 번 소환된 적이 있지만, 끝내 예전의 열정과 페이스를 회복하지 못했다. 차제에 나는 지금부터 20여 년 전에 했던 다음과 같은 질문을 이 자리에서 되새겨 보고자 한다.     “이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초기의 그룹 동인 중 대다수는 왜 실험을 그쳤는가? 60년대의 작업과 오늘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한 시기 동안만 활동하고 사라진 작가들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내려질 것인가? 삶과 예술이란 제도 사이에는 어떤 경계가 존재하는 것일까? 이미 작업을 그친 작가의 작품에 대한 당대의 평가와 오늘의 평가 사이에 존재하는 판단의 근거는 무엇인가?” 윤진섭,「전시를 기획하며」,『공간의 반란-한국의 입체, 설치, 퍼포먼스 1967-1995)』,(미술문화, 1995)  p.17. 
17) 아방가르드가 미학보다는 사회학에 보다 깊이 연루된 개념이라는 레나토 포지올리의 통찰은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을 염두에 둘 때 더욱 선명해진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작가는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와는 별도로 때로는 사회적 개선이나 체제의 변혁에도 눈감을 수 없는 충동과 갈등을 느낀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전위적 파이어니어로서 이들이 보여준 일종의 ‘행동예술’로서의 해프닝이 정당화될 수 있다. 당시 이들이 보여준 과격한 행위들은 언론을 통해 전해져 당시의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일종의 깡패일 것이다. 어쭙잖은 발언권의 과시이며 욕구불만의 발산이다. 그들은 그냥 내버려두면 정신병자가 되어 입원하든지 자살하고 말 것이다.”(동국대 이기영 교수), “날씨도 추운데 이 무슨 미친 짓이냐?”(관객)(정강자,『꿈이여, 도전이여, 환상이여』, (소담출판사, 1990, 51-2)에서 인용)와 같은 극단적인 대중의 반응은 거꾸로 ‘예술작품이 미친 사회적 충격’이란 관점에서 볼 때, 아방가르드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을 돋보이게 한다. 그것은 해프닝이라는 ‘예술적 혁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을 담지한 아방가르드의 개념은 다양한 ‘예술사회학적 쟁점들’을 도출시킨다.    Diana Crane, The Transformation of the Avant-Garde, The New York Art World 1940-1985,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and London), 1987, pp. 11.   
18) 이 용어는 원래 1990년대 초반에 수원을 중심으로 전개된 컴아트 그룹의 행위예술가들(김석환, 이경근, 박이창식, 이경근, 홍오봉 등)에 대해 내가 붙인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이 주최한《1980-1990년대 수원의 실험미술-그것은 그것이 아니다》(2017. 6. 6-2017. 9. 3, 수원시립미술관 1, 2 전시실, 기획 : 신은영)의 도록에 실린 나의 서문「꿈과 열정,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 : 결성에서 해체까지-컴아트 그룹 6년의 활동 전말기」를 참고할 것. 그리고 일단의 행위예술가들에게 붙인 이 ‘전사들’이라는 호칭은 다시 올해 내가 기획한《한국 행위예술 50주년 기념 자료전 실험과 도전의 전사들》(KIAF 2017 ART SEOUL 특별전: 2017. 9. 21-24, COEX HALL)에서 ‘실험과 도전의 전사들’로 이어졌다. 참고로 한국 행위예술 50년을 다양한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회고한 이 전시의 리플렛에서 나는 한국 행위예술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4개의 범주로 구분한 바 있다. 제1기, 한국 행위예술의 태동기 : 실험과 도전(1967-70), 제2기. 한국 행위예술의 정착기 : 논리와 사유(1971-80), 제3기. 한국 행위예술의 확산기 : 융합과 충돌(1981-99), 제4기. 한국 행위예술의 국제화 : 상승과 교류(2000-  ). 한국 행위예술에 대해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구성한 이 전시는 보다 확대되어 내년 1월 말에 대구미술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19) 정강자, 앞의 책. 같은 페이지. 여기서 <한강변의 타살>과 남관의 국전 심사부정 폭로사건이 같은 해(1968)에 일어났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 2014년부터 16년까지 3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국립 아시아 문화의 전당 정보원 주최의 사업임. 참여작가는 다음과 같다. 김구림, 성능경, 이강소, 이건용, 이승택, 정강자, 장석원, (김복영 : 평론)      이미 고인이 된 강국진, 정찬승의 경우에는 자료 수집의 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는 아쉬움을 남겼다. 한편, 이 사업의 성과 중 하나는 그동안 행방불명으로 알려졌던 김용민을 우여곡절 끝에 충남의 모 정신병원에서 찾아낸 일이다. 70년대에 ‘이벤트’와 오브제를 중심으로 한 개념미술의 전개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그의 작품들은 그러나 매우 아쉽게도 대부분의 작품이 산실되어 독창적인 그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 문제는 다음 기회에 구체적으로 거론하고자 한다.    
21)다음의 예는 본 구술채록사업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미술사에서 사실을 규명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져 여기에서 잠시 거론하고자 한다. 최근에 언론을 통해 쟁점이 된 주영 한국문화원 주최의《REHEARSALS from the Korean Avant-garde Performance Archive전》(2017. 7. 27-8월 19)은 사실(fact)의 문제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화원 측은 팸플렛의 내용에 뉴욕의 MoMA에서 발표한 미술사가 고(考) 김미경의 글 「Expressions without Freedom : Korean Experimental Art in the 1960s and 1970s」을 수록했는데, 초대작가 중의 한 명인 김구림이 글에 수록된 일부 내용(1/24초의 의미의 작가 표기)과 전시의 내용에 대해 문화원 측에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중 문제가 된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On July 21, 1969, the day of the satellite broadcast of the lunar landing, Korea's first experimental movie. THe Meaning of 1/24 Second, was released at Seoul Academy music hall. Made by Choi Won-Young(director), Jung Chan Seung, Kim Ku Lim, Jung Kang Ja, and Ban Dae Gyu (cameraman), the film, which is silent, was intended to express the existential conditions of modern life.'(밑줄은 필자))    
언론에 보도된 다른 내용은 차치하고 이 문장만을 놓고 볼 때, 감독이 최원영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 영화가 제작돼 상영된 해인 1969년 10월에 발행된《영화잡지》(한국영상자료원 소장)는 「전위영화의 폭풍이 한국에도-전위영화 감독 김구림씨가 펼치는 얘기들」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두 페이지(94-95)에 걸쳐 싣고 전위영화와 관련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김미경 교수가 어떤 근거와 연유로 김구림이 아닌 최원영을 이 영화의 감독으로 명기했는지 궁금하다. 게다가 김미경의 박사학위 논문에는 <1/24초의 의미>가 분명이 김구림 감독으로 표기가 돼 있지 않은가? 김미경, 「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과 사회-경계를 넘는 예술가들」(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청구논문, 2000), pp. 74-75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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