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사이(間)’와 경계에 서서

윤진섭

‘사이(間)’와 경계에 서서
                      
                                             윤 진 섭(미술평론가)

 미술과 일상, 미술과 제도, 미술의 개념, 미술의 감상 모드, 예술과 비(非)예술 혹은 반(反)예술, 미술과 공공성 등등, 미술 혹은 예술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기존의 관행과 개념에 대해 의문을 품으며 ‘언어 게임(language game)’의 입장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가 바로 권남희이다. 그는 어느덧 자신의 일상이 된 참선(參禪) 수행처럼, 예술을 여느 일상적 행위와 다름없이 대할 뿐, 특별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자신이 지불할 수 있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하루를 생활하는 그에게 있어서 예술은 더 이상 정신적 사치같은 그런 것이 아니며, 항간에 이야기하는 ‘스펙타클’은 언감생심 더더욱 아니다. 그냥 손에 닿는 익숙하며 편한 재료들, 가령 책이라든지 손수건, 옷소매, 그것도 아니면 남이 입고 있는 희고 빳빳한 셔츠의 깃 따위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든다. 그렇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그리고 그러한 의문은 가령 “과연 그것을 일러 예술 혹은 예술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을 낳는다.    
 권남희의 작업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응답의 형태이다. 최근에 아마도 예술공간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A Book +Off Kawara]라는 타이틀로 열린 이번 전시는 책이라는 기존의 형식과 관념(A Book)에 대해, 그리고 이미 고인이 된 개념미술의 거장 온 카와라(Off Kawara)에게 바치는 오마주 형식을 통해 예술과 개념, 그리고 사물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예술적 아이디어를 펼친 좋은 기회였다. 따라서 아마도 예술공간 전관에서 열린 이번 전시는 퐁피두센터 전시장의 흰 벽을 찍은 3점의 사진작품을 포함하여 3부작으로 이루어졌다.  
 이야기를 실감나게 풀어가기 위해 우선 나의 경험을 이야기해야겠다. 전시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이 갤러리를 방문했을 때, 2층의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나를 맞이한 것은 텅 빈 공간이었다. “이건 뭐야. 아무 것도 없잖아?” 나는 속으로 작게 외쳤는데, 좀 더 세심히 공간을 둘러보자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희게 빛나는 네온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책에 적혀있는 페이지 숫자였다. 전시장 전체를 천천히 둘러보니 1부터 11까지 흰색 숫자가 각 방에 하나씩 네온으로 설치돼 있었다. 그리곤 아무 것도 없었다. 말하자면 아마도 예술공간 전체가 한 권의 책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책의 내용은? 유추해서 해석하자면 그것은 아마도 이 전시장을 방문하는 관람객의 경험과 지식, 그리고 전시에 대한 각자의 해석이나 이 전시로 인해 이루어진 각종 에피소드 등이 되지 않을까? 좀 더 폭넓게 해석하자면 아마도 예술공간의 지난 8년의 역사라든지 나아가서는 그 이전에 이 건물에 거주하던 주민들의 삶과 역사까지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 권남희라는 작가가 예술을 바라보는 태도랄지 사물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해석력, 그리고 그의 기민한 상상력이 불러온 ‘쾌거(걸작)’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한 권의 책(A Book)’이라는 전시의 타이틀을 상기한다면, 이처럼 거대하고(건물 전체) 다양한 이야기(관객들의 생애와 스토리, 아마도의 역사 및 그 이전의 거주민의 역사와 이야기)를 지닌 책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권남희는 특유의 ‘군더더기 없애기(사상작업/捨象作業)’을 통해 가장 최소한의 기호(숫자)로 가장 풍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가이다. 여기서 이런 상상이 가능하다. 만약 물리적인 책을 염두에 둔다면, 어느 다큐멘터리 작가가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의 삶이나 건물의 역사에 대해 인터뷰와 리서치를 하여 기록한다면 아마도 수 십 권의 책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이것이 바로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 즉 “하나는 곧 여럿이고, 여럿이 곧 하나인” 세계의 경지인 것이다. 권남희의 이 작품은 책이 지닌, 역사를 포함 온갖 기술(記述)의 허구성을 지적함과 동시에 비트겐쉬타인적 의미에서 말과 글의 진위 판단에 대한 유보를 통해 사물을 ’사물 그 자체‘로 볼 것을 권유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책 작업의 모태는 2007년에 제작한 <번호 그림들>이란 작품이다. 텅 빈 흰색의 캔버스 하단에 적혀 있는 번호를 제외하고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이 연작은 회화에서 ‘그린다’는 행위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기복제’의 관행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역작이다. 회화에서 이미지를 없애는 ‘이미지 사상(捨象)’의 전략은 미니멀 아트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개념미술적 입장에서 권남희의 이 작업은 그 연장으로서의 <A Book> 작업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하얀 벽 사진>(2020)은 흰 벽도 예술이 되지 않을까 하는 오래된 질문을 숙성시킨 작업이다. 퐁피두센터 전시실 벽면을 휴대폰으로 찍어 출력한 뒤 세 개의 액자에 넣은 시리즈 작품으로 장소성에 대한 깊은 고찰이 묻어나는 작업이다. 
 권남희의 <Off Kawara>는 이제는 고인이 된 일본 출신의 개념미술가 온 카와라(河原 溫/On Kawara : 1932-2014)에게 바치는 오마주 작품이다. 흔히 전원을 켜고 끌 때 영어로 ‘On & Off'라고 쓰는데, 작고한 카와라의 죽음을 사물에 빗대 ’Off‘로 쓴 재치가 돋보인다. 온(On) 카와라가 생전에 <Today> 시리즈 작업을 시작한 것이 1966년 1월 4일이었다. 검정 캔버스에 흰색 글씨로 매일 그 날에 해당하는 연월일을 작고할 때 까지 수십 년간 써 넣었는데, 세상을 떠난 그는 이제 이 작업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처지(Off)가 된 것이다. 권남희는 2020년 1월 1일부터 2월 13일까지 검정색 바탕의 작은 캔버스에 매일매일의 연월일을 흰색 글씨로 쓰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록 온 카와라의 삶은 끝났지만 그 작업을 자신이 수행함으로써 온 카와라의 삶을 오마주함은 물론 그의 영향을 받은 한 사람의 개념미술가로서 동질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난 20여 년간 시간성과 장소성, 그리고 일상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작업을 천착해 온 권남희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이 범주의 작업을 펼쳐왔다. 그리고 언어는 이들 사이를 매개하는 중요한 표현 매체이다. 가령, 장소성을 강하게 암시하는 <역에서 만나자(Meet me at the train station)>(2007), <경기도미술관에서 만나자(Meet me at the Gyeonggi Museum of Modern Art)>(2010), <측정(Measurements)>(2010) 등등이 있으며, 시간성을 다룬 <Off Kawara>(2020), 일성성의 문제를 고찰한 <안개지역(Foggy Area)>(2001), <난 안전해(I am safe)>(2001) 등등이 그것이다. 또한 그의 작업은 때로 아예 문장화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Are you dreaming or are you speaking?>(2004) 같은 예가 대표적이다. 
 2007년에 홍제천변에서 발표한 <빈 바람, 빈 하늘, 빈 글, 그리고 빈 강물(Empty Winds, Empty sky, Empty words, Empty Waters)>은 관객이 각자 자신의 입장과 처지에 맞춰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열린 구조를 지닌 관객참여형 공공작업이다. 이 계열에 속하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공공작업으로는 <침묵사탕(Quite World Sweets)>(2009)이 있다. 이 작품은 2006년부터 교통표지판의 형식을 빌려 해 온 공공미술 작업의 연장으로써 붉은 원형의 바탕에 말없음표(.....)를 넣어 침묵의 의미를 강조한 일종의 퍼포먼스 작업이다. 말없음표 사인이 삽입된 2만개의 붉은색 사탕을 제작하여 3일 동안 어린이들에게 나누어 준 이 작업은 사탕을 먹는 행위를 통해 침묵의 의미를 되새기자는 의도를 지닌 것이다.
 자신의 작업이 시각예술과 문학의 사이에 위치하기를 원하는 권남희는 따라서 문자 형식을 갖춘 일상적 사물을 미술의 문맥 속으로 끌어들이길 즐긴다. 일종의 ‘발견된 사물(Found Objet)’에 해당하는 이 경향의 작품으로는 영화티켓을 이용한 <거기 몇 시니?(What time is it there?)>(2010)가 있으며, 2014년에 제작한 작품으로써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를 필사한 <작가의 일기(A Writer's Diary)>가 있다. 그 어느 작품이 됐든 작가 권남희는 ‘침묵’과 ‘비움’을 통해 고독과 연민, 슬픔과 위안, 자비 등등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감정을 환기시킴으로써, 남이 보기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예술 같지 않은 일상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권남희’스럽게.    

                                    <아마도 권남희 초대전 서문>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