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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석 박원규의 서예세계: 고졸하며 자연스러운 미감

박영택

하석 박원규의 서예세계: 고졸하며 자연스러운 미감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내게 서예는, 특히 뜻을 알 수 없는 한문 문장으로 쓰여진 서예는 비가독성의 조형세계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순수한 이미지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서예는 단지 조형이나 그림에 머물지 않기에 그 뜻을 모르면 다가서기 힘든, 아니 온전히 감상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러니 해석에 힘입어 그 뜻을 헤아리고 회화와는 다른 서예미를 공들여 찾으려 애쓴다. 그렇다 해도 현대미술에 길들여진 내 눈에 서예가 지닌 질에 대한 판단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를 전제로 하면서 내 눈은 다시 하석의 글자들 위로 헤맨다. 흰색 선지( 10여 년간 묵혀둔 종이)위에 먹선이 지니고 주묵이 펼쳐지면서 글자들이 쓰여/그려진다. 붉은색의 낙관도 찍혀있다. 지극히 얇은 피부 위에 흰색과 검정, 빨강의 제한된 색채와 모필의 기세와 칼의 새김에 의해 생긴 다양한 표정과 운율이 미묘한 파장을 동반하면서 울렁거린다. 그리기와 쓰기, 조각이 공존하고 평면과 입체가 힘껏 껴안고 있다. 자연에서 길어 올린 종이와 나무, 돌과 금속이 어우러져서 만든 세계이고 간결하고 압축된 평면 안에서 무궁한 변화를 도모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서 글자는 쓰여진 것이라기보다는 그렸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아니 그런 구분도 모호해 보인다. 서예를 가능하게 하는 운필의 흐름은 드로잉의 자취에 유사하다. 한편 문자는 그 문자가 지시하는 특정 대상, 의미를 향해있어서 관자들은 모종의 상징인 문자를 통해 곧바로 특정 대상을, 구체적인 지시대상을 연상한다. 이 연상작용을 얼마나 강렬하고 유의미하게 품어내느냐가 문자를 쓰는데 핵심이 아닐까? 여기서 연상작용이란 문자를 쓰는 이의 정신과 마음이 그 글자를 보고 읽는 이의 정신과 마음에 가닿은 상당히 복잡한 여정, 회로 안에서 공모의 관계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있어 보인다. 따라서 서예에서 각 문자/획들은 한 자, 한 획이 이미 그 문자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관자의 안광과 관념 속으로 파고 들어가 뜻을 일으키고 감정을 발아시키는 것이다. 결국 동양의 그림이 그렇듯 서예 역시 보는 이의 정신적 활력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그것은 망막에서의 완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가시성의 너머로 포월한다. 예를 들어 산수화의 본래 의미는 자연의 기억 속에 남은 장면들을 상기하는 즐거움에 있다. 시각적 인상을 객관적으로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이 작가의 심리작용에 개입해 만든 자취와 사라지는 순간을 포착하여 고착시키고, 그 기억을 보존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산수화를 그리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 현상의 재현이 아니라,‘현상의 경험’이었던 셈이다. 또한 모든 것은 실재이면서 동시에 끝없는 변화의 과정속에서 존재한다고 보았기에 그것을 쫓는 것은 결국 선이어야 했다. 여기서 선은 단순한 물리적 재현이 아닌 정신적 재현이 된다. 그래서 동양화는 사실적이기보다는 심리적 또는 지적 경로를 통과해서만 해독될 수 있는 그림이었다. 서예의 문자와 획 역시 동일한 맥락에 자리하고 있다.   

 하석은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의 문인들 문집에서 보고 공감하는 내용이 있는 부분을 골라서 쓴다고 한다. 근작 역시 모두 그러한 문장에서 발췌한 것이자 스스로 지은 문장도 함께 하고 있다. 그는 좋은 글씨를 쓰는 서예가가 되기 위해서는 가슴에 많은 글자를 품고 있어야 한다면서 글자를 많이 안다는 것은 그만큼 작품의 표정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띠라서 그가 생각하는 서예는 학문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예술, 그러니까 우선적으로 문자학에 대한 식견을 바탕으로 한다. 문자학적으로 근거 없는 글자를 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는 한자의 원류가 되는 고대의 갑골문, 전서, 금문, 목간체 등을 주로 쓰고 있고 나아가 진· 한 시대 와당에 나오는 문자를 근간으로도 한다. 그런데 이 고대문자들은 한결같이 회화적인 상형문자이다. 그것은 그림과 문자의 경계나 구분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출현한다. 내가 좋아하는 문자/서예들은 그런 것들이다. 그런 문자들은 이미 충분히 회화적, 조형적이어서 가독성을 떠나, 그 의미망을 벗어나 선의 궤적과 먹의 농담, 여백과의 관계 등을 살피면서 감상하게 된다. 구체적인 형상계에서 추출한 문자꼴들이 본래의 형태를 암시하면서도 그것과는 또 다른 이미지로 변화하는, 생동하는 자태는 선이 이루는 조형의 한 경지를 투명하게 밀어낸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도 대부분 고졸한 맛이 나는 그림글자들이 상당수다. 동파문자, 금문, 초간, 벽돌 글씨 등 오래된 문자들, 그러니까 한자의 기원이 되는 문자꼴들이 쓰여지고그려졌다. 나는 그 문자들을 회화 자체로 만끽하며 즐긴다. 그것은 더없이 매혹적이고 재미있는 그림 그 자체다. 죽죽 그어나간 필획의 두께와 먹의 농담, 필선의 세와 이어지고 끊어지는 선의 맛, 생동하는 획들이 자아내는 여러 조형적인 묘미가 바글거린다. 그것은 전적으로 선이 이룬 추상적인 드로잉이자 회화로 봐도 무방해 보인다. 그러나 그 문자의 뜻을 알고 글자 하나하나에 담긴 깊은 의미를 안다면 읽는 즐거움, 깨닫는 마음이 선의 궤적을 빌어 발화할 것이다. 그렇게 하석은 고전이 된 좋은 문장을 품어 그 의미를 필세에 의탁해 출현시킨다. 이응로의 주역을 소재로 한 그림글자나 서세옥, 남관의 경우처럼 문자를 빌어 회화로 다루는 이들의 작품과의 유사성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서예는 좀더 다른 차원에 있기에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는 어렵다. 반면 추사의 경우는 분명 서예이지만 동시에 회화 자체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놀라운 공간 운영, 탁월한 조형성, 유희와 해학미, 농익은 미적 감각의 한 절정을 보여준다. 더구나 그 글자 하나하나는 이미 문자/그림의 경계를 부수고 있다. 기괴하고 고졸하면서도 뚜렷한 개성으로 빛나는 필획들이 순수한 조형을 보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준다. 이런 조형 감각은 타고나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추사의 글씨는 당대부터 괴이하고 난해한 글씨로 평가되고 불계공졸(不計工拙), 즉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가릴 수 없는 경지의 글씨였다고 한다. 서예가뿐만 아니라 이 땅의 수많은 조형예술가들이 그의 서예에 깊이 매료되어 왔다. 실상 추사체의 본질은 형태의 괴가 아니라 필획과 글씨 구성의 힘에 있다고 한다. 하석도 말하기를 추사의 획은 기를 느끼게 한다면서 추사 글씨의 기괴하고 고졸한 미학은 첩, 비가 혼융되면서 바로 정법의 자기 해체나 파괴의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조형 그 자체로 보면 엄격한 음양 원리가 작동하고 있고 글자의 점획이나 짜임새, 글자 간의 배치를 문제 삼는 장법 등을 보면 극단적인 대비 속에서 전체적으로는 조화를 끌어내는데 이는 추사 공간경영의 특질이라고 짚어낸다. 하석 역시 추사의 영향을 짙게 받았고 따라서 그것을 뛰어넘어보자는 목표로 추사가 보지 못했던 죽간, 목간과 백서 등의 문자 끌어들여 해석하고 조형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근작의 문자들이 그런 의도에서 출몰하고 있다.  
 
 서예는 서예가의 독특한 붓의 기운과 동시에 쓰여진 한자의 형체를 빌어 비가시적인 모종의 세(勢)를 실체화 하는 일이다. 가시적으로 보이는 형상(붓질과 문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자극의 방편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필법의 기술은 각 예술가들의 개성을 담아내며, 그 각각의 필획은 보는 자로 하여금 정서적인 데에 호소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전통 동양화에서 표현 역시 필선에 의존한다. 선이 중심인 동양화에서 필력은 곧 그림의 전체 성격을 좌우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붓의 운동성과 경향성은 공간 상에 움직임, 즉 변화를 가져오고, 그 변화의 성질로 인해 시각적인 에너지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간이 기운생동으로 살아나는 것, 그 살아있는 에너지가 자연이 아닌 그림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노닐게 하는 방법을 골법론이라 한다. 그림의 골법은 보는 이의 마음에 어떤 힘과 에너지를 불러일으켜 심리의 변화를 촉발한다. 여기서 문제는 작품의 격조이다. 이른바 서격이 그것이다. 글씨를 쓸 때 생기를 드러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작가 나름의 느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석은 이미 시도한 작품의 형식을 답습하지 않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으로 사용했던 내용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서예의 미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선에 집중되므로 가장 단순화된 예술이다. 서예란 붓과 화면이 만나는 일이고 작가의 신체가 붓을 빌어 그 신체에 의탁해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풀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만의 고유한 붓질의 향연, 그 특이한 붓질의 신체화를 개별적으로 보여준다. 붓질의 독자성을 추적해 한 작가의 고유한 미의식을 엿보는 것이 또한 현대미술이기도 하다. 회화가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그 작가만의 몸짓, 호흡, 그리고 그의 총체적인 감각을 반영하는 붓질의 전이에 있다. 그림처럼 구체적 형상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자를 다양하게 구성하는 조형적 성격을 가진 서예의 소재인 문자는 점과 획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점과 획의 예술성은 운필의 방향, 속도, 운필 중의 압력에 따라서 표현되는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먹의 윤갈, 선의 굵기 등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하고 그 안에서 무한한 변화를 추구한다. 단지 선의 결합과 분포 등에 의해 이루어진 변화이다. 그렇기에 서예의 본질은 결국 획인 셈이다. 하석은 말하기를 획에는 운이 있어야 하고 운은 격을 말한다면서 획을 통해서 작품의 격조가 드러나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반드시 아취가 있어야 한다. 동시에 질박하고 소박함을 추구하였는데 이는 물들이거나 가공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동양의 서화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던 것이 그것이다. 사실 한국의 근현대미술의 거장들이 한결같이 추구한 것은 다름아닌 그것이었다. 망실된 전통과 이식된 서구현대미술의 수용이란 질곡과 틈 사이에서 한국적 현대미술, 혹은 우리식의 담론으로 구현된 비전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추구된 미술 중 상당수는 격조와 아취, 소박함과 질박함을 작품 안에 불어넣으려 애써왔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미감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좋은 글씨나 그림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이며 운치가 있어야 한다. 하석의 근작 역시 그러한 시도에 팽팽히 겨냥되어 있음을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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