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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영 / 표면을 유영하는 회화

박영택

회화는 평면에 환영을 일으키는 장치다. 납작한 표면이 물감과 붓질에 의해 또 다른 존재로 환생하는 동시에 표면을 덮고 있는 물감, 색 층, 붓질 그리고 선과 면들이 그것 자체로 자족적인 생명체가되어 부유한다. 비록 물질에 의해 점유된 표면이지만 회화는 또 다른 생물이 되어 그림을 보는 이들의망막에서 살아 숨 쉰다. 그러니 회화는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존재다. 보는이의 눈과 심리에 개입해 파문을 만들고 사건을 일으키고, 실제의 공간처럼 깊이를 만들고 주름을 잡고휘고 굴절된다. 물론 이는 환영에 의한 것이다. 회화는 평면과환영 사이에서 치고 빠진다.

 



갈영은 주어진 화면 안에서, 그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주어진 틀 내에서 그림을 그린다. 아니 그림을 그린다기 보다는 공간을분절하고 색/물감으로 덮어나가고 그 어딘가에 가늘고 예민 선들을 흘려놓았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그리고 묘사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공간에 또 다른 공간을 가설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과공간간의(색채와 색채 간에도) 길항작용을 적극 모색하는 편이다. 이처럼 작가는 주어진 캔버스 화면을 부드럽게 절개하고 그 사이로 파고든다. 화면은기하학적 선과 유기적 형태감 속에 여러 겹으로, 다층적 공간으로 구획된다. 이질적이고 상반된 요소들 간의 길항에 의해 나누어지는 것이다. 그리고이러한 '공간유희'는 다분히 환영적이다. 공간 속에 여러 공간이, 화면 안에 몇 차원의 공간이 파생되어 나가는느낌이다. 그것은 자연 풍경을 상상하게 해주기도 하고 표면에 미묘한 사건이 발생되는 듯한 체험을 안긴다. 그것은 원근법에 의한 일루젼 과는 색다른 착시, 깊이를 불러일으킨다. 실재하는 외부세계를 지시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들의 지각과 감각 속에서 무엇인가를 야기하는 환상과연관된다. 형태와 색채가 관람자 속으로 침투하고 반향을 일으켜서 보는 이를 감동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갈영의 회화는 불가사의한 힘들에 의해 점유된다. 두텁고 부드러운곡선이 지나가다가 문득 단호한 '커브'를 그리며 빠져나가는형국이자 색채와 굵기를 달리 하는 유기적인 선들이 화면을 채우고 긴장을 조성하고 있다. 자잘한 붓질들로촘촘히 채워진, 무채색 톤으로 조율된 부드러운 바탕위로 색 면이 떠 있고 그것들은 순간 공간을 휘거나주름을 잡고 모종의 흐름을 만들고 있다. 따라서 색채의 톤과 붓질의 방향, 추상적인 형태와 날카롭고 부드러운 선의 대비가 화면 전체를 바람이나 기운의 흐름으로 바꿔놓고 있다. 정지된 부동의 화면에 기이한 움직임을 부드럽게 안기는 것이다. 그래서생성적인 상황성을 감촉시키는 한편 무척 다이내믹한 속도와 시간, 공간의 힘들이 감지된다. 화면 자체가 유기적인 생명체처럼 마냥 활력적으로 나아간다.

 

희박하고 모호한 무채색 톤의 색채들은 점착되기보다는 떠돌며 유동한다. 아니진동하는 붓질들이, 단속적인 붓질이 모종의 활력을 안긴다. 그로인해자연의 한 풍경이 연상되기도 하고 비가시적인 세계의 충만함이 감촉된다. 숨결이나 바람, 기운, 호흡, 온기 등을떠올려주는 화면은 일종의 포화된 상태이자 생명체나 자연의 은유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주어진 평면의 화면안에서 이루어지는 추상이지만 그 추상이 즉물적인 차원의 물질로 환원되기 보다는 여전히 연상과 상상을 통해 가시적 존재로 활성화되도록 하고 있다. 더불어 색채의 미묘한 차이와 결합, 운동 등이 모여 매혹적인 색채추상을이룬다. 그 색채추상은 새털 같은 선이 집적 되어 색 면을 만들고 비정형의 형태가 개입 하면서 바탕으로부터분리 되는 또 다른 색 면, 선을 품고 있는 색채추상이다.

 



갈영의 그림은 현실적인 자연을 모방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적인 것들로 충만하며 죽은 물질, 질료들이지만 살아있는 상태로 나아간다. 납작한 화면, 붓질, 색상과 형상들이 은연중 어떤 상황을 안겨주거나 생명체를 만들어나가는것이다. 그것을 딱히 무엇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작가의그림이 구체적인 대상을 재현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뭇잎이나 꽃, 인체와 자연을 자연스레 연상시키는 선에 가깝다. 동시에 붓질, 색채, 납작한 화면, 질료로귀결되는 추상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 둘 사이에 묘한 균형을 잡고 있다. 외형적으로는 추상표현주의나 색채추상에 유사하며 모더니즘적 회화의 근간에 충실해보이지만 동시에 이를 넘어서서이질적인 것들을 융합하고 여성적 감수성을 기반으로 통합적인 포용에 기반 한 작가만의 '회화'를 실현해보이고 있다는 인상이다. 또한 회화와 드로잉간의 전통적인구분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 둘은 혼재되어 있고 상호 보조적이다.대담하게 나뉜 색 면 사이로 자잘한 붓질이 관통하고 서로 상이한 선, 색들이 충돌하며 부딪친다. 그 파열음이 방향성을 지닌 움직임, 동세와 함께 화면을 박진감 있게끌고 간다. 그래서인지 캔버스 전체를 뒤덮는 모종의 리듬이 두드러지게 감지된다. 출렁이는 선, 움직이는 색, 힘과방향을 지닌 면들이 가득하다. 아울러 감추어진 구상적인 모티프의 존재를 넌지시 암시하지만 분명한 묘사는피하고 있다. 그것은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그림안에는 유기적이고 부드러운 유선형의 선이 등장하고 그 사이로 날카롭고 딱딱한 직선과 기하학적 선들이 뒤섞인다. 서로상반되는 것들 간의 조화나 융합을 떠올린다. 흡사 음과 양의 조화 같은 것 말이다. 또는 자연과 문명, 생명과 인공의 것들이 충돌하고 공존한다. 여기서는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원론적인 세계가 극복되고 다원적이면다차원적인 세계의 이해내지는 자아와 타자를 구분해내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끌어안고 그 타자의 수용 속에 더 커지는 자아를 경험하는 인식들이 자리하고있다는 인상이다. 따라서 화면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묘한 조화로 충만해 보인다. 그것은 단지 기하학적이고 직선적인 것들의 충돌에 의해 가능한 것만이 아니라 한색과 난색, 투명하고 불투명한 질감, 넓적한 붓질과 자잘한 터치 등의 요소에의해서도 강화된다. 이처럼 작가는 서로 상반되는 것들을 화면으로 불러들여 그것들 간의 조화로운 상황을연출한다. 또한 흉내 낼 수 없는 서명과 같은 물감 자국, 붓질, 즉 자필적 제스처를 통해 자신의 사적인 감정과 정서를 캔버스라는 물질적 장에 옮긴다. 그것은 화가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만의 고유한신체적 흔적, 스트로크, 물감 자체의 물성, 그리고 움직임의 장이자 구조로서 캔버스 표면을 가시화하고 이를 통해 작가의 내밀한 감정과 기운을 발산한다. 그로인해 회화는 기이한 징후를 품고 있는 유동적이고 진동하는 존재가 되었다.갈영의 그림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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