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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혁 / ‘네트워크’ 아트

김영호

김태혁 / ‘네트워크’ 아트 

김영호(중앙대교수, 미술평론가) 

회화와 판화를 한데 아우르는 접점에서 독자적인 예술기반을 다져온 김태혁은 매체로서 물감의 속성과 그 의미체계를 세우기 위한 조형실험에 10년 이상을 천착해 왔다. 2007년부터 시작된 그의 도전적 실험은 캔버스 표면에 물감을 세우는 이른바 ‘STANDING' 연작이었다. 그리고 2014년부터 새롭게 시도된 'OFF' 연작은 소량의 물감을 화면에 접한 3차원 공간에 부유케 하는 것인데, 투명수지 낚시줄을 격자무늬로 엮어 수직으로 드리우고 그 줄 위에 물감을 점 혹은 선의 모양으로 얹혀놓는 것이다. 2016년부터는 'OFF' 연작의 범주 안에서 격자무늬의 픽셀을 얇은 물감으로 채우는 기법을 개발함으로써 붓질(brush stroke)이라는 회화의 본질적 요소를 회복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김태혁의 조형실험은 새로운 방법론의 발견이라는 차원에서 국내외 미술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점·선·면 그리고 공간은 전통회화가 고수해 온 기본적 조형요소들이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재현이나 환영을 위한 보조적 기능이 아닌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조형원리로서 다루어지고 있다. 아울러 그의 조형실험은 형식주의에 기반한 모더니즘의 울타리도 이미 넘어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의 작업이 본질과 형식의 논리가 극단으로 전개되면서 야기한 예술의 종말 이후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을 동시대의 문맥에서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과정(過程)과 연기(緣起) 그리고 관계(關係)의 사유가 지배하는 후기 디지털 정보시대의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공간탐구의 미술사적 성취라는 측면에서 김태혁의 작품은 루치오 폰타나의 작품을 떠오르게 한다. 20세기 중반 루치오 폰타나가 빈 캔버스 표면에 구멍을 뚫거나 칼집을 내어 작품을 완성했을 때 사람들은 그의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형식논리에 열광했다. ‘공간 개념(Concetto Spaziali)’으로 발표된 그의 실험적 작품은 새로운 공간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캔버스라는 2차원의 평면위에 3차원의 실재 공간을 표상함으로써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무너뜨린 폰타나의 조형실험은 각국으로 퍼져나갔고 우리나라에도 상륙했다. 한지에 구멍을 내는 작업을 한 권영우 화백이 대표적인 경우다. 김태혁의 조형실험은 루치오 폰타나 이후 한동안 정체되어 있던 캔버스 기반의 공간 확장에 새로운 물꼬를 트고 있다. 

김태혁의 조형실험을 둘러싼 방법과 의미체계는 화면 위에 펼쳐진 그물망, 즉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펼쳐진다. 그가 작품 제작의 초기 단계에서 공력을 들여 조성하는 격자무늬의 그물망은 소통의 공간이자 다양한 메타포(metaphor)를 품은 세계다. 작가가 매체로 선택한 투명수지 낚시줄은 그 자체로 포획(capture)이나 연결(connection) 따위의 특별한 기호적 메시지를 드러낸다. 시각을 달리하면 네트워크는 불교철학에서 말하는 연기론의 기표로서 얽혀 살아가는 현상계의 존재양태를 이해하는 통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김태혁이 화면에 배열된 격자무늬의 그물망과 그 위에 자리 잡은 안료의 점·선·면들을 통해 개척해 낸 것이 이른바 새로운 공간이다. 새로운 공간은 디지털미디어와 인터넷 테크놀로지 시대의 세계관과 조응함으로써 얻어낸 인식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김태혁의 작업은 모더니즘의 본질과 형식주의 미학을 넘어 동시대가 요구하는 인문학적 성찰을 향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예술 세계는 여전히 자신이 걸어온 회화와 판화의 구조와 본성에 대해 물음을 제시함으로써 자기반성을 통한 역사적 정체성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그의 눈과 정신이 지향하고 있는 실험적 세계가 회화의 범주에 있으며 그 안에서 아직도 밝혀진 바 없는 새로운 성취를 얻어낸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OFF-P 190202205359 119x194.4cm Mixed media on Fluorocarbon line 2019

이번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열리는 개인전에 즈음해 김태혁이 처음 선보이는 'FACE' 연작은 작가의 조형실험이 맺은 큰 결실로 보아도 될 것이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의 서있는 시공에서 자신의 예술적 방법론을 세우고 세상을 바라보는 인내와 고집의 결실이다. 붓의 스트로크에 의해 올려진 반투명의 안료는 마치 수채화의 붓터치처럼 보는 이들에게 정갈하고 신선한 미적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 단색화로 알려진 선배화가들의 작품을 연상케 하면서도 그의 작품이 그 이상의 미학적 감동을 주는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안료가 공중에 떠 있기 때문이다. 점과 선에 이어 부유하는 면을 지닌 그의 작품은 회화적 정감과 우주적 메시지를 품은 다차원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사의 노정에서 김태혁의 작품세계는 하나의 성취를 거두고 있다. 전시장을 방문하는 관객들도 이번 개인전에서 그가 거둔 성취의 결실을 함께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패널의 표면으로부터 살짝 띄워진 점·선·면과 조명에 의해 드리워진 그림자 그리고 미동에 섬세하게 흔들리는 그물망을 대하며 대자연의 질서 속에 끝없이 흔들리는 생명의 리듬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도 아니면 일출의 시간에 찬란하게 반짝이는 수면의 물결을 연상하거나, 대지에 숨겨진 존재의 비밀을 알리는 전령(傳令)들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출처: 김태혁 개인전 도록 서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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