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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자/ 유기적 기하학, 패턴과 기하학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고충환



최미자/ 유기적 기하학, 패턴과 기하학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고충환 미술평론가

모더니즘 패러다임, 패턴과 패션, 반복과 차이. 작가 최미자의 그림을 보면서 떠올려본 개념어들이다. 작가의 작업을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이라고 해도 좋고, 작가의 그림을 견인하는 동력이라고 해도 좋다. 외관상 작가의 그림은 재현적이고(어떤 대상을 특정해 그린) 서사적이고(어떤 메시지를 함축한) 형상적인(알만한 모티브를 소재로 한) 그림과는 다르다. 재현과 서사 그리고 형상성 그러므로 그림이 뭔가를 떠올리거나 암시한다기보다는 그림 자체로서 다가온다는 점에서 추상회화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 이면에서 추상회화에 대해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당위성을 제공하고 있는 모더니즘 패러다임과 통한다. 

주지하다시피 모더니즘 패러다임은 회화의 존재 이유를 회화의 바깥이 아닌, 회화의 안쪽(이를테면 예술의 자율성과 회화의 내재율과 같은)에서 찾는다.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당위성을 회화가 함축한 의미 내용보다는 형식요소(이를테면 점 선 면 색채 양감 그리고 질감과 같은)에서 찾는다. 이런 형식요소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회화라고 본 것이다. 

그림 속 모티브는 모티브이기 이전에 하나의 색면이라거나(모리스 드니), 회화에서는 색채가 곧 표현이라거나(앙리 마티스), 회화는 평면이라는 최소한의 조건으로 환원된다거나(클레멘테 그린버그),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이라는 프랭크 스텔라의 동어반복이, 그리고 그 결은 좀 다르지만 질 들뢰즈의 차이를 생성하는 반복이 이러한 사실 곧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전언들이다. 나아가 그 자체 아무런 의미도 의미하지 않는 추상 그러므로 의미론적으로 텅 빈 추상은 없다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공공연한 반추상적 논리마저 사실은 추상에서 파생된 것(추상에 대한 반성에서 유래한 것)이란 점에서, 그리고 어쩌면 추상에 대한 역설적인 표현(역설을 통해 추상을 재해석하고 재정립한 것)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전언의 연장선에 있다. 

작가의 추상회화는 이처럼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회화적 태도를 계승하고 변주하는, 재해석하고 자기화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자기만의 형식을 열어 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그림에는 패턴이 있다. 패턴을 해석하고 변주하는 과정을 통해 다양한 형식의 그림을 열어 놓는다. 패턴이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형식적인 특징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패턴이란 뭔가. 하나의 단위원소가 모여 패턴을 만든다. 하나의 단위원소 그러므로 모나드가 반복되고 확장되는 모듈 구조가 패턴을 만든다. 반복을 통해 확장되는 구조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서 차이를 생성시키는 반복(반복이지만 매번 다른 반복) 구조가 패턴을 만든다. 

작가의 그림에서 하나의 단위원소는 색면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 속엔 색면이 있고, 그 색면이 반복되면서 확장되는 패턴이 있다. 처음엔 패턴 속에 패턴 위에 개와 화분과 나무와 집과 같은 일상적인 모티브들이 있었고, 동심원을 양식화한 것 같은 기호가 있었다. 추상적 패턴으로 나타난 내면 풍경과 일상적 모티브로 나타난 외면풍경이 하나의 층위로 중첩돼 있었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이후 그림에서 점차 일상적인 모티브는 사라지고, 추상적 패턴만이 남아 그림을 변주하고 견인하고 확장한다. 일상적 모티브가 내재화되고, 외면풍경이 내면화되었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일상적 모티브 대신 여백이 들어선다. 패턴과 여백이 하나의 화면 속에 어우러지는 것인데, 여기서 여백은 말하자면 일상 그러므로 외면풍경이 내재화하고 내면화된 무형의 자리라고 해도 좋고, 일상적인 생활감정이 화면 속에 녹아든, 부유하는 흔적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이후 그림에서 패턴과 함께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또 다른 형식적 특징이랄 수 있는 전면회화가 출현하고 변주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추상적 패턴이 여백을 메워 화면 전체를 장악한 것인데, 추상적 패턴이 화면 자체와 일치하는, 패턴이 그림이 되고 그림이 패턴이 되는, 그리고 그렇게 그림과 패턴이 상호 가역적인 회화적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무한 반복되는 구조가 그림 바깥으로의 확장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바로크(그림이 그림 바깥으로 연장된 느낌으로, 마치 관객이 그림 속 현장에 동참하고 있는 것 같은 극적 효과를 주는)의 추상화 버전을 떠올리게도 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패턴을 보면, 동심원을 그리면서 확장되는 것도 같고, 원심력(자기 외부로 확장하려는 관성)과 구심력(자기 내부로 중심으로 향하는 힘)이 상관하면서 잠재적인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같고(패션 시리즈), 사선을 그리면서 흐르는 것도 같다(바람 시리즈). 화면이 움직이는 것 같은, 일렁이는 것 같은 잠재적인 운동성이 옵아트를 떠올리게 하고, 형형색색의 크고 작은 색면이 어우러진 화면이 빛의 조각을 조형한 스테인드글라스(혹은 모자이크)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잠재적인 방향성과 속도감을 암시하면서 활성을 화면 위로 밀어 올리고 있는 것도 같다. 아마도 작가의 내면에 흐르는 파토스(그러므로 열정)를, 기의 흐름을, 존재의 활성(그러므로 생명력)을, 에너지의 파동을 조형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패턴을 매개로 또 다른 형식의 그림을 실험하고 있다. 이번에 패턴은 종전 그림에서의 패턴과는 사뭇 다르다. 작가의 그림의 형식적인 특징이랄 수 있는 패턴이 달라진 만큼 그림의 분위기 또한 다르다. 

작가의 그림을 멀리서 보면 단색이 보인다. 단색화인가. 그리고 적당한 거리에서 보면 가로로 총총한 띠가 보인다. 띠 그림(스트라이프 페인팅)인가.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총총한 띠 사이로 요철처럼 움푹한 면이 보이고, 터실터실한 벽이 보이고, 질감이 보이고, 물성이 보인다. 거리두기라는 말이 있다. 미적 거리 혹은 심적 거리라는 말도 있다. 그림을 더 잘 보기 위해선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굳이 그림 보기에만 한정된 말은 아닐 것이다. 삶의 태도에 대한 유비적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서 그 유비적 표현을, 그 숨겨진 의미를 따질 일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지만, 분명한 사실은 작가의 그림을 멀리서 볼 때 다르고 가까이서 볼 때 다르다는 점이다. 단색화와 띠 그림, 그리고 여기에 시각적 언어를 넘어 촉각적 언어를 실현하고 있는, 가까이 다가가서만 비로소 보이는, 그러므로 일종의 촉각시(보면서 만져지는)를 실현하고 있는 물성 회화가 모두 하나의 그림 속에 실현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자기 속에 또 다른 잠재적인 형식적 가능성을 숨겨놓고 있는, 암시적이고 함축적인, 그리고 다중적인 회화가 예시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물성 회화라고 했다. 움푹한 면과 터실터실한 벽이라고도 했다. 이처럼 질료가 여실한 회화는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가. 근작도 그렇지만, 작가가 그린 모든 그림은 사실 붓 대신 나이프로 그린 것이다. 어쩌면 붓이야말로 가장 관성적인 화구일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그 관성에서 탈피해 좀 더 낯선 그리기를 생각했는지도 모르고, 그 방편으로 붓 대신 나이프를 잡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작가는 먼저 나이프로 화면에 총총한 선을 긋듯 색을 올린다. 그리고 다른 색으로 선과 선 사이를 메우는데, 스스로는 면을 만들면서 가장자리로 자기를 밀어 올려 벽을 쌓는다. 그렇게 면과 면 사이에 최초의 색이 실선처럼 남겨진 터실터실한 벽이 생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실선이 있고, 면이 있고, 움푹한 요철이 있고, 아득한(?) 벽면이 쌓아 올려져 있다. 그림이지만, 그 속에 길이며 벽을 숨겨놓고 있는 건축적인 회화라고 해야 할까. 직선으로 표상되는 기하학이되, 터실터실한 띠 그림으로 유비되는 유기적 기하학(숨 쉬는 기하학)을 예시하고 있는 회화라고 해야 할까. 

여기에 전작에서 운동성이, 운율이, 리듬이, 활력이, 생명력이 강조되고 있었다면, 근작에서는 상대적으로 정적이고 관조적인, 내면적이고 명상적인 느낌을 준다. 그동안 달라진 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인데, 이를테면 동적 패턴에서 정적 패턴으로 패턴 자체가 달라진 것도 있겠고, 다채로운 색면들이 하나의 화면 속에 어우러지던 것에서 화면 자체(그리고 전체)가 모노 톤으로 침잠하는 색채감정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근작에서 작가는 패턴을, 기하학을 사용하는 또 다른 용법을 열어 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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