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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신/ 하얀색으로, 검은색으로, 노란색으로 발광하는

고충환


청신/ 하얀색으로, 검은색으로, 노란색으로 발광하는 

고충환 | 미술평론가

알바 시절 식사 대신 지겹게 먹었던 바나나 껍질에서 젊은 날의 나의 모습을 본다. 설익은 초록색을 지나 잠시 노랗던 바나나 껍질은 이내 검게 색이 변해간다. 인간의 삶이 변해가는 과정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후 노란색은 나를 포함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하나의 색상이 되었다...선을 그어 내리는 것은 어떤 것을 기억해내는 것과 같다. 선으로 그어낸 꽃들은 불을 삼킨 나무의 기억이다...부드럽고 깊은 목탄, 불을 켠 듯 밝은 노랑, 잘 정돈된 하양, 그리고 안정적으로 구성된 정물...삶이라는 연장선 위에서 우리는 걷고, 그리고, 쓰고, 숨 쉰다. 
- 작가 노트

쓰레기통 속에 던져진 바나나 껍질을 본다. 처음엔 설익은 초록색이었다가, 빛처럼 밝은 노란색으로 발광하다가, 점차 검버섯이 피면서 검게 색이 변해간다. 태어나고, 사랑하고, 병들고, 죽는 사람의 삶을 닮았다. 삶과 청춘과 죽음이 순환하는 삶과 죽음의 알레고리를 닮았다. 아름다운 것일수록 꼭 그만큼 더 덧없다는 바니타스의 전언을 닮았다. 십 일 동안 빨간 꽃은 없다는 화무십일홍의 전언을 닮았다. 그 전언 한 가운데 삶의 절정이 있다. 빨간색도 그렇지만 특히 빛처럼 노란색이 삶의 절정을 표상한다. 

여기서 노란색은 설익은 초록색을 기억하고, 아직은 오지 않은 검은 죽음을 예고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 속에 노란색과 검은색이 들어온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에서 노란색은 삶을 표상하며, 검은색은 죽음을 표상한다. 그리고 노란색은 날 것 그대로의 감정, 자기표현을 얻은 감정을 표상하며, 검은색은 사그라든 감정, 그러므로 자기 내면으로 응축된 감정을 표상한다. 그렇게 작가는 노란색과 검은색을 빌려 삶에서 죽음으로 연이어지는 삶의 순환을 표현했고, 삶의 알레고리를 표현했다. 외관상 정물화를 소재로 한 것이지만, 그림 속에 삶에 대한 자기반성적 사유를 담았고, 존재론적 성찰을 함축했다. 

작가의 그림을 보면서 문득 마티스를 떠올리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마티스는 표현주의(그리고 야수파)의 대가로서, 색채의 마술사로, 그리고 감각적인 드로잉으로도 유명하다. 야수를 방불케 하는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표출 그러므로 표현하는 것인데, 그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가 드로잉이고 색채다. 드로잉은 사물의 형태를 직관적으로 포획하고 순간적으로 표현하는 기술이다.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 아직 생생할 때 사물의 형태를 붙잡는 방법이다. 시간의 흐름을 순간으로 정지시켜 사물을 가두고 박제하는 방법이다. 드로잉도 그렇지만 특히 색채는 결정적이다. 색채 역시 드로잉과 마찬가지로 사물의 고유색을 무시하고 직관적으로, 감각적으로, 즉흥적으로 선택되고 부려진다. 색채와 드로잉의 상호작용이 감정의 표현을 밀어 올리고 있다고 해야 할까. 

마티스는 회화는 표현이라고 했다. 그리고 색채가 곧 표현이라고도 했다. 색채와 표현이 동일시되고 있는 것인데, 노란색이 감정을 상징한다는 작가의 레토릭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여기에 마티스는 안락의자처럼 편안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는데, 그 회화적 지향마저 닮은 부분이 있다. 


작가는 하얗게 처리된 캔버스의 맨살 위에 목탄과 노란색으로 그림을 그린다. 색으로만 한정하자면, 하얀색과 노란색 그리고 검은색으로 그림을 그린다. 하얀색과 검은색 사이에 노란색이 있다. 여기서 다시 색채 상징주의를 적용해보자면 삶과 죽음 사이에 삶의 절정이 있고 응축된 삶이 있다. 생을 상징하는 하얀 맨살이 있고, 사를 상징하는 검은 목탄이 있다. 목탄은 말 그대로 불에 타 죽은 나무지만, 생전의 나무를, 그러므로 생전의 자기를 기억하고 있다. 목탄의 검은색은 노란색은 물론, 세상의 모든 색을 빨아들이고, 세상의 모든 빛을 빨아들인다. 그러므로 어쩌면 세상의 모든 색과 빛을 자기 속에 머금고 있는 색이다. 세상의 모든 색과 빛으로 상징되는 오색찬란한, 다채로운 삶의 서사를 오롯이 기억하고 있는 색이다. 

그러므로 목탄의 검은 색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쩌면 이를 통해 삶의 서사를 되불러오고 기억을 환생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는 캔버스의 하얀 맨살 위에 목탄으로 선을 긋고 부분적으로 문질러 강한 선과 부드러운 질감을 얻는다. 때로 선명했던, 더러 모호했던 삶의 서사를 불러오고, 때로 강렬했던, 그리고 더러 부드럽고 우호적이었던 기억을 되불러온다. 여기서 목탄은 주지하다시피 캔버스 위에 정착하기가 쉽지 않다. 모르긴 해도 그동안, 종이에서처럼 거침없이 그릴 수 있게 되기까지, 더욱이 드로잉의 덕목인 순간 포착과 즉발적인 표현을 얻을 수 있게 되기까지 허다한 형식실험과 시행착오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마치 종이에 그린 것처럼 편안한, 그리고 자연스러운 목탄 그림 위에 노란색을 올린다. 노란색은 모티브에 부합하는 방식, 이를테면 노란 꽃잎과 노란 레몬에 적용되기도 하지만, 모티브에 한정되지 않는 방식, 이를테면 일명 땡땡이 문양으로 화면에 부가되기도 한다. 색채가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사용 적용되는 것인데, 목탄으로 그어 조형한 모티브와 상호작용하면서 화면에 경쾌하고 발랄한 리듬감을 자아낸다. 목탄으로 잡아주고 노란색으로 풀어주는, 응축하고 확장되는 운율을 불러일으킨다고 해야 할까.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을 블랙 네온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블랙 네온이라는 말 자체는 모순적이다. 블랙 네온이 없기도 하거니와, 블랙은 세상의 모든 빛과 색을 자기 속에 빨아들여 정작 세상에 남아있는 빛과 색이 없게 만드는 상황적인 색이고, 반대로 네온은 스스로 발광하는, 그러므로 세상을 향해 빛과 색을 내뱉어 밝히는 정황적인 색이다. 각 세상을 무화하는 색과 유화하는 색이 붙어있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어쩌랴. 예술은 말이 되지 않는 것,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것, 그러므로 어쩌면 모순율과 이율배반 그리고 역설이 작동하는 지점에 둥지를 튼 것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모순율과 이율배반 그리고 역설을 돌파하는 것인데, 그렇게 돌파된 지점에서 말이 되지 않으면서 의미하는 것들, 언어로 한정되지 않으면서 지시하는 것들을 환생시킨다. 의미 이전의 것들을, 언어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을 소생시킨다고 해야 할까. 특히 드로잉에서처럼 순간적이고, 즉발적인 것들에, 열린 채로 한정하는 것들에 숨결을 불어 넣는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가. 네온은 주지하다시피 그 생리가 색보다는 빛에 가깝다. 결국 네온을 빌려 빛을 색으로 환원한 것인데, 네온의 발광하는 노란 빛은 세상의 모든 빛을 자기 속에 품어 들이는 검은색과 대비될 때 오히려 더 노랗게 빛난다. 죽음과 대비될 때 삶이 더 찬란하고, 더 소중하고, 더 의미가 있는 것과도 같다. 아닌 것과 아닌 것, 극과 극이 대비되는 지점에서 삶의 진실은 더 오롯해지고, 그 진실의 후광으로 노란색은 더 노랗게 발광한다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력 혹은 논리의 비약이라고 할까. 그러나 동시에 예술의 의미가 비로소 의미를 얻는 지점이기도 하다. 작가의 그림에서 블랙 네온은 바로 그렇게 존재의 의미를 얻는다. 

그렇게 작가는 블랙 네온 시리즈를 따라 세상을 산책한다.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까치 소리, 개구리 소리, 풀벌레 소리, 나뭇잎이 바람을 따라 파도치는 소리,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다. 흙냄새, 물에 젖은 돌 냄새, 풀냄새, 시골 아궁이 냄새를 맡는다. 그렇게 그림 속을 산책하면서, 작가는 또 다른 세상을 일궈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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