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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빙(Xu Bing, 徐冰)/ 이모티콘, 가상현실 시대의 언어체계와 소통방식

고충환



쉬빙(Xu Bing, 徐冰)/ 이모티콘, 가상현실 시대의 언어체계와 소통방식 


고충환 | 미술평론가

흔히 현대인을 신인류라고 부른다. 전에 없던 각종 첨단의 디지털 기기로 무장한 디지털 유목민이라고도 부른다. 루이 알튀세는 제도가 개인을 어떻게 호명하느냐에 따라서 개별 주체의 정체성이 결정된다고도 했지만, 이제 개인의 정체성은 제도도 이념도 아닌, 미디어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다. 

이런 변화의 이면에 전 세계를 하나로 연결한 인터넷 혁명이 있고, 세계 끝에 사는 익명의 주체와 통하게 해주는 스마트폰 혁명이 있다.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소통을 가로막는 어떤 시공간의 차이도 장애물도 없는, 그런 시대에 우리 모두 살고 있다. 소통의 채널이 SNS로 옮겨오면서, 관계망 역시 SNS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그렇게 새롭게 구축된 온라인 관계망이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 대면하는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편리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 세계와 단절돼 있으면서 통하는, 세계를 손안에 쥐고 있는 고립된 개인이라고 하는, 역설적이고 양가적인 현실을 낳고 있다. 

쉬빙의 작업 <지서(地書)> 시리즈는 이처럼 역설적이고 양가적인 현실에서, 비정합적 언어체계가 종전의 정합적 언어체계를 대체하고 있는 현실에서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하는, 미디어 시대의, 디지털 시대의, 가상현실 시대의 소통방식에 대한 심각한 자기반성적 사유로부터 나온다. 그렇게 작가의 또 다른 작업 <천서(天書)> 시리즈와 짝을 이루는 <지서(地書)> 시리즈는 크게 이모티콘 책 작업 <점에서 점으로>와, 일종의 이모티콘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인 <워드 뱅크>로 구성된다. 

실제로도 이모티콘 그러므로 일종의 신종언어를 매개로 상방 소통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데이터베이스 센터처럼 신생 이모티콘이 계속 축적되고 갱신되는(업데이트되는) 현재진행형 작업이다. 우리는 이미 공사 현장 표지판과 추락 주의 표지 그리고 출구 표시와 같은 픽토그램에 대해서,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각종 부호와 기호에 대해서, 자본주의 상품의 로고에 대해서 알고 있다. 작가의 이모티콘 책 작업은 이런 픽토그램과도, 부호와 기호와도, 그리고 로고와도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 

이처럼 언어는 새로 태어나기도 하고(신생 언어), 심지어 죽기도 한다(사어). 언어와 언어체계가 고정돼 있지 않다는 말이다. 가변적이고 비결정적이라는 말이다. 심지어 조작될 수 있기조차 하다는 말이다. 때로 당대의 지배적인 언어체계에 권력(헤게모니 투쟁)이 매개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롤랑 바르트의 독사, 미셸 푸코의 에피스테메). 

실제로도 이처럼 신생 언어를 매개로 한 소통과 관심의 이면에는 작가가 실제로 겪은 역사적 현실이 있다. 작가가 소학교 1학년 때, 중국은 대중들의 문맹 퇴치와 함께 다양한 민족을 하나로 통합시킬 요량으로 전통 문자인 번체자(복잡한 형태의 중국 전통 한자)를 금지, 간체자(한자를 간략하게 쓴 글자)를 널리 보급 시키며, 전국적으로 문자 체계를 바꾸기 시작했다. 이 갑작스러운 현실이 작가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었고, 문자 조작이 가능하다는 사실과 함께, 문자의 신뢰성과 유효성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흔히 문자로 규정된 사실을 자연적 사실로 알고 있다. 여기서 롤랑 바르트는 문화적 사실을 자연적 사실 인양할 때 신화가 발생한다고 했다. 그렇게 알고 보니 문자는, 언어는, 언어체계는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문화적 사실이며 소산임이 드러난 것이다. 그렇게 나도 문자를 만들 수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개인의 언어가, 소수자의 언어체계가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실제로도 바꾸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이모티콘으로 나타난 신종 언어(신생 언어)를 매개로 오늘날의 문자며, 도래할 언어를, 언어체계를 제안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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