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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순공, 삶은 어쩌면 밑도 끝도 없는 망을 짜는 일일지도 모른다

고충환



백순공, 삶은 어쩌면 밑도 끝도 없는 망을 짜는 일일지도 모른다 


고충환 | 미술평론가

지역 출신 혹은 연고 작가 중 전국적인 지명도가 있는, 그리고 미술사적 의미가 있는 작가를 집중 조명하는 <경남작가조명전>은 아마도 경남도립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전시 중 하나일 것이다. 2022년 전시에는 백순공 작가를 초대 전시했는데, 2021년 작가가 지병으로 타계하면서 작가의 유작전이 되었다. 미술관은 지난 2020년부터 <한국의 거장들> 전시도 추진해오고 있는데, 2020년에는 강국진 작가가, 2021년에는 이준 작가가 각각 선정 전시된 바 있다. 올해 3회째로 백순공 작가를 초대했는데, 이 전시 역시 작가의 갑작스러운 유고로 덩달아 앞당겨지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경남은 특히 통영과 마산 지역 출신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국현대미술에 기여와 활동이 활발한 편이어서 향후 전시를 계속 가져가기에 무리가 없어 보인다. 한편으로 이번 전시에 초대 전시된 백순공 작가를 보면 사실은 그동안 외부로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동안 교육 현장에 충실했던 연유도 있겠고, 작가의 성향 탓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이번 전시를 통해서 전국적인 지명도나 미술사적 의미를 사후적으로 얻는 경우라고 생각되는 만큼 이번 전시가 결정적이고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가 있겠고, 실제로도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있었던 전시라고 생각된다. 

미술관 측은 전시 그러므로 작가의 회화 50년사를 각 전기(1974-1996)와 중기(1997-2001) 그리고 후기(2002-2021)로 구분했다. 그리고 여기에 각 실상과 허상의 공존에서, 일상적 사유 혹은 일탈, 그리고 초시간적 무한성으로라는 소주제를 붙였다. 이 소주제들은 작가의 작업을 분기하면서 관통하는 개념어들, 이를테면 각 재현의 문제, 현실(그러므로 현실 인식)의 문제, 그리고 존재론적 원형 혹은 근원의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작가는 앵포르멜에서 단색화로 넘어가는 1세대 작가 이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추상과 일상이 길항하고 부침하는 2세대 작가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표면적으로는 일상에 대한 자기반성적 사유에 마주하면서도, 동시에 그 이면에는 추상에 대한 형식논리가 면면히 흐르는, 모더니스트로서의 회화적 유전자가 작동하는, 그렇게 일상적 현실과 회화적 형식논리 사이에서 번민하는 와중에서 창작을 가동한 경우로 보인다. 


먼저 재현의 문제를 보면, 못, 물감 튜브, 성냥개비, 그리고 촛불과 같은 일상적인 소재를 모티브로 재현의 문제를 묻는, 실상과 허상의 관계를 묻는 것으로 작가는 회화에 입문한다. 이미 이 시기에 일상적 소재를 모티브로 한 것을 보면 작가는 처음부터 일상 그러므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체질적으로 내장하고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중 못을 보면, 작가는 반듯한 못, 구부러진 못, 그리고 구김이 있는 종이 위에 그린 못을 그려놓고 있다. 비록 캔버스에 그린(그림자와 함께 구김이 있는 종이의 질감마저) 그림이지만, 실물 의자와 의자를 찍은 사진과 의자의 뜻풀이에 해당하는 사전적 정의를 제안하면서 열린 기의의 문제, 그리고 기의 자체가 또 다른 기표를 얻는 문제, 그러므로 언어의 본질 문제를 제기한 조셉 코주스의 개념미술을 상기시킨다. 캔버스 아래쪽에는 칼로 오려낸 듯한 흔적이 남아있는데, 캔버스에 구멍을 뚫어 공간 확장을 꾀한 루치오 폰타나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작가는 회화 초기에 개념미술에 대한 영향과 함께, 재현된 현실을 매개로 실상과 허상의 관계를 묻고, 실제와 기호와의 관계를 물었다. 그리고 물감 튜브를 그린 그림에는 신문지와 잡지 같은 인쇄물(그러므로 대중매체)로 그 밑바탕을 처리했는데, 아마도 예술과 현실과의 상관관계 혹은 상호작용을 표상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런 재현의 문제를 발판 삼아 일상적 사유 혹은 일탈의 문제로, 그리고 초시간적 무한성으로 나아간다. 일상 그러므로 현실은 어떻게, 그리고 존재론적 근원 그러므로 원형은 어떻게 회화적으로 재현될 수 있는지 하는 문제로 도약한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표면 현상과 근본적으로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를 품고 있는 내면 현상이 어떻게 상관하는지를 회화적으로 풀어가는데, 여기서 그 도구가 되는 것이 드로잉이다. 작가에게 드로잉은 앞서 재현의 문제에서 사실상 고정된 의미 같은 것은 없다고(그러므로 모든 의미란 맥락 결정적이라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가변적인, 가역적인, 비결정적인, 흔들리는, 유동하는, 암시적인 형태로만 주어지는(그러므로 존재하는) 의미들, 기호들을 회화로 버전업하는 효율적인 도구가 된다. 

작가는 1984년 발표한 논문 <현대 드로잉의 전개와 그 특성에 관한 연구>에서 자신에게 드로잉은 생각임과 동시에 하나의 행위이며 개념형성 활동을 의미한다고 했다. 변증법의 사유체계 속에서(생각이 행위를 낳고, 행위가 개념 그러므로 또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는, 그렇게 생각과 생각이 꼬리를 무는), 그리고 그 물화된 형식인 회화의 자장 속에서 개념미술과 행위예술(액션페인팅 그러므로 몸 그림)이 상호작용하고 통합되는 과정을 매개하는 것이 드로잉이라고 정의한 것일 것이다. 생각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개념으로 미세한 차이를 생성시키면서 반복 순환하고 되먹임되는 과정이 곧 회화이고 드로잉이라고 본 것일 터이다. 형태란 끊임없이 유동하는 과정에 놓여있다는 요셉 보이스의 드로잉 개념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드로잉이 현저하고, 타블로에서 마저 드로잉적인, 그러므로 드로잉적인 회화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선의 흔적이라는, 영문 표기로는 마음의 흔적(Traces of the Mind)이라는 전시 타이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작가에게 회화 그러므로 드로잉이란 선의 흔적이고 마음의 흔적이다. 작가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삶의 흔적을, 사유의 흔적을 기록하고 붙잡아 쌓는 일이다. 여하한 경우에도 삶은, 그리고 사유는 특정해서 지시할 수는 없는, 다만 쌓이는 흔적으로서만 겨우 재현될 수 있을 뿐이다. 마치 너무 많이 지우고 고쳐쓰기를 반복해서 너덜너덜해진, 지운 의미들이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은 채 고스란히 보존된 양피지에서처럼(롤랑 바르트). 

그렇게 작가는 화면 속에, 화면 위에 무수한 선들을 그려 넣어 레이어를 쌓는다. 선들의 레이어가 모이고 흩어지는 여하에 따라서 사람을 만들고, 부처를 만들고, 나무를 만들고, 나비를 만들고, 창틀을 만들고, 공간을 만들고, 깊이를 만든다. 선들의 입자가 모여 형태를 만드는 것인데, 모티브도 선이요 공간도 같은 선으로 구조화된 탓에 화면에 선후가 없고 차이가 없다. 마치 형태들이 화면 속으로 사라진다고 해야 할까. 화면이 형태를 겨우 밀어 올리고 있다고 해야 할까. 부상과 침전, 존재와 부재, 있음과 없음의 경계에 떠도는 형태 같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경계가 지워진 그림이, 모티브와 화면, 주제(아니면 소재)와 화면이 일체화된 그림이 편집증적 그리기, 무의식적 그리기, 자동기술적 그리기와 함께 수행적 그리기의 태도를 엿보게 한다. 

여기에 또 다른 선들이 가세하는데, 작가는 신문지와 잡지 그리고 광고 전단지와 같은, 일상으로부터 건너온 대중매체를 파쇄기로 분쇄한 자잘한 종이 선들을 화면 위에 콜라주 해 또 다른 레이어를 쌓는다. 대중매체로 상징되는 일상을 해체하고 재구성한 것에서 일상에 대한,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여기에 파쇄지는 동시에 문자와 기호와 언어를 해체한 것이기도 하므로 불교에서의 불립문자(진리는 활자 너머에 있다)를 표상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그물망을, 그리고 가녀린 실을 도입 중첩 시킨다. 결국 하나의 화면 속에 그려진 선들의 레이어가, 파쇄지가 만든 레이어가, 그리고 여기에 그물망과 실이 만든 또 다른 레이어가 겹겹이 중첩된 화면이 구축된다. 

이처럼 촘촘한 레이어가 만든 망은, 망에 망이 중첩된 망들의 망은 도대체 작가의 작업에서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담고 있는 것인가. 서로 반영하고 반영되는 불교에서의 인드라망을 의미할 수도 있겠고, 인연의 망을 의미할 수도 있겠고, 관계의 망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그 망들 뒤로 사람들이 사라지고 사물들이 흩어진다. 나비들이 나풀거리고 부처마저 희미해진다. 그렇게 사라지고 흩어지고 희미해진 화면이, 그리고 그렇게 더 깊어진 화면이 아득하고 막막한 우주를 떠도는 유성처럼 고독하고 적요해 보인다. 마침내 작가는 존재의 근원에, 존재의 자궁에, 존재의 원형에 도달한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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