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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회화에서 형상성 문제/ 의미의 산종, 의미를 파종하고 퍼트리는 의미들, 이미지들

고충환




동시대 회화에서 형상성 문제
의미의 산종, 의미를 파종하고 퍼트리는 의미들, 이미지들 


고충환 | 미술평론가


형상 미술. 원래 형상 미술은 1980년대 민중미술 진영에서 전통적인 아카데미 풍의 미술과 그리고 구상 회화와의 차별성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한 것에서 처음 유래했다. 당시 민중미술에서 유래한 용어로는 매체 미술도 있는데, TV와 신문 그리고 선데이서울과 같은 대중매체에 나타난 사회문화적 현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경향성의 회화를 의미했다. 형상 미술과 매체 미술은 말하자면 민중미술을 위한 실천 논리의 두 축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형상성을 획득해야 했다. 그 이론적 근거를 사회주의 리얼리즘 중 특히 게오르그 루카치의 이론에서 가져왔는데, 각 반영이론, 전형이론 그리고 총체성 이론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에서의 형상성(그리고 형상 미술)이란 당대적인 현실을 투명하게 반영하는 형상을, 현실을 관통하는 전형적인 형상을, 그리고 총체적인 국면을 반영한 형상을 의미했다. 민중미술에서 형상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도 바로 이런 극적 현실(극화된 현실)의 표현과 함께 전형적인 국면의 강조에 따른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네오팝과 극사실주의 회화. 2000년대 들어서(빠르게는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입과 함께 1990년대에 시작된) 변화된 미디어 환경이 초래한 회화의 죽음 논의 이후 재차 회화의 복권과 함께 회화가 신르네상스를 맞이한 적이 있는데, 그 배경에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을 중심으로 한 네오팝 경향이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통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물결에 반응하는 중국의 냉소적 사실주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다져진 인프라를 바탕으로 그들만의 독특한 형상 미술을 예시해주고 있는 일본의 재팬팝(혹은 마이크로팝), 그리고 한국의 코리안팝이 이러한 네오팝의 경향 아래 아우러진다. 

팝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일상성 담론으로 지지 되는데,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거대 담론이 지배하던 이념의 시대가 가고, 미시 담론과 개인적인 서사가 그 의미를 얻는 몸의 시대, 감각의 시대에 부상하고 있는 시대정신의 변화양상과도 그 맥을 같이 한다. 나아가 일상성 담론은 세계인식의 지형도마저 바꿔놓고 있는데, 위로부터의 역사 대신 아래로부터 수렴되는 역사를 표방한 아날학파의 역사적 태도와도 맞물린다. 몸의 역사, 성의 역사, 패션의 역사, 음식문화의 역사가 종래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 중심의 역사의 빈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그러므로 네오팝으로 나타난 회화적 경향성에 대해서는 이처럼 변화된 세계인식의 지형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으로 네오팝으로 범주화되는 경향성의 회화는 달라진 미디어 환경에도 강하게 연동되는데, 피부를 연상시키는 표면적이고 표피적인 질감과 흐릿한 초점 그리고 클로즈업된 근접 시점으로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회화(사진 같은 회화), 현실 속에서 소재를 찾기보다는 미디어와 인터넷 속을 떠다니는 한갓 정보로 화한 출처 불명의 익명적인 이미지를 자기화하는 경향성의 회화(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하기보다는 기왕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방식과 태도와 통하며, 기왕의 이미지를 숙주로 한 기생의 논리와 통한다), 그리고 제록스 프린터와 포토샵과 같은 미디어 고유의 성질을 이용한 기계적인 회화를 아우른다. 
그 결과는 대개 사진처럼 정교한 사실주의 회화로 나타나는데, 철저하게 사물의 표면이 강조되는 점이 특징이다. 사진과 인터넷 그리고 각종 영상 매체의 세례를 받은 사실상의 첫 세대랄 수 있는 신세대작가들의 회화적 경향성으로, 사물의 표면적이고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피부에 천착하는 그 생리가 사물의 전면을 강조하는 파사드(건물의 구조와 상관없이 덧댄 표면장식)와 맞닿아있다. 영화의 시퀀스와 스틸컷을 연상시키는 서사의 독특한 방식 역시 두드러져 보인다. 

한갓 사물에 특유의 아우라를 부여해 정서를 자극하는 연출 사진(그리고 이미지)이나, 온갖 현란한 이미지들로 감각을 자극하는 광고 이미지들이 유혹하는 사물을 넘어 유혹하는 이미지들의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현대인의 처지를 대변해준다. 흘러 다니거나 흘러넘치는 이미지들(특히 낮보다는 밤에 광고판이 뿜어내는 이미지들을 보고 있으면 이러한 표현이 단순한 수사가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이 도시적이고 영화적인 감수성과 통하며, 이는 그대로 네오팝 그러므로 신사실주의 경향성의 회화로 범주화되는 이 작가들의 내면에 자리한 감수성을 말해준다. 


브리콜라주.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생겨난 새로운 창작의 경향성으로, 서로 무관하거나 이질적인 단편들을 한자리에 그러모아 그럴듯한 제3의 무언가를 재구성해내는 경우를 말한다. 혼성풍경, 합성풍경으로 나타나며, 인터넷을 통한 서핑과 매핑, 편집과 재구성 혹은 해체와 재구성, 그리고 탈맥락과 재맥락과 통한다. 모든 의미는 그 자체 공허한 추상적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맥락 속에서만 의미는 비로소 의미가 된다. 맥락이 의미를 결정하고 생성시킨다. 그러므로 모든 의미는 맥락 결정적이다. 그런 만큼 맥락이 바뀌면 의미 또한 달라진다. 다르게는 관계의 재구성(관계의 기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도시 회화. 어반아트 혹은 시티스케이프. 현대인은 모두가 도시인이다. 그가 비록 자연과 더불어 살 때조차 적어도 그의 의식만큼은 여전히 도시적이라면 그는 사실상 도시인에 다름 없다. 도시는 그렇게 지정학적 장소를 넘어 현대인의 의식적인 장소가 되었다. 

정직성이 기획한 전시 <장면들- 도시 회화>(2006.3. 한전프라자 갤러리)와 <도시회화의 행방>(2007.11. 신한갤러리>을 계기로 공론화된 개념이다. 주요 작가로는 패턴화된 연립주택의 구조에 주목한 정직성, 70, 80년대 건립된 아파트를 아카이브 형태로 재구성한 정재호, 도시 문명을 거대한 쓰레기 산수에 비유한 이문주, 도심 속 외곽과 변두리 풍경을 재현한 노충현, 각종 공사 현장을 뒤덮고 있는 타폴린 방수포를 소재로 한 금혜원, 재개발 현장을 그린 박용일의 <어수선한 풍경>, 테이프 회화의 박상희를 들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아이콘으로 청계천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플라잉시티, 각종 재개발 아파트 프로젝트를 기획 전시한 윤현옥 역시 이 범주에 든다. 


자연을 상실한 시대에 자연을 그린다는 것.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자연을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샤머니즘과 토테미즘, 물활론과 범신론과 같은, 영적인 존재는 차치하고라도 말 그대로 살아있는 자연 같은 것은 이제 없다. 최소한 의미를 상실했다. 한적하다 싶으면 송전탑이 가로 막고 서 있고, 유휴지와 같은 자투리땅에는 어김없이 크고 작은 공원(인공정원?)이 조성돼 있다. 이제 군 초소는 전원풍경의 일부가 되었으며, 산 정상에는 헬리콥터를 유도하기 위한 H자가 바닥에 흰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 

그런가 하면 외진 곳일수록 산세도 빼어나 그만큼 등산객도 더 많이 찾는다. 이처럼 사람들로 북적이는 산이 아닌, 적막강산을 생각하기도 어렵다. 등산객은 말하자면 동시대적 풍경에 빠질 수 없는 한 요소가 된 것이다. 이런 풍경(인공풍경?) 대신 오히려 관광엽서와 휴양지 광고 브로셔 그리고 내셔널지오그래픽에 등장하는 빙하와 화산, 물개와 펭귄이 더 친숙하고 더 살갑다. 이제 자연은 더이상 비의를 품지도 주술을 부리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흘러간 옛 노래로 향수를 달래거나 풍문으로 떠돌 뿐. 이런 상실의 시대에 자연(자연 자체)을 그린다는 것, 그리고 풍경(자연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을 그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의미와 씨름하는 일군의 작가들이 있고, 경향성의 회화가 있다. 

존 버거는 18세기 풍경화, 그러므로 어쩌면 초기에 풍경화가 자본과 권력의 표상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했다. 영주의 영지를 암암리에 혹은 공공연하게 표시하고, 공표하고, 감시하기 위해 그려졌다는 말이다. 풍경은 풍경일 뿐이라는 비판이 당시에도 있었지만, 새겨들을 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자연의 의미가 퇴색된 상실의 시대에 자본주의적 풍경 혹은 욕망의 풍경, 그리고 제도적 풍경을 그리는 일군의 작가들이 있고, 어쩌면 존 버거의 후예로 불러도 좋을 작가들이 있다. 


젠더와 섹슈얼리티 그러므로 성 정체성 문제. 성 정체성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물학적 결정론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관습의 결과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면서 비결정적인 성 정체성을 실천 논리로 풀어낸 일군의 경향성의 작가들을 지칭한다. 현재 성 정체성 논의는 일종의 개념의 교차로에 비유할 수 있다. 이를테면 동성애와 에이즈, 몸 담론, 정상성과 비정상성 논의, 페미니즘과 재현의 문제, 성과 권력의 관계와 같은 주요한 핵심 논제들이 성 정체성 개념(혹은 담론)으로부터 파생되고 연동된다. 

1960년대 영국을 중심으로 한 문화운동의 와중에서 정식화된 담론으로 주요 논객으로는 프로이트의 억압된 것들의 귀환,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코라와 애브젝션, 루이스 이리가레이의 여성적 글쓰기, 자크 라캉의 주이상스와 상상계, 슬라보예 지첵의 실재계, 미셸 푸코의 성과 권력, 조르주 바타이유의 잉여와 에로티시즘, 수잔 손탁의 퀴어, 질 들뢰즈의 욕망의 용법과 관련이 깊다. 


미니어처 조각. 주로 화학 합성품인 스컬피를 소재로 하지만, 씹다 만 껌이나 알약 같은 일용품을 소재로 취하기도 한다. 주로 손가락 하나 크기의 조각이 많지만, 이쑤시개 반 토막만 한 조각도 있다. 주요 작가로는 현대인을 제도에 길들여진 애완동물에다 비유한 함진, 현대인을 폐기물과 재활용품에다 비유한 이동욱, 남근에다 자족적인 인격을 부여한 권재홍을 비롯해 최수앙의 초기 작업을 그 예로 들 수가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대개는 일종의 그로테스크리얼리즘(미하일 바흐친에서 유래한)으로 부를 만한 낯설고 이질적이고 시니컬한 비전이 특징이다. 


탈조각. 탈조각 개념 자체는 진작부터 제기된 것이지만, 서울시립미술관이 기획한 <조각적인 것에 대한 저항>(2009.11) 전시를 계기로 공론화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당시 기왕의 설치미술의 한 경우 내지는 조각의 확장으로 봐야 한다는, 탈조각의 개념에 대한 이견들이 있었다. 그 범주로는 빛 조각(라이트아트), 공기 조각, 소리 조각(사운드스컵처), 부드러운 조각(소프트스컵처)을 아우르며, 주요 작가로는 쇳가루를 소재로 한 김종구, 머리카락을 소재로 한 함연주, 망 조각의 김세일, 중력 조각의 전강옥, 그림자 조각의 차상엽이 포함된다. 유사개념으로 비물질조각이 있다. 

역할극(혹은 역할 놀이). 역할극이란 참여자가 주어진 상황에서 특정 역할을 맡아 연기하는 극의 한 형식을 말한다. 대개는 인터뷰의 형식을 빌려 상호적인 관점과 상호이해관계를 인식하는 과정을 거친다. 대략 이주노동자와 다문화 가정 혹은 사회를 다룬 믹스라이스, 박경주, 임민욱, 베트남 이주여성과 인터뷰한 조혜정, 스스로 군사독재 시절 정치군인으로 분장한 조습의 작업을 아우른다. 그리고 그 형식으로 치자면 자신이 여왕임을 가정한 여자들과 인터뷰한 천 경우(사진 퍼포먼스), 패션모델로 분장한 친모를 소재로 한 파야의 작업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 대개 사회적 약자 내지는 소수자를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가 강한 편이다. 

신체 풍경, 바디스케이프의 경우. 바바라 크루거는 당신의 몸은 전쟁터라고 했다. 몸은 개인의 정체성이 등록되고 지워지고 수정되고 재기입되는 등기부다. 누가 등록하고 누가 지우는가. 누가 호명하고 누가 재현하는가(루이 알튀세의 이념적 주체). 그렇게 호명되고 재현된, 등록되고 지워진 등기부와 더불어서 개인은 비로소 사회적 주체 혹은 제도적 주체로서 태어나고(혹은 거듭나고) 페르소나(페르소나의 어원은 가면에서 왔다)를 덧입는다. 역할극의 극중 인물을 사는 것이다. 이처럼 신체 풍경은 분열을 포함한 심각한 자기 정체성 문제를 표상한다. 

심리풍경, 마인드스케이프의 경우. 풍경은 외계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다. 외계를 집어삼켜 내면화한 해석의 산물이며, 외계와 내면, 외계와 주관과의 긴밀한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다. 이때 내면과 주관의 의미 비중이 상대적으로 커지면 그 풍경은 심리풍경 혹은 내면 풍경이 된다.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의 회화로서, 해체와 재구성의 경향이 있다. 신체가, 의식이, 주체가, 세계가 파편화된 부분들로 해체되고 등가치를 이룬다. 그리고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재구성된다. 여기에 초현실적인 자동기술과 자유연상 기법이, 그리고 의식의 흐름 기법(마르셀 프루스트)이 결부되면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시공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계의 풍경을 예시해주기도 한다. 


문명사적인 풍경의 경우. 창작 주체의 머릿속은 세계가 개조되는 수선의 장이며(앙드레 말로는 사람들이 저마다 상상의 미술관을 머리에 이고 다닌다고 했고, 발터 벤야민은 예술가를 망가진 세상을 고치는 수선공에다 비유한다), 온갖 이질적인 삶의 편린들이 한 줄기로 합류돼 흐르는 통합의 장이며 통섭의 장이다. 그렇게 충돌되고 스며든 이미지의 다발들이 혼성의 비전을 열어 놓는데, 문명 간의 충돌 현상 내지는 상호영향사의 견지에서 볼 만한 부분이 있다. 크레올성 문화와 함께 유목주의의 관점에서 볼 만한 부분이 있다. 

여기서 유목주의는 말할 것도 없이 사유의 유목을 말하며, 의식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사유 속에서 인간과 동물이 중첩되고, 인간과 문명의 이기가 오버랩된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문명 간 관계가 재설정되는 것에서 나아가 사물과의 무차별성마저 실현되는 어떤 세계의 비전을 예시해준다. 나와 너, 자와 타, 주와 객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재설정되고 재구조화되는 어떤 차원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패러디, 그러므로 차용의 경우. 패러디는 일체의 덧붙여진 것들, 첨언과 첨삭, 부언과 부연, 주석과 인용 등 온갖 의미와 의식의 보충물들로서 세계를 부풀리고 변질시킨다. 엽기, 통속, 컬트, 인형, 더미(Dummy), 마네킹, 좀비 등 온갖 인간의 보충물들로부터 유래한 낯설고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기존의 친근하고 동질적인 이미지들에다 편입시키고 그것들을 하나로 섞어 놓는다. 세분화하기보다는 짜 맞추고 접붙이기에 익숙한 패러디는 이처럼 다양하고 이질적인 이미지의 지층들을 가로지르며, 의미들을 분절시키고, 세계를 변질시킨다. 

추상과 형상의 경계, 회화적인 너무나 회화적인. 동시대 추상미술(?)은 추상미술을 지지하고 견인해온 모더니즘 패러다임은 물론이거니와 어떤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형식을 해체하면서, 가능한 모든 형식을 불러들여 재편하고 재구성하면서, 심지어 필요하다면 재현과 구상마저 마다하지 않는다. 여기에 어떤 식으로든 현실과 실제(실재?)로부터 추상 된, 그래서 현실과 실제의 접점 혹은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것도 최근 추상의 경향 혹은 특징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게르하르트 리히터는 그 자체 추상이기만 한 추상 그러므로 소위 순수추상 같은 것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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