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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일, 철 조각으로 (탈)문명 사회의 표상을 그리는

고충환




정춘일, 철 조각으로 (탈)문명 사회의 표상을 그리는 


고충환 | 미술평론가


작품은 형태, 시간, 공간, 색감이기 이전에 삶 자체라고 생각한다. 삶의 형태를 붙여내는 것, 내가 소비했던 시간만큼 작품 속에 사용된 녹슨 쇳덩이들은 나의 근육이다. 곱고 부드럽지는 않아도 나의 갈비뼈가 되고 분신이 된다. 작품은 삶의 무게만큼 확실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 작가 노트

여기에 한 사람이 있다. 발가벗은 모습으로 양팔을 벌린 채 온몸으로 바람을 맞고 서 있다. 앙상하게 드러난 뼈와 떨어져 나간 살점으로 너덜너덜해진 피부가, 그리고 여기에 바람에 저항하기라도 하듯 마구 휘날리는 머리가 자못 비장한 느낌이다. 마치 에케 호모 그러므로 이 사람을 보라는 니체의 외침을 듣는 것도 같고 보는 것도 같다. 니체는 자기를 궁지로 내몰아라, 그러면 자기 내면이 열릴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니체에게 이 사람은 자기 내면에서 걸어 나온 사람이며 초인이다. 정작 작가는 이 사람이 예술가의 초상이라고 했다. 어쩌면 자화상(자소상)일 것이다. 세상에 맨몸으로 맞서는 자의, 바람에 살점을 내어준 자의, 비극적 인간의 자의식이 보는 이를 숙연하게 만든다. 

밀란 쿤데라는 현대인의 삶이 비극적인 것은 비극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비극이 부재한 것이 아니라, 비극에 대한 감이 부재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비극은 삶을 정화한다. 그러므로 비극을 상실했다는 말은 삶에 대한 정화기능을 상실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정작 현대인이 상실한 비극을 온몸으로 맞아들인다. 레비나스라면 자기_타자를 초대해 들인다고 했을 것이다. 시대에 뒤 쳐진 것일까. 그렇다기보다는 인간실존에 대한 체질적인, 그러므로 어쩌면 운명적인 끌림이 있었다고 할 수밖에. 작은 이야기(미시 서사)가 지배적인 시대에 오히려 큰 이야기(거대 담론)에 대한 견인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이 지극한 비장미며, 생생한 비극적 감정은 다 무엇인가. 해부학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고, 인간에 대한 이해와 존재에 대한 연민 그러므로 타자에 대한 공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실감 나는 사람이며 생생한 감정을 작가는 고물로 만들었다. 알다시피 고물(기물)은 디자인 단계에서부터 기능을 따르도록 고안된 기능주의의 산물이다. 고유의 형태가 있어서 고물을 소재로 사람 형상을 빗기도 어렵고, 더욱이 감정을 전달하기는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살과 피가 흐르는 형상을 빗을 수 있었던 이면에는 작가의 타고난 감각과 함께, 치열한 형식실험과 시행착오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기계 부품과 같은 폐기된 공산품 쓰레기를 이용해 재구성하는 방법으로 사람을 만들고,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는 가족을 만들고, 말과 같은 이런저런 동물들을 만들고, 오토바이와 같은 기물을 만들고, 가면을 만들었다. 소재로 치자면 일상적인 것이면 못 만들 것이 없다는 느낌이다. 자유자재한,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상적 소재가 친근함을 자아내고, 고물 고유의 형태가 형태적 유사성을 떠올리게 하면서 설핏 웃음을 자아내고, 심지어 앞서 본 비장한 예술가의 초상에서마저 유머와 위트, 해학과 풍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를 넘어 사람과 사물이 등가치를 이루는, 그리고 그렇게 무차별성을 예시해주는 것이 사해동포주의를 떠올리게 만들고, 이로써 차이 나는 모든 존재를 하나로 싸안는 따스한 시선이 묻어난다. 

여기에 흥미롭게도 작가는 가면(철 가면)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업을 얼굴이라고 부른다. 주지하다시피 가면은 페르소나 그러므로 사회적 주체를 의미한다. 보통은 그 가면 뒤에 또 다른 얼굴이 숨어있는 것인데(그러므로 분열은 인간의 잠재적, 보편적, 실존적 조건이다), 그럼에도 가면을 얼굴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렇다면 마침내 가면이 얼굴이 됐다는 의미일까. 너무나 오랫동안 가면을 쓰고 산 나머지 마침내 얼굴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풍자한 것일까. 가면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업이 적어도 이러한 자기반성적인 문제, 정체성 상실과 혼란의 문제를 주제화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고물을 소재로 한 작가의 작업이 어떤 미술사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보자. 고물을 소재로 했으니 정크아트고, 더러 움직이기도 하는 것이니 키네틱아트다. 상호 간 이질적이고 무관계한 것들이 하나로 결합 된 것이니 컴바인아트고, 잡동사니들을 끌어모아 제3의 무언가 그럴듯한 형상을 빗어냈으니 브리콜라주다. 철물을 소재로 했으니 스틸아트고, 금속을 소재로 했으니 메탈아트다. 이 정도면 작가의 고물상(그러므로 작업실)은 가히 현대미술의 형식실험장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신사실주의를 창시한 피에르 레스타니는 폐기된 공산품 쓰레기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리얼리티라고 했다. 그래서 신사실주의라고 명명했지만, 정작 피에르 만조니나 이브 클라인과 같은 신사실주의로 분류되는 작가들에게서 그 실제적인 경우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시공을 초월해 작가의 작업에서 그 진정한 실현을 보고 있다는 현실이 아이러니하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폐기된 공산품 쓰레기에 반영된 시대적 리얼리티를 획득하고 있고, 이로써 공산품 쓰레기(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오브제와 레디메이드)가 그려 보이는 현대미술의 또 다른 신(장면)에 등록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트포베라가 있다. 가난한 미술이라는 의미다. 여기서 가난한, 이라는 말은 빈약한, 부실한, 그러므로 말 그대로 가난한, 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술적 매개와 간섭을 최소화한다는 말이다. 사물 그대로의 본성을 존중한다는 말이고, 사물 그대로가 이미 예술적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보기에 따라선 일본의 모노하(물파)와도 통하는, 또 다른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의 경우 고물을 재구성한다는 차이가 있지만, 크게는 고물 그러므로 사물 자체를 작업으로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에 대한 입장을 같이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작가의 작업은 후기구조주의에서의 맥락 문제와도 맞물리는 부분이 있다. 후기구조주의에 의하면, 의미 자체는 공허한 추상적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의 의미가 성립하는 것은 언제나 어떤 맥락 속에서이다. 맥락 결정적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맥락이 의미를 결정하는 만큼, 맥락이 달라지면 의미 또한 달라진다. 그렇게 작가는 탈맥락과 재맥락을 매개로 사물의 또 다른 존재 방식을 드러내고 제안한다. 사물이 원래 속해져 있던 맥락으로부터 떼어내(탈맥락) 다른 맥락 속으로 집어 넣는다(재맥락). 그렇게 폐기된 공산품 쓰레기에 혼(아우라)을 불어넣어 예술작품으로 재생시킨 것이다. 그리고 사물들을 끌어모아 재구성한 작가의 주체(특히 예술가의 초상에 나타난)가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라는 후기구조주의의 주체에 대한 관념을 그대로 형상화해놓고 있는 것도 같다. 


프랭크 스텔라의 아마벨은 비행기의 기체와 잔해를 이용해 만든, 폐기된 공산품 쓰레기로 재정의되는 현대 (탈)문명 사회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작가 역시 어쩌면 그처럼 또 다른 기념비적인 표상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발터 벤야민은 새로운 모든 것이 시간 속으로 미끄러지면서 멜랑콜리와 노스텔저를 자아내는 사물 대상으로 전이될 운명에 처해 있다고 했고, 그 운명을 오래된 미래라고 불렀다. 작가의 작업을 이루는 기물 중에도 이처럼 한때 첨단 그러므로 미래를 대변했을 기물도 있을 것이지만, 지금은 그저 향수와 그리움을 자아내는 사물 대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마치 유년 시절 가지고 놀던 장난감 병정놀이에서처럼. 그렇게 버려진 것들에 혼을 불어넣어 재생한 작가의 작업이 상실된 계절에 향수를 자아내고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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