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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의 마스터피스/ 구성과 군상 사이, 가난한 미술이 위대한 예술을 얻는

고충환



이응노의 마스터피스/ 구성과 군상 사이, 가난한 미술이 위대한 예술을 얻는 


고충환 | 미술평론가


이번 전시는 대전에서 열린 세계지방정부연합(UCLG) 총회를 기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역분권주의 곧 지방정부의 정착과 발전을 지지하는데 그 의의가 있었던 만큼 지역을 대표하면서 동시에 세계적 미술가이기도 한 이응노미술관이 기념 전시를 열게 된 것은 행사의 취지에도 부합한다는 생각이다. 

이응노미술관에서는 미술관 소장품 약 1400여 점 중 연대별 장르별 대표작을 엄선해 전시를 열었던 만큼 각 구성과 군상 시리즈로 대표되는 이응노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한편, 조각과 판화, 도불 이전의 작품과 옥중미술과 같은, 다른 전시에서는 보기 어려운 작품들이 대거 선보이게 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응노는 동아시아의 서화 전통을 바탕으로 추상이라는 세계 미술사의 흐름을 수용,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창조한, 한국의 미(지역주의)를 바탕으로 세계 미술사(코스모폴리타니즘)에도 통용되는 지평 융합을 실천하고 실현한 작가로서, 이번 전시를 통해서 그 실천적 면면과 성과를 확인해볼 수 있을 것이다. 


도불 이전. 작가는 일본 유학과 뉴욕 전시를 거쳐 1958년 도불했는데, 도불을 전후한 작품들, 이를테면 <성장>(1950년대), <수중유희>(1964), <취야>(1950년대), <공사장 인부들>(1950년대), <영차영차>(1951년대 후반)를 보면 노동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과 같은 일상을 사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해놓고 있다. 당시 먹그림의 주류라고 해도 좋을 산수 대신 생생한 삶의 현장을 주제로 한 것이란 점에서, 관념(이를테면 관념산수와 같은) 대신 현실에 주목한 것이란 점에서 현실주의자로서의 면모를 확인해볼 수 있다. 

이처럼 현실에 바탕을 둔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것이 <성장>과 <수중유희>라고 생각되는데, 한참 이후에나 작가의 메인 작업으로 자리하게 될 경향성의 회화, 이를테면 <군상> 시리즈의 원형을 예시해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당시 제작된 작품으로 주목되는 것이 <묵죽도 8폭병>(1940년대 후반)과 같은 일련의 묵죽도인데, 시서화가 일체를 이룬 문인화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면서, 동시에 작가의 다른 작업이 유래한 배경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주지하다시피 먹그림은 필의 성격이 결정적인데, 작가 특유의 필력으로 인해 댓잎이 이후 새와 사람과 같은 다른 형상으로 변형 변주된다고 본 것이다. 도불 이후 이런 먹그림이 당시 유럽 현대미술을 풍미했던 앵포르멜의 한 경향, 이를테면 서체에 바탕을 둔 캘리그래피를 변형하고 변주한 경향성의 회화와도 의미 있는 영향 관계를 형성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각과 판화와 콜라주. 이응노는 표면적으로 한국화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먹그림과 함께 조각과 판화와 콜라주 그리고 여기에 태피스트리까지 넘나드는 전천후 작가였다. 요새로 치자면 진즉에 탈장르를 실천하고 실현한 작가였다고 해야 할까. <얼굴>(1964), <토템>(1964, 1966), <군상>(1967-69, 1973, 1977, 1980, 1981, 1985), <구성>(1980년대, 연도 미상), <군무>(1979) 등 작가의 조각을 보면 주로 목조가 많고, 여기에 암각화를 포함한 석조도 있다. 재질 상 특이한 경우로 밥풀과 종이를 짓이겨 만든 조각도 있는데, 작가의 옥중미술의 백미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환조와 저부조를 망라하고 있고, 특히 저부조의 경우에는 엠보싱과 함께 판화로도 확대 재생산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형태상 특징을 보면 얼굴을 위로 쌓아 올리는 토템폴 형식의 조각이 많은데, 주술적 염원을 담은 전통적인 조각의 형태를 차용하고 변용한 경우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특히 <군상> 시리즈에서 구멍이 숭숭 뚫린 입체 조각이 인상적인데, 특히 현대조각에서 구멍은 헨리 무어에 연유한 것으로서, 양감 곧 덩어리 중심에서 공간 중심으로 조각의 어휘를 확장한 계기로 평가된다. 여기에 빗과 비(빗자루)와 같은 오브제를 연상시키는 작업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조각을 통해서도 당시 현대미술을 위한 형식실험을 다방면으로 전개해온 것으로 확인된다. 

자료를 보면 1969년에 프랑스 누벨 이마쥬 출판사에서 고암의 옵셋 판화집을 제작했고, 1973년에는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이 주최한 <현대판화전>에 초대 받았으며, 1977년에는 고암이 가르치던 동양미술학교 수강생들의 전시를 위해서 개설한 파리 고려화랑(부인 박인경 여사가 운영하는)에서 <이응노 판화전>이 열렸다. 현재 전해지는 판화와 관련 자료들, 파리 국립도서관 전시에 초대받은 것(전통적으로 유럽에서는 도서관에서 판화 전시가 열렸다), 그리고 판화 모음집이 출간된 것으로 보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판화는 고암 작업 세계의 뚜렷한 한 축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1962년 파리 파케티 갤러리에서 작가의 첫 개인전 <이응노 콜라주> 전시가 열렸고, 이 전시에서 작가의 다양한 콜라주 작품들이 선보였다. 그 중 동일한 크기의 두 점 작품 <구성>(1961)을 보면 검은 화면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수묵의 정서적 질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콜라주를 발명한 현지 작가들에게는 자기들과는 사뭇 혹은 많이 다른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점조직이 모여 유기적인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나 물성이 두드러져 보이는 추상 화면이 입체파와 미래파 그리고 다다에 바탕을 둔 콜라주, 이를테면 인쇄물과 같은 평면 오브제가 훼손되지 않은 채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거나(파피에콜레), 시사성을 암시하는 경우(정치적 오브제로서, 1980년대 국내 매체 미술에서도 일정한 영향 관계를 확인해볼 수 있는), 그리고 붙였다 떼어낸 흔적을 강조하는 경우(데콜라주)와는 다른 것이었다. 
물성을 강조한 추상이란 점에서 보면 오히려 당시 유럽화단의 앵포르멜의 회화적 경향성과 통한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작가의 작업 중 서양 위주의 주류 현대미술의 동시대적 경향성과 호흡을 같이하면서도 자기만의 오리지널리티를 획득하고 있는 보기 드문 경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후 작가는 본격적인 콜라주 작업이 아니더라도, 다른 그림에서나 판화에서 곧잘 콜라주를 부분적으로 도입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일이다. 


구성과 군상 시리즈. 작가의 작업을 주제별로 보면 주로 70년대 제작된 <구성> 시리즈와 80년대 제작된 <군상> 시리즈, 이렇게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사실적 재현과 사의적 재현, 서체 추상과 문자 추상, 콜라주와 태피스트리, 평면과 입체, 그리고 말년에는 인간을 소재로 한 군상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시종 특정의 형식이나 내용에 구속받지 않고 종횡무진했던 화가의 편력이 자기표현을 얻는 장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주로 1970년대 제작된 구성 시리즈를 통해서는 도불 직후인 1960년대의 자유분방한 형식의 한지 콜라주를 본격적인 문자 추상으로 발전시켰으며, 1980년대 제작된 군상 시리즈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은 한국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에 대한 응답을 내놓으면서도, 동시에 시대를 초월한 인간 일반의 보편적인 존재론적 조건을 표상해놓고 있다. 

그 밑바탕에 서체가 있고, 서체에 대한 변용이 있다. 구성도 군상도 모두 서체에서 왔다(참고로 1974년 아닉 르므완 갤러리에서 작가의 <서예전>이 열리기도 했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서체는 상형문자에서 왔다. 문자의 뜻이 형상으로 오롯하다는 말이다. 그 속에 사람도 있고, 산수도 있고, 자연도 있고, 우주도 있다. 사람인가 하면 산 같기도 하고, 나문가 하면 달처럼도 보인다. 문자로 읽으면 하나의 의미를 얻지만, 이미지로 읽으면 결정적인 의미가 따로 있을 수가 없다. 이미지로 읽는 순간, 모든 형태의 의미가 열리는 것(마치 움베르토 에코의 열린 예술작품에서처럼). 인디오의 그림문자에서처럼, 파라오의 상형문자에서처럼 문자와 이미지를 넘나들고 의미와 그림을 아우르는 상호 관계적이고 상호 내포적인 성질이, 그 비결정적인 성질이 서양 사람들에게도 호기심과 함께 호의적인 반응을 동시에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국내외적으로도, 특히 국내적으로 문자 추상을 변용한 경우들이 있어서 작가와의 영향 관계를 따져 묻는 것도 향후 미술사적으로 정리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군상 시리즈에 대해서는 서체가 사람과 같은 다른 형상으로 변용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재구성하는 일이, 서체의 변용에 바탕을 둔 서양의 회화적 경향성과의 상호 영향 관계를 정립하는 일이 미술사적 과제로서 주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밑바닥에 면면히 흐르는 인간애와 존재론적 연민에도 주목해볼 일이다.
 

옥중미술. 주지하다시피 이응노는 1958년 도불해 파리에 정착한 후, 1989년 호암미술관 초대 전시에 참석하지 못한 채 파리 현지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그동안 1967년 동베를린(혹은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2년 6개월 옥고를 치른 것 외에 사실상 국내에 정착한 일이 없다. 작가는 투옥된 와중에도 종이, 천, 돌멩이, 비닐, 은박지, 밥알과 신문지를 반죽해 만든 재료로 작품을 제작했고, 당시 제작된 작품을 따로 옥중미술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후 백건우 윤정희 납치사건에 휘말리는 등 작가는 윤이상과 함께 왜곡된 정치적 현실의 희생양으로서의 삶을 감내해야 했다. 그런 만큼, 아니 그래서 오히려 더 도불 이후 형식실험의 와중에도 도불하기 전 한국화에 대한 뿌리 근성이 작업의 밑바닥에 면면히 흘렀던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동서양을 아우르고 넘어서는 자기만의 독창적인 형식을 이룰 수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 작가는 한지에 먹 대신 간장으로 그림을 그렸고(1968년 구성), 밥알과 종이를 짓이겨 입체 군상을 만들었다(1967-69년 군상). 1967년에는 재판을 받던 작가가 점심으로 받은 나무 도시락을 해체해 먹다 남은 고추장과 간장으로 색을 입혀 입체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1967년 구성). 서양 미술사에 보면 아트 포베라가 있다. 가난한 미술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가난한 미술이란 말 그대로 가난한 미술이 아니라, 가급적 예술적 개입과 매개를 최소화한 미술을 의미한다. 사물 그대로를 드러내고 제안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모노하(물파)와도 통한다고 보면 되겠다. 대략 그런 의미지만, 작가의 옥중미술이야말로 아트 포베라 곧 가난한 미술이라는 말과 의미 그대로를 즉자적으로 표현하고 실현한 경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가난한 미술이 위대한 예술을 얻은 역설적인 경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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