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강유림, 흔들리는 눈빛과 공허한 마음

고충환



강유림, 흔들리는 눈빛과 공허한 마음 


고충환 | 미술평론가


너를 본다. 시선이다. 그 순간, 너도 나를 바라본다. 응시다. 여기서 쳐다보는 주체의 시각이 시선이라고 한다면, 쳐다보여지는 객체의 시각이 응시다. 그렇게 심지어 내가 너의 등을 볼 때조차 너의 등도 나를 본다. 내가 사물을 보고 있을 때마저 사물도 나를 본다. 그렇게 나와 너는, 주체와 세계는 바라보는 행위를 매개로 비로소 관계 속으로 진입한다. 익명적인 존재가 살과 피가 흐르는 생생한 존재로 탈바꿈되고, 무의미한 존재가 유의미한 존재로 변신하고, 막연했던 존재가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온다. 그렇게 바라보는 행위는 모든 관계가 비롯되고 생성되는 기초가 되고 근거가 된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시선과 응시 그러므로 주체와 객체와의 관계에 대해 비관적이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서로 주체가 되려는 투쟁의 관계고 불통의 관계다. 그 관계를 매개하는 것이 시선인데, 심지어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없을 때조차 나는 끊임없이 너의 시선을 의식한다. 제도적 장치로 치자면 도덕과 윤리 그리고 양심의 형태로, 그리고 정신분석학으로 치자면 초자아의 경우로 잠복해 있는 너, 그러므로 실제로는 없는 너, 존재하지도 않는 너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고, 너 또한 그 경우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존재는 부조리하다. 불안하고 불안정하다. 


강유림은 이처럼 부조리한 존재를 그린다. 불안하고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존재의 눈빛을 그리고, 때로 공허한 눈빛을 그린다. 작가는 실눈과 뜬눈을 하고 싶다. 외면하고 싶을 때 실눈 속에 숨고 싶고, 보고 싶을 때 그리고 보아야 할 때 한쪽 눈만 크게 뜰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 바라보는 행위 그러므로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감정은 양가적이다. 이처럼 이중적인 타자 감정은 작가의 경우 일정하게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주제를 통해서 보면 <타인의 시선>(2020)이 그렇고, <타인_심심(深心)>(2022)이 그렇다. 얼굴을 클로즈업해 그린, 특히 눈 표정을 강조해 그린 그림이 오래된 것임을 인정한다면, 사실 그 주제 의식은 오랫동안 작가와 함께해온 것이라고 해도 좋다. 

여기서 심심(深心)은 이중적인데, 깊은 마음 특히 타자를 향한 이타심을 의미하고, 동시에 동음이의어로 치자면 심심한 상태 그러므로 공허한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 이타적이면서 심심한, 이타적이면서 공허한, 그러므로 이율배반적인(실존주의로 치자면 부조리한) 타자 감정, 흔들리는 타자 감정, 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자기_타자 감정을 작가는 공허하고 흔들리는 눈빛을 빌려 그리는데,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 좀 혹은 많이 그렇다는 점에서 작가의 그림은 공감을 얻는다. 

그렇다면 왜 공허한가. 왜 흔들리는가. 여기서 다시,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현대인은 저마다 이런저런 상실감을 앓고 있다. 지극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하는 징후이며 증상이라고 해도 좋다. 공허한 눈빛과 흔들리는 눈빛은 말하자면 상실의 눈빛이라고 해도 좋고, 그러므로 상실감을 질병처럼 앓고 있는 현대인의 징후와 증상을 표상하기도 한 것이란 점에서, 작가의 그림은 보편성을 얻는다. 


작가는 화면 가득히 얼굴을 그린다. 얼굴을 강조해 그린 것인데, 여기서 얼굴은 정체성을 상징하는 만큼 얼굴을 빌려 사실은 정체성을 그린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정체성은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로 분리된다. 사회에 내어준 주체 그러므로 사회적 주체, 타자가 욕망하는 주체와 그 욕망 뒤에 숨는 주체 그러므로 억압된 주체로 분열된다. 그러므로 일정 정도의(그리고 어쩌면 타고난) 분열은 인간 일반의 보편적인 조건이라고 해도 좋다. 여기서 얼굴은 페르소나에 해당하고, 가면_주체를 대리한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페르소나는 가면이란 말에서 왔고, 그런 만큼 우리 모두 얼굴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나는 네가 욕망하는 얼굴을 보여주고, 그 욕망에 부응하는 표정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사실을 말하자면 어쩌면 너는 결코 나(너의 욕망 뒤에 숨은 나, 그러므로 얼굴 뒤에 숨은 나)를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불안하고 공허한 눈빛 속에 있고,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눈빛 속에 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작가가 얼굴을 그리면서 유독 눈을 강조해 그린 이유가 여기에 있고, 시선과 응시가 교환되는 사건을 매개로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모두가 바라보기 그러므로 시선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을 읽고 싶고 얻고 싶으면 눈을 볼 일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눈동자의 표정이 인상적인데(어쩌면 결정적인데), 그 표정이 깊은 것도 같고, 흔들리는 것도 같고, 불안해하는 것도 같고, 방황하는 것도 같다.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도 같고, 실눈을 뜨거나 아예 눈을 감은 것도 같다. 쳐다보는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 것도 같고 막연한 것도 같다. 그렇게 눈의 표정을 종잡을 수가 없다. 불안하다. 공허하다.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우리는 말을 할 때 실제로는 더 많은 말을 한다고 했다(자크 라캉). 의식과 함께 무의식 그러므로 몸이 동시에 말을 하기 때문인데, 작가의 경우에는 눈이 말을 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흔들리는 눈빛, 공허한 눈빛을 통해서 이율배반적이고 부조리한 실존적 인간의 자의식이 하는 말을, 정체성 상실과 혼란을 겪고 있는 현대인의 징후며 증상이 하는 말을 전해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것이 작가 자신에게는 화두로 그리고 타자에게는 제안으로 제시된 주제에서처럼 심심(深心) 그러므로 이타심을 헤아리고, 타자를 향한 깊은 마음에도 가닿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 속 초상으로 나타난, 특히 눈으로 대리되는 정체성이 불안하고 불안정하다. 이중적이고 다중적이다. 공허하게 흔들린다. 앞서 그 원인을 상실에서 찾았지만, 여기에 외상 그러므로 트라우마를 보탤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에는 얼굴 밑으로 얼룩을 볼 수 있다. 거듭 반복되는 덧칠을 통해, 그리고 때로 이면에서 표면으로 밀어 올린 배채법을 통해 바탕화면에 크고 작은 비정형의 얼룩을 조성한 것인데, 그 위에 덧그린 얼굴을 유기적으로 받쳐주는 한편으로, 그 자체 얼굴 뒤에 가려진 주체, 욕망으로 억압된 주체, 그러므로 작가의 내면(혹은 무의식)과 외상(그리고 외상의 질감)을 표상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서 특기할 점으로 그림과 함께 일종의 문자 텍스트가 도입된 경우가 있어서 주목된다. 한문자를 각색한 이미지 혹은 흘림체를 도식화한 이미지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그 자체가 귀고리 혹은 반지 혹은 목걸이와 같은 장신구를 대신하기도 하고, 그림 속 서명을 대신하기도 하고, 아니면 그저 다른 모티브와 함께 그림 속 한 조형 요소로 환원되기도 한다. 얼굴과 혼연일체를 이루기도 하고, 얼굴과 함께 그림에 등장한 다른 부수적인 모티브의 한 부분으로 처리되기도 한다. 
마치 숨은그림찾기라도 하는 것 같은, 전통적으로 서화일체론에, 그리고 현대적으로 캘리그래피의 변주에 바탕을 둔 것도 같은 이 문자적 이미지로 말하자면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심경을 한문자 속에 그 의미를 함축해놓은 것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이미지 텍스트와 문자 텍스트가 혼연일체 된, 함축된 의미를 매개로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얼굴을 클로즈업해 그린, 지금까지 그림과는 사뭇 혹은 많이 다른 그림을 근작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인물화를 위한 또 다른 형식실험을 예시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번지면서 섞이면서 마치 마블링 기법과도 같은 비정형의 얼룩 효과를 가능하게 해주는, 그리고 여기에 은근하게 자체 발광하는 빛의 질감마저 느끼게 만드는 특수 안료를 부분적으로 도입해 그린 것이 그렇다. 옷과 같은 부분에 적용되기도 하고, 배경 화면을 대체하기도 한 이 안료 효과로 인해 그림은 좀 더 화려하면서도 은근한 또 다른 질감과 느낌을 주고, 여성스러움을 더 강조한 것 같기도 하다. 

그 자체 비결정적인 안료의 성질에서처럼 흔들리는, 흔들리면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그렇게 일종의 유격을 자기의 한 본성으로서 내포하고 있는, 정체성의 또 다른 한 표상으로, 그 표상의 질감적인(아니면 질료적인) 한 표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다음 그림에 대한 예고편을 예시해주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