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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야성, 야생, 야투, 그러므로 들에서 태어난

고충환




2022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야성, 야생, 야투, 그러므로 들에서 태어난 


고충환 | 미술평론가


또, 다시 야생.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계속 야생을 물어왔고, 지금 다시 또 야생을 되묻는다는 의미이다. 야생에 관한 한 계속 되물어도 좋을 만큼 결정적이고, 되물을 때마다 매번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고 파생한다는(마치 자크 데리다의 의미의 산종 이론에서처럼), 그렇게 열린 의미를 내장하고 있다는(마치 움베르토 에코의 열린 예술작품에서처럼) 의미이다. 

한글로 읽으면 그런데, 한문으로 읽으면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또, 다시야생(多視野生). 야생을 보는 다양한 시점과 다른 관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야생을 어떻게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것인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야생은 들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들은 말할 것도 없이 자연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들에서 태어났다는 말은 자연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자연은 알다시피 스스로 그런, 원래부터 그런, 이라는 의미이다. 무슨 말인가. 자연은 인간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본다고 했다(장자). 인간이 저를 뭐라고 부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인간이 저를 뭐라고 부르든 그 부름이 하나같이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념을 자연관이라고 하는데, 자연관과 자연은 다르다는 말이다. 결국 자연의 본성을 야생(그리고 야성)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념 바깥에서 묻지 않는 한(모리스 블랑쇼의 의미의 바깥에서처럼) 야생을 물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관념도 없이 어떻게 자연을, 그리고 야생을 물을 수 있는가. 또, 다시야생(多視野生)이라는 주제는 바로 이런 물음을 묻는다. 어쩌면 불가능한, 열린, 자연을 그리고 야생을 개념으로 축소 시키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의미가 있는 물음을 물어온다. 

주지하다시피 인류세 담론은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그러므로 지구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 인간이라고 본다. 이산화탄소와 같은 화석연료를 태우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염원을 넘어 플라스틱과 같은 인간이 만든 물질이 새로운, 그리고 어쩌면 회복 불가능한, 돌이킬 수 없는 오염원이라고 보는 것이다. 사태가 그런 만큼 자연에 대한 인간 중심적 사고를 탈피해 자연의 입장에서, 야생의 입장에서 자연을 대하는 것이 요청된다. 주객 합일에 바탕을 둔 현상학의 우주적 살 개념이나 동양에서의 물아일체 사상이 확대 재생산된 경우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주최 측은 또, 다시야생(多視野生)이라는 전시 주제의 실천 방안으로서 자연들(자연의 주름 구조에 대한, 뿌리줄기 그러므로 리좀에 대한 재인식?), 재야생, 그리고 다중성(종 다양성?) 담론을 제안한다. 특히 자연을 다시 야생의 상태로부터 인식하자는 사유에서 출발하는 재야생에 방점이 찍힌다. 재야생의 실천 논리로부터 자연들과 다중성 개념은 저절로 딸려온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재야생을 실천하는 작가들이 있다. 작가들은 대지의 소리에(아마르사이칸 남스라이야브), 매미의 합창에(애니시니만, PC 얀서 반 렌즈버그), 그리고 바다, 그러므로 자연의 소리에(김기철) 귀를 기울일 것을 제안한다. 자연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자연의 숨결을, 호흡을 같이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연과 하나가 되고 나서야 가능한 경지일 것이므로 결국 자기를 명상적 계기 위에 놓는다는, 재설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베티노 프란치니는 타조가 땅에 머리를 박고 있는 형상을 형상화했는데, 아마도 자연에 대한 인식론적 한계를 지적한 것일 터이다. 한나 키셀로바가 순수한 자연의 세계로 안내하는 통로를, 그리고 허진권이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재생을 얻는 계기를 열었다. 그리고 홍이현숙은 은닉된 에너지를 제안한다. 사람들이 입었던 옷을 수거해 흙과 함께 층층이 쌓은 작업으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재설정되고, 사회적 에너지와 자연 에너지가 하나로 합일되는, 그리고 그렇게 정화되고 재생되는 과정을 형상화한 것일 터이다. 자연을, 생명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풀어낸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폐비닐 봉투를 소재로 한 윤진섭/오더의 설치작업 역시 이런 사회학적 관점에서 자연 미술을 풀어낸 경우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켈리 고프는 연속선의 구조물을 조형했는데, 연속된 곡선을 통해, 파장과 파문을 그리며 확장과 환원 운동을 반복하는, 자연의 유기적인 생명성과 운동성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자연의 유기적인 생명성을 곡선에서 찾은 훈데르트 바서가 생각나는 대목이다(바서 자신이 자연 미술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김도희는 집인지 무덤인지 아리송한, 경계 위의 형상을 조형했다. 자신의 몸을, 몸의 생리를, 몸에서 유래한 신체 분비물을 도구적 물질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애브젝트가 주목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아마도 삶과 죽음이 하나로 연속된 삶의 그러므로 죽음의 알레고리를 형상화한 것일 터이다. 단절된, 삶과 죽음의 연속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조르주 바타이유를 떠올려보게도 된다. 
그리고 킨거 코바치는 작업을 통해 문명사회와 자연이 처음의 균형상태를 회복해야 할 것을 주장했는데, 자연의 도구화가 초래한 작금의 상태에 대한 자기반성적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현은 예술을 위해 희생된 것들을 위한 기념비를 조형했다. 예술을 위해 희생된 것들? 자연? 예술과 주술? 예술에서마저 자연을 도구화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까. 적어도 예술에 관한 한 자연의 회복에 바쳐져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라제시쿠마르 파르마르는 말을(메신저), 로저 리고스는 거대한 말벌집을 조형했다. 아마도 인류문명이 매개되지 않은 상태, 그러므로 자연 그대로였다면 작가의 작업에서처럼 말벌집이, 말벌이 위협적으로 다가올 만큼 커졌을 수도 있겠다. 자연의 관점에서 생각해본 것이란 점에서 재야생이라는 전시의 실천 논리에도 부합하는 한편, 처음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감을 환기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티에리 테네울은 자연의 바벨탑을 건립했다(바벨 그린). 원래 바벨탑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다는 인간의 오만을 상징하고, 무모한 문명을 상징한다. 그런 만큼 자연이 만든 바벨탑은 이런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문명에 대한 반어법적 표현을 담았을 것이다. 

그리고 허강은 달빛 드로잉을, 황성준은 징의 여정을 조형했다. 각각 서정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원초적인 생명을 환기한다는 측면에서 자연에 접근하고 공감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그룹프로젝트_몽골이 자연과의 상관관계를 제안했는데, 같은 주제 의식으로 고민했다는 점에서, 말하자면 자연 상태 그대로의 관계(항)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모노하(물파)를 떠올리게도 된다. 한편으로 차기율은 방주와 강목 사이를 순환하는 여행을 조형했다. 여기서 방주는 노아의 방주로 대변되는 서양문명을, 그리고 강목은 본초강목으로 대변되는 동양의 자연 의학을 상징한다. 동양과 서양, 문명과 자연의 상관관계를 조형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말라죽은 포도나무를 얼기설기 엮어놓은 구조물인데, 놀랍게도 하나로 연결된 뫼비우스의 띠의 형상을 하고 있다. 복잡계의 순환구조를 조형한 것이고, 세상만사 아무리 복잡해 보여도 결국 하나로 순환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았을 것이다. 

그리고 홍일화는 가시덩굴을 조형했는데, 가시덩굴만큼 무모하고 무분별한 생명력과 자기 복원력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자연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무모하고 무분별한 자기 확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뿌리줄기 그러므로 리좀의 또 다른 경우와 버전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정재철은 제주도를 직접 그린 지도(제주일화도)와 함께, 바닷가에서 수거한 해양 쓰레기를 재구성한 설치작업을 보여준다. 집도 절도 없이 떠다니다가 어느 이름 모를 해안에 가닿았을 것들이 삶의 유비를 떠올리게 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할까. 작가는 이 부유물들을 크라켄 그러므로 바다 괴물이라고 불렀는데, 자연을 위협하는 플라스틱 천지에 대한 비판과 경고의 메시지를 담았을 것이다. 

그리고 강술생은 자연과 시간을 날실과 씨실 삼아 하나로 엮은 유기적인 관계망을 짠다. 여기서 시간은 자연으로부터 뽑아낸 실로 상징되고, 자연으로 직조한 직물로 표상된다. 흥미로운 것이 자연도, 시간도, 실도, 직물도 여성주의의 전형적인 도상학을 떠올리게 된다. 아마도 자연 친화적인, 자연과 함께 살고(그러므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자연 속에서 위로받는 생명(그러므로 존재)의 생리를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용해숙은 비정형의 각진 거울(그리고 프린트를 입힌 거울)을 조형한 작업을 제안했는데, 하나는 자연을,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빈방(전시장)을 반영하는, 거울반영작업을 예시해준다. 거울이 각진 탓에 자연이 자연을, 빈방이 빈방을 무한 반영하는데, 간혹 빈 거울 앞에 서면 마구 잘려 파편화된 주체를 되돌려준다. 마치 각진 거울처럼 자연을 개념으로 재단하는, 자연의 도구화에 맞춰진 인식론적 한계와 비판의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생명의 반쪽인(어쩌면 전체인) 자연과 더불어서만 완전한 주체를 회복할 수 있다는 역설을 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외에도 24개국 50개 팀 51인 작가가 참여 전시한, 숲과 생명을 주제로 한 자연미술 영상전이 있었다. 자연미술은 자연을 기록하고 편집하고 재구성하는 다큐멘터리의 성격이 강하고, 기록물을 채집하고 분석하고 분류하는 아카이브의 성격이 없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도 영상이라는 효율적인 미디어를 활용한 전시공학 그러므로 전시 방법은 앞으로도 더 확장되리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전신지 아카이브 전신지 아리송한, 전시와 아카이브의 경계를 넘나드는 최근 전시 방법론에도 부합하는 면이 있어서 자기 연출 면에서도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다시, 야생의 의미를 묻는, 재야생의 실천 논리를 물어오는 이번 전시가 자연의 도구화에 맞춰진 지금까지 자연에 대한 관념과 태도를 반성하는 한편, 자연의 관점에서 자연을 보는, 자연 속에서 자연을 보는, 자연과의 연장에서 자연을 보는, 어쩌면 새삼 다른 시각을 열어놓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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