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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철/ 이토록 황홀한, 절정의, 무상한, 덧없는 하늘

고충환



전종철/ 이토록 황홀한, 절정의, 무상한, 덧없는 하늘 



작가 전종철은 1995년 제2회 공산미술제 대상을 수상하면서 한국화단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당시 한국 사회의 트라우마로 기억되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소재로 설치작업을 했는데, 제단 형식의 무너져 내린 유리 탑과 바닥에 널브러진 유리 파편을 통해 희생자의 원혼을 기리고 위무하는 제의적 퍼포먼스를 선보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제단 형식의 조형감각과 제의적 퍼포먼스가 작가에 잠재된 예술가_무당의 기질을 예감하고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모든 예술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어떤 면에서 예술가와 무당은 친족이라고 해도 좋다. 선사시대 동굴 벽화에 동물들을 그려 넣어 주술을 행했던 인류 최초의 예술가가 샤먼이었던 이래로, 가깝게는 요셉 보이스가 스스로 현대판 샤먼에 비유하기도 했다. 하늘과 땅의 중재자가 무당이라고 이해한다면, 가시적인 세계를 통해 비가시적인 세계의 비의를 해독하고 암시하는(신은 비정상 언어를 통해 계시를 전달하는 형식으로 인간에게 말을 거는데, 예술은 바로 그 비정상 언어와 관련이 깊다), 감각세계와 관념 세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가의 행태가 무당의 행실과도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될 때, 인간은 자기가 유래한 곳을 쳐다본다. 자기가 유래한 곳? 존재론적 근원, 존재론적 고향, 존재론적 원형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여기서 근원과 고향은 지정학적 장소 개념이라기보다는 존재가 실제로 느끼는 감정 그러므로 존재 감정에 가깝다. 그렇다면 존재론적 원형의 경우는 어떤가. 칼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는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는 기억? 아득한 기억? 바로 존재가 유래한 근원에 대한 기억이다. 그 기억이 무의식에 아로새겨지고,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원형적 상징이 그 기억을 일깨운다. 여기서 반복 상징 그러므로 원형적 상징으로 제시되는 경우 중 결정적인 경우가 하늘이다. 

그러므로 다시, 존재론적으로 될 때 사람들은 하늘을 본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을 때, 하늘을 원망하기도 하고 하늘이 무너져내린다고도 한다. 왜 하늘인가. 하늘은 다름 아닌 존재가 유래한 곳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곧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은 곧 존재가 무너지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근작에서 하늘바라기 한 일련의 사진들을 들고나왔다. 작가는 진즉에 예술가_무당의 기질이 다분한 설치작업으로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존재 증명 그러므로 신고식을 치른 바 있고, 하늘과 땅의 중재자 그러므로 어쩌면 하늘의 사제답게 자신의 하늘 사진에 존재론적인 의미를 담았다. 혹은 반무의식적으로 그러므로 어쩌면 필연적으로 존재론적인 의미가 작가의 하늘 사진에 저절로 담겼다. 


그렇게 작가와 하늘과의 인연은 깊다. 진즉에 1983년 학부 시절 그린 그림 속에도 하늘은 있었다. 반지하 작업실에서 쪽문을 통해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린 것인데, 허물어진 벽면 사이로도 하늘 조각이 들어와 있다. 바닥에는 지금처럼 깨진 유리 조각이 널브러져 있고,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한 벽면을 지탱이라도 할 요량으로 밧줄이 묶여 있다(작가의 현실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최소한 예감하는 대목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아마도 당시 어둑한 반지하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암울한 시대 감정 혹은 세대 감정을 위로하고 위무해주는 주술이며 자기최면과도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하늘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이후 독일 유학 시절 짓누르는 듯 낮게 깔린 우울한 기질의 잿빛 하늘에 매료되었고(자신의 내면을 발견하는 그러므로 내면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귀국 이후에는 마치 하늘에(허공에) 드로잉이라도 하듯 물감을 잔뜩 묻힌 맨발로 캔버스를 밟고 다녔다. 실제로도 유리 천장을 통해 허공에 드로잉한 것을 올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형언할 수 없는 하늘 그러므로 빛의 색깔을 조형으로 불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세기말 프로젝트로 방점을 찍는다. 세기가 바뀌는 경계 지점에 설치작업을 한 것인데, 서울의 남산타워를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일종의 솟대로, 토템폴로 가정한 것이다(2000, 20과 21 사이의 설치풍경). 신화적으로 성소(세상의 법이 미치지 못하는 신성한 장소)와 세계수(세계의 중심에 자라는 신성한 나무)와 우주의 배꼽(옴파로스) 서사를 전수하고 확대 재생산한 경우로 봐도 좋을 것이다. 앞서 삼풍백화점 희생자를 기리는 제의 퍼포먼스와 함께, 작가의 예술가_무당으로서의 기질을 반영하고 대표하는, 작가 작업의 두 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제주에 칩거한다. 그리고 이후 근 10여 년 사진기를 도구로 하늘바라기에 전념한다. 여기서 전념한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은 아닌데, 보통 전념한다고 하면 그 목적대상이 분명하고 그 과정 또한 이미 상당할 정도로 감을 잡은 상태에서 입문하고 통과하기 마련인데, 그 대상이 하늘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하늘은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있으면서 아무것도 없다. 무작정 열린 하늘에서 작가는 무엇을 바라는가.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인가. 하필이면 왜 하늘인가. 왜 자신을 하늘에 던지는가. 왜 무방비 상태의 자신을 무작정 열린 하늘에다 던지는가. 

현상학에 보면, 에포케 곧 잠정적 판단중지가 있다. 우리가 보고 듣고 겪는 것은 모두 개념(그러므로 어쩌면 타자)으로 오염된 것이다. 개념으로 보고, 개념을 통해 듣고, 개념이 알려준 것을 겪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념이 없다면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겪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본 것이 없고, 들은 것이 없고, 겪은 것이 없다고 가정해보자. 아무것도 모른다고 가정해보자. 마치 생전 처음으로 보고 듣고 경험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발가벗은 세계와 발가벗은 내가 생판 처음으로 마주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스스로 의식의 백지상태(영도지점)에 놓아보자. 그러면 비로소 세상 자체가, 개념화되기 이전의 세계 자체가 마침내 내 앞에 있을 것이다. 그때 그렇게 내 앞에 있는 것이 진정 현상이고 세계일 것이다. 

하늘이 꼭 그렇다. 우리는 하늘을 안다고 하지만, 사실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안 봐도 비디오라고 하지만, 사실 하늘 자체를 본 적이 없다. 범신론과 물활론,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이 인간과 호흡을 같이하던 시절에 하늘은 존재가 유래한 원천이었고, 경외감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자체였고(하이데거는 존재 혹은 존재 자체와 존재자를 구분하는데, 존재자가 존재로부터 유래했다고 본다), 삶을 내고 죽음을 거두어들이는 신이었다. 그 잔재가 숭고의 감정으로 남아 현대에 전수되는데, 칸트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영성주의가, 바넷 뉴먼과 마크 로스코의 추상회화가 그렇다. 

조르주 바타이유의 연속성 회복기획(삶과 죽음은 원래 연속돼 있었는데, 자본주의가 효율성을 내세워 죽음을 금기시하면서 둘은 분리되었다고 본다)이 그렇고, 프로이트의 삶(에로스)을 정화하는 죽음(타나토스) 기획이 그렇다. 이 모두가 하늘의 뜻이고 의미라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할까. 왜 하늘을 말하면서 삶과 죽음이 소환되는가. 원래 하늘과 땅은 하나였고, 그 유비적 의미를 분유한 그러므로 나눠 받은 삶과 죽음 또한 하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작가도 동의하고 있는 부분이지만, 원래 하늘과 땅은 하나 그러므로 어쩌면 최초의 신인 혼돈으로부터 유래했다). 

그렇게 작가는 마치 무당의 초혼의식에서처럼 하늘에서 하늘 자체를 불러내고, 존재에서 존재 자체를 불러낸다. 형언할 수 없는 빛깔의 향연(주이상스 그러므로 신들의 주연?)을 불러내고, 시시각각 태와 꼴을 바꾸는 변화무쌍한, 그러므로 무상한, 붙잡을 수 없는, 변신의 귀재인 신들을 불러내고, 에토스의 장엄과 격렬한 파토스를 불러내고, 그 넓이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을 불러내고, 개념 이전의, 의미화되기를 거부하는, 의미가 되지 않아도 좋을, 의미가 되지 않은 채로 이미 충분한, 다만 상기와 암시를 통해서만 소통하는 의미소(시어?)를 불러낸다. 다만 눈에 보이는 하늘과 구름과 빛깔은 욕망의 표상일 뿐, 그 표상 이전에서, 그 밑에서 침잠하면서 사로잡는, 그러므로 어쩌면 내면의 하늘을 불러낸다. 


이토록 형형색색의 하늘을 본 적이 없다. 이토록 황홀한 하늘을 본 적이 없다. 작가는 하늘을 소재로 한 자신의 사진 작업을 찰나를 잡은 순간의 미학이라고 말한다. 순간의 미학으로 치자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을 떠올리게 되는데, 작가의 경우에는 하늘이 색을 포함한 무채색마저 형형색색으로 어우러져 가장 황홀한 순간의 포착을 의미할 것이다. 붙잡을 수 없는, 존재가 절정에 이른, 그러므로 무상하고 덧없는 순간의 박제를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황홀한, 절정의(조르주 바타이유는 에로티시즘을 작은 죽음이라고 했다), 무상한, 덧없는 하늘 사진을 예시해준다. 

때로 콜라주 형식으로 원본을 찢어서 재구성한, 마치 땅과 하늘로 양분된 풍경을 보는 것 같은, 집 같기도 하고 얼기설기 모여있는 가옥이며 마을 같기도 한, 그러므로 어쩌면 그 자체 또 다른 하늘, 제2의 하늘, 해석된 혹은 재해석된 하늘이기도 한, 하늘 속에 하늘이 들어있는 이중 혹은 다중 하늘을 예시해준다. 그러므로 어쩌면 하늘을 찍는다기보다는 하늘을 그리고 만드는, 다시, 그러므로 자기만의 하늘을 재구성한 일련의 콜라주 사진 조형 작업을 제안한다. 작가는 그렇게 때로 개념 없는 눈으로, 발가벗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라고 권한다. 그리고 그렇게 저마다 자기_타자를 맞아들이기를(하늘에서 저마다 자기와 만나기를) 권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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