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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의 향연, 색채가 곧 표현이고 회화다

고충환



색채의 향연, 색채가 곧 표현이고 회화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피렌체 화파와 베네치아 화파가 있었다. 피렌체 화파가 소묘와 형태와 구조를 강조했다면, 베네치아 화파는 색조와 색조가 환기하는 분위기를 강조했다. 그렇게 베네치아 화파는 색채의 시대 양식을 열었다. 그리고 말년에 색종이 오려 붙이기로 그림을 대신한, 색채의 화가로 알려진 앙리 마티스는 회화에서 결정적인 것은 표현이라고 했고, 색채가 곧 표현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색채 자체가 이미, 색채만으로 이미 회화라는 말이기도 하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에서 이러한 환원주의에 방점을 찍는 주장을 만날 수 있다.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과 같은 형식적인 요소만으로도 이미 그 자체 회화라고 하는 주장이다. 그리고 현대미술에서 그 주장을 확인해 볼 수 있는 허다한 사례와 경우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특히 색채로는 자기감정을 표현할 수 있고, 상징적 의미로 인해 의미를 확장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 저마다 색채를 빌려 자기감정을 표현하고 의미를 확장한 작가들이 있다. 10인 10색의 작가들이 있고, 색채에 대한 용법이 있다. 


강희경, 자연 속에서 재생되는 삶. 
작가는 판유리에 그림을 그리고 가마에 구워내는 유리 회화를 통해 자연에 동화되는 삶,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 자연의 일부로서 사는 삶, 그러므로 어쩌면 자연 친화적인 삶을 추구한다. 그 추구를 작가는 새 살이 돋는다고 표현한다. 자연과 더불어 순간순간 재생되는 삶을 지향한다고 보면 되겠다. 자연에는 수많은 색깔이 있다. 그 색깔 중 작가는 특히 노란색과 초록색을 매개로 자연을 꿈꾸는 관조적인 그리고 몽환적인 분위기의 내면 풍경을 예시해주고 있다. 

고보연, 켜켜한 여성의 시간. 
작가는 조각 천을 누벼 머리카락을 만들었다. 천에 솜을 넣어 누빈 것으로, 색색의 천 조각을 누벼 댕기 머리를 조형했다. 그 한가운데 여자가 웅크리고 누워있는데, 안으로 돌돌 말린 것이 탯줄 같고 태아 같다. 자궁 같고 존재가 유래한 원형적 자궁 같다. 옴파로스, 그러므로 세계가 유래한 우주의 배꼽 같다. 그렇게 작가는 머리카락과 탯줄과 자궁과 배꼽으로 연이어진 상징체계(상징적 계열체?)를 매개로 생명을 주관하는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제안한다.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동기가 되었다고 했는데, 아마도 여성에 바치는 오마주라고 해도 좋다. 긴 머리카락이 기다리는 시간을 상징한다면, 그 머리카락을 이루는 알록달록한 색깔들은 그렇게 기다리면서 여성들이 꾼 꿈을 채색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김수진, 내게 강 같은 평화. 
셀라, 잠시 멈춤이란 뜻이고, 멈춰서서 들으라는 의미라고 한다. 내게 강 같은 평화가 깃들게 하기 위한 선결 조건을 제안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 속도가 미덕인 시대에 잠시 멈춘 삶을, 기다리는 삶을, 자기 자신과 투명하게 대면하는 자기반성적인 삶의 순간을 제안한 역설적인 표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특히 소멸법은 한판 다색 판화로서 판을 소멸시키면서 판화를 만든다. 자기를 소멸시켜 이미지를 얻는 것처럼, 자기를 비움으로써 오히려 자기가 더 투명해지는 역설적인 상황 논리에도 부합한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칠흑 같은 밤하늘에 노랗고 빨간 별빛들이 총총하다. 저마다 자기 자신(자기_타자)과 투명하게 만나기에 좋은 시간이다. 

김은미, 전통의 재해석. 
과거는 현재를 밀어 올리고, 현재 위에는 과거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 사이에 기억이 있다. 그렇게 삶은 기억을 매개로 과거를 소환하고 현재를 반성한다. 다시, 그렇게 삶은 어쩌면 기억이다. 저마다 기억을 만들고 보존하고 때로 상실(망각)하는 과정이다. 그 기억의 편린들을 모아 작가는 작품을 만들었다. 기억에 색깔을 덧입히고 형태를 부여해주었다. 나전과 옻칠이라는 전통적인 재료와 기법을 매개로 작가는 격자 문양의 패턴이 뚜렷한 기하학적인 형태의(그러므로 금욕적인) 기억을, 그리고 나뭇잎 형상을 양식화한 유기적인 형태의(그러므로 분방한) 기억을 각각 조형했다. 그리고 그 기억들에 각각 칠흑같이 검은색을, 그리고 현란한 원색을 부여했다. 아마도 내면적인가 하면 외향적인, 어둡고 밝은 기억의 이중성이며 양가성을 표상한 것일 터이다. 

김준용, 그릇에 저녁노을을 담다. 
작가는 유리를 소재로 한 블로잉 기법으로 형태를 만들고 그 표면을 연마하는 과정을 통해 그릇이나 용기를 떠올리게 하는 속이 오목한 형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 노란색과 붉은색 사이의 색채 스펙트럼을 담았다. 저녁노을을 담았다. 작가는 오목한 용기 형태에 대해 그 속에 시공간을 담아내는 은유적 표현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노을뿐만 아니라, 사실상 세상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더욱이 유리의 반투명한 성질로 인해 실제의 하늘색 그대로를 옮겨다 놓은 것도 같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를 표현하는 고유의 형태를, 언어를, 기호를 얻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박보정, 쇠똥구리 같은 우리. 
작가의 그림에는 점자 같은, 모르스 부호 같은 땡땡이 형태의 기호와 패턴이 있다. 그 기호를 작가는 쇠똥이라고 했고, 쇠똥구리 같은 우리라고 했다. 쇠똥구리? 알다시피 쇠똥구리는 쇠똥을 공 굴리면서 산다. 그 꼴이 꼭 열심히 사는 우리의 삶을 닮았다고 작가는 생각한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은 펜으로 일일이 그린 것이 세밀화를 연상시키는데, 집요한 그리기, 편집증적인 그리기로 형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사람의 부분 이미지와 동물의 부분 이미지, 그리고 여기에 알만한 혹은 알 수 없는 형상들과 같은, 상호 이질적인 형태와 이미지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유기적인 덩어리를 이루는데, 그 형태가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을 상기시키고 자유 연상기법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런 이질적이고 유기적인 덩어리에 대해 작가는 기억의 조각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아두려는 기획이라고 했다. 그 기획에 등장하는 작가의 색채감정이 쇠똥구리의 쇠똥을, 그러므로 자연을 닮았다. 

유우연, 자작나무 같은 우리. 
작가는 자작나무 숲을 그린다. 여기서 자작나무 하나하나는 우리를 상징한다. 보통 사람들은 저 홀로 있고 싶다. 그러면서도 너무 혼자다 싶으면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 더불어 사는 공동체적 삶을 꿈꾸기도 한다. 그러므로 저마다 독립적인 개체를 이루면서 모여있는 자작나무 숲은 이런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그러므로 어쩌면 이율배반적인 삶의 행태를 표상할 것이다. 전깃줄에 앉은 새들도 거리두기에 민감하다. 자작나무 숲이 그런, 고독을 견디지 못하는 고독한 우리를 닮았다. 거리두기에 치열하면서도 정작 동떨어진 삶을 견디지 못하는 부조리한 우리를 닮았다. 그렇게 작가는 자작나무 숲에 고독의(그리고 고독한) 색깔들을 부려놓았다. 

전용환, 약동하는 생명력. 
작가는 가녀린 띠 형태의 알루미늄선이 얽히고설킨 조형물을 만들었다. 가녀린 선으로 조형된 것이란 점에서 선조 형식의, 벽에 걸리면서 벽 위로 돌출된 것이란 점에서 평면 부조 형식의, 라인 위에 현란한 색채가 덧입혀진 것이란 점에서 회화 조각(회화적인 조각?)을 만들었다. 이처럼 회화와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확장하는 조각을 작가는 사실은 복잡한 단백질 구조를 이미지화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어쩌면 생명의 최소 단위원소를, 모나드를, 단자를 조형한 것이라고 했다. 그 표면에 덧입혀진 현란한 색채가 리듬을 상기시키고, 약동하는 생명력을 상기시킨다. 여기에 띠 끝에 붙은 화살표가 방향과 속도를 상기시키고, 그리고 여기에 벽면에 드리워진 그림자마저 조형의 한 요소로서 끌어들이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그렇게 작가는 존재의 생명력을, 활력을, 활성을 오마주하고 있을 것이다. 

최용대, 숲에서 들려오는 내면의 소리. 
작가는 숲을 그린다. 단색으로 표현한, 정적이고 고즈넉한 느낌의 숲 위에, 나무 위에 섬세한 비나 붓으로 쓸어내린 것 같은 자국이 인상적이고, 그 흔적이 어떤 알 수 없는 내적 울림을 자아낸다. 작가의 그림에서 특징적인 경우로 치자면 이런 붓질과 함께, 화면 아래쪽에 빈 공백으로 남겨진 부분을 들 수가 있을 것인데, 마치 여백에서처럼 미처 그림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말을, 전달하기 힘든 의미를, 형용할 수 없는 마음을 함축하고 표상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또 다른 단색화로 그린 근작을 내적 언어라고 부른다. 그런데, 내적 언어로 불리는 그림에서마저도 빈 공백은 여전하다. 여전히 형용할 수 없는 마음의 빈 부분이 남아있다는 의미일까. 마음 그대로를, 전부를 형용할 수는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색채감정은 바로 이처럼 마음의 빈 공백으로 남겨진, 여백처럼 하얀색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황해연, 빙하와 맨드라미. 
작가는 빙하가 죽은 다음에 돌아가야 할 장소며 터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상향이며 유토피아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빙하가 상실된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 작가는 어쩌면 수억 년도 더 전에 얼어붙었다가 환생한 냉동인간인지도 모른다. 최소한 인류가 유래한 원천에 대한 환기로 볼 수는 있겠다. 그런데 기후변화와 환경재앙으로 인해 빙하가 하루가 다르게 녹아내려 사라지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이 발상은 환경재앙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한편으로 작가는 빙하와 함께 맨드라미를 그리는데, 맨드라미는 여름꽃을 상징하고, 땅 위에 피는 태양을 상징한다.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인간 내면의 열정을 상징하고, 파토스를 상징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와 그 열기에 녹아내리는 빙하가 공존하고 있다. 마치 모순된, 부조리한,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삶이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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