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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출귀몰 아트페어, 생활사와 생활 현장에서 길어 올린 일곱 개의 좌표들

고충환




신출귀몰 아트페어, 생활사와 생활 현장에서 길어 올린 일곱 개의 좌표들 


여성작가 7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페미니즘이라고 해도 좋고, 아니라고 해도 무방하다. 저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예술혼(어쩌면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무장한 작가들이란 점에서는 페미니즘으로 볼 수도 있겠고, 그럼에도 정치적 지향성이 느슨하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은 다만 하나의 구실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다만 여성작가를 페미니즘으로 호칭한 경우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마다 생활 현장과 생활사에 바탕을 둔 치열한 작업에 연륜이 있고, 개성이 있고, 남다른 부분이 있다. 그렇게 여기에 신출귀몰하는 작가들이 있고, 동시대 예술을 예시하는 칠인 칠색의 작업들이 있다. 

김영경. 작가는 그동안 서울을 비롯한 전주, 강원, 순천, 군산, 그리고 울산과 같은 지역을 전전하면서 사진을 찍고 발표를 했다. 각 지자체에서 지원 운영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옮겨 다닌 경우로 보인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대개 지역 레지던시의 경우 지역 리서치를 통해 지역적 특수성을 반영하고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경향이 작가의 성향과도 부합하는 면이 있고, 작가의 사진의 특수성 역시 바로 이런 재개발 현장과 도시 재생으로 나타난 지역 리서치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욕망 도시의 그림자에 주목하는가 하면, 사람이 빠져나가고 없는 삶의 흔적들을 사진으로 채집하고 분류하는 일에 남다른 감각을 발휘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모든 흔적은 상처(자기반성적인 계기)와 그리움을 불러온다. 한 장의 사진을 찍는 행위란, 혹은 한 장의 사진을 읽는 행위란 객관적 사실에 주관적 해석이 매개되면서 보편적 실재에 이르는 혹은 도출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작가는 어쩌면 근현대 생활사의 조각들을 헤집으면서, 타자들의 삶의 흔적을 채집하고 분류하면서 사실은 자신의 유년을 떠올리고, 잊힌 자기, 아득한 자기를 찾아 헤매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김준아. 밸벳의 그것을 떠올리게 하는 부드럽고 유기적인 질감의 촘촘한 세선이 굽이지며 흐르는 것이 기의 운동을 그린 것도 같고, 파동을 그린 것도 같고, 결을 그린 것도 같고, 꽃잎의 맥을 그린 것도 같다. 약동하는 생명을 그린 것도 같고, 전율하는 에너지를 그린 것도 같다. 그리고 그 위에 선염처럼 번져나가는 비정형의 얼룩이 중첩된다. 세선과 얼룩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도 같고, 서로 밀어내는 것도 같다. 이질적인 욕망과 욕망이 서로 부침하고 갈등하는 내면 풍경이라도 그린 것일까.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을 극적인 대화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자기와 자기_타자가 갈등하고 부침하는 내면 풍경을 그린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암시적인 형상과 추상의 형식논리는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넘나든다. 그러므로 회화의 논리로 치자면, 회화란 크게 형상(혹은 형상 충동)과 추상(혹은 추상 충동)과의 대화의 결과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약동하는 생명력을 암시하는 일련의 그림들을 통해 회화가 작동하는 원리를 예시해주고 있다. 

김하린. 작가는 여성성에 관심이 많고, 모성에 관심이 많다는 점에서 여성주의로 볼 만한 일면이 있다. 굳이 정치적 지향성보다는 여성작가로서 성적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발현된 경우로, 본성의 자연스러운 표출로 보면 좋을 것이다. 전작에서 그 본성은 젖꼭지를 대신한 젖병 꼭지로 뒤덮인 욕조와 같은 오브제 설치작업으로 자궁을, 모성의 공간을 표현한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모성의 공간은 시각적이기보다는(혹은 시각적이면서 동시에) 촉각적인 감각이 강조되는데, 아마도 시각을 자신의 언어로 전유한 남성 주체 중심의 감각(그러므로 어쩌면 예술)과 차별화를 시도한 여성주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그 본성은 이런저런 천 조각을 포함한 이질적인 오브제들을 바느질로 조합하고 재구성한 설치작업으로 나타난다. 쓸모없는 것들, 버려진 것들의 잃어버린(혹은 박탈된) 생명을 불어넣어 재생한, 제의적 퍼포먼스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근작에서 그 본성은 부드럽고 유기적인 질감의 반투명한 막으로 된 거대한 공간설치작업으로 나타난다. 생명이 지나가는 통로라고 해도 좋고, 자궁의 벽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는 여성성과 모성 고유의 생명을 보듬고 위무하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세상에 따뜻하고 우호적인 숨결(호흡)을 나누어주고 있다. 
     
류현숙. 회화의 기본은 무엇인가. 점이다. 하나의 점으로부터 선이 발생하고, 면이 파생되고, 형상이 서고, 존재가 생겨난다. 그러므로 점은 존재가 유래한 근본이고, 원천이다. 존재의 원형이다. 처음에 작가는 이런 점 찍기로 시작했다. 하나의 점을 단위원소 삼아 무한 반복해서 찍어나가는, 반복임에도 사실 같은 점이 하나도 없는 점을 찍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의 한 본성으로서 차이를 내포하고 발생시키는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서 무수한(아마도 무한을 지향하는) 점들로 집적된 주렴 같은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수행적인 일면이 있다. 
그리고 이후 점들의 주렴은 점차 이런저런 추상적인 패턴을 암시하면서, 움직임을 암시하면서 진화한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색색의 지우개를 만났다. 전에 일일이 찍어서 그린 점들을 지우개가 대신한 것이다. 아크릴판과 아크릴 미러 그리고 플렉시그라스로 얇은 곽을 만들고, 그 곽 속에 색색의 지우개를 마치 모를 심듯 모로 세워 채운 것이다. 그 표면효과는 마치 장난감 블록을 보는 것 같고, 레고를 보는 것 같다. 전통적인 자수와 노리개 장식 그리고 매듭을 추상적 형식으로 차용하고 변용한 것도 같다. 여기에 거울 상자를 통해 그 작품을 보면 색색의 패턴이 무한 반복되는 만화경과도 같은 판타지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작가는 하나의 점으로부터 파생된 만화경을, 판타지를 열어놓고 있다. 

윤우영. 세잔은 세상의 모든 풍경이 원통과 원뿔과 같은 최소한의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될 수 있다고 했다. 아마도 세잔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실제로 그렸지 않았을까 싶은 그림을 작가는 그려놓고 있다. 피라미드 위로 달이나 해가 떠 있는 풍경이다. 실제 피라미드를 재현한 것일 수도 있고, 피라미드로 표상되는 엄정한 질서(그러므로 어쩌면 평화)를 자기 내면에 축조하고 싶은 욕망을, 그러므로 내면 풍경을 그린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산 위에 해가 떠 있는 풍경을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해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환원이다. 작가는 풍경을 보이는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자기식대로 환원해 패턴을 부여하고 양식화하고 반추상화한다. 자기만의 형식이라고 해도 좋고, 세상을 보는 자기만의 눈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는 양식화된 나무에 앉은 형형색색의 새들을, 패턴으로 양식화된 숲을, 겹겹이 포개진 언덕을, 단순하고 정적인 고즈넉한 풍경을 그려놓고 있다. 이 일련의 그림들을 통해 작가는 자유의 표상이 되고 싶다. 관습과 관념으로부터 자유롭고 싶고,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아마도 그림을 매개로 자기 내면에 질서(그러므로 어쩌면 평화)의 성소를 짓고 싶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정대원. 초현실주의 화가 요셉 코넬은 알바로 호텔 벨보이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카운트를 지키던 작가에게 사람들은 재미 삼아 열쇠고리, 도장이 찍힌 우편 엽서, 너덜너덜해진 지도, 관광 안내서와 유효기간이 지난 입장권을 건네주었다. 이제는 쓸모없어진 잡동사니들이지만, 작가는 그 잡동사니들에 마음이 끌렸고, 작가의 작업은 바로 이 잡동사니들에서 출발한다. 사물의 의미는 고유의 용도와 기능을 다 했을 때 오히려 되살아난다. 비록 사람에게서 전이된 것이지만, 사물도 기억을 하고, 바로 그 기억으로 새로운 의미를 덧입는다. 
작가는 아빠의 손때가 묻은 닳고 해진 가죽가방을, 그 표면에 당나귀가 그려진 빈 쿠키 봉지를, 아마도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전시 도록을 담았을 표면에 로고가 새겨진 에코백을, 모처럼의 해외여행에서 구입한 물건을 담았을 종이나 비닐봉지를 차마 버리지 못한다. 그것을 재활용한다기보다는, 그 사물들의 기억이 작가의 기억을 되새김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억을 매개로 사물들과 작가가 묶여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가는 애틋한 사물들을 드로잉으로, 판화로, 회화로 되살려냈다. 그것은 어쩌면 기억을 특정 순간(가장 애틋한 순간)에 멈추게 만드는 일이며, 그러므로 기억을 박제화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기억을 매개로 일종의 사물 초상화로 부를 만한 한 경향을 열어놓고 있다. 

최혜정. 작가는 조화, 타조 깃털, 몽땅 연필, 유리구슬, 다 따 먹고 없는 빈 포도송이와 같은 오브제를 이용해 형태를 만들고 글자를 재구성한다. 형태와 글자라고는 했지만, 이로써 분명한 의미가 전달된다기보다는 암시적인 작업이다. 의미와 의미 사이를 탐색하는, 미처 의미화되지 못한 의미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의미가 되지 않으면서 의미하는 일종의 시어를 의미의 층위로 건져 올리는 작업이라고 해야 할까. 개념미술 이후에 미술은 의미를 다투는 장이 되었다. 작가의 작업은 그렇게 개념미술에 맞닿아있으면서도 전형적인 개념미술에서처럼 무미건조하거나 드라이하기보다는 생활사와 접목된, 생활 현장에 접맥된 루즈하고 해학적인 부분이 있다. 
여기에 작가는 때로 영상설치 작업으로 몸을 매개로 한 감각경험을 기록한다거나, 연정의 깊이를 잰다거나(?), 이제는 삼각지에서마저 보기 어려운 혁필화를 비롯한 일종의 그림 글씨(문자도와 픽토그램)를 매개로 그림과 문자의 경계를 넘나든다. 아마도 결정적인 의미를 해체해 느슨하게 만들고 틈을 내는 일에, 그리고 그 틈으로부터 새로운 의미의, 어쩌면 억압된 의미의 새살이 돋도록 하는 일에, 그러므로 예술을 재정의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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