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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 한국화 세미나 - 문애련, 변민혜, 송유나, 전상희

고충환



성신 한국화 세미나 



문애련, 내가 유래한 곳. 
작가는 중국의 돈황 벽화를 그린다. 4세기부터 14세기에 이르기까지 5백여 개의 동굴에 대략 5만 평에 달하는 벽화가 그려져 있고, 또한 그려져 있었다고 하니 소재는 무궁무진하다고 해도 좋다. 처음엔 단순 모사에서 시작해서 점차 각색하고 해석하고 자기화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채색과 함께 부분적으로 가금과 동박을 도입해 그린 그림이 세밀화를 연상시키는 정치한 묘사와 함께 화려하고 장엄한 색채감정으로 중세 불화와 구스타브 클림트의 시공을 초월한 상호 영향 관계를 떠올리게 된다(주지하다시피 클림트는 자포니즘에 열광했고, 일본 전통 목판화 우키요에와 중국화 수집에도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당시 중원 지역과 서역 지역 간 무역과 문화교류가 활발한 지역이었던 만큼 문화충돌이 있었고, 지금 작가는 한국에서 또 다른 문화충돌(크레올) 현상을 겪고 있다. 그 겪음 속에 과거와 현대의 차이가 있고, 중국과 한국의 다름이 있다. 그러므로 그 차이와 다름이 향후 작가의 작업에서 어떻게 풀어지고 변주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작가는 돈황 벽화를 그리면서 당시 화공들과 대화하는 느낌이라고 했다. 자기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가 유래한 근원에 대한 의식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라고도 했다. 일종의 원형 의식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그 의식이 향후 작가를 어디로 어떻게 견인해 갈지 지켜볼 일이다. 

변민혜, 기억의 재구성. 
작가는 기억을 소환한다. 어릴 때 작가는 시계를 볼 줄 몰랐다. 그래서 시각을 읽어보라는 시험지의 주문에 곧잘 오답을 내곤 했다. <장 보러 가는 게 좋아>라는 책을 읽은, 그림일기 형식의 독서감상문을 지금 다시 보면서는 이런 책 지금은 모른다고, 기억에 없다고 애써 부인한다. 모래성 쌓기 놀이를 소환하기도 한다. 근대생활사라고 해야 할까. 작가뿐만 아니라 어쩌면 우리 모두 거쳐왔을 시절을, 그 시절에 대한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그 추억이 마냥 풋풋하지만은 않다. 상식적인, 정상적인, 합리적인 시민으로 육성하기 위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되는 제도의 전횡을 고발하고 풍자하고 비트는 역설이 있다. 그래 봤자 모래로 지은 집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조가 있다. 가까운 기억 그러므로 현실 인식으로 치자면 자발적인(?) 비혼 여성의 삶을 그리고, 텅 빈 카트를 웃어넘긴다(?). 그렇게 작가는 사회적 주체와 자기 주체로 분열된다. 원초적 자아와 초자아를 중재하는 자아로, 사실은 서로 감시하고 억압하는 자기로 자기가 분열된다. 그러므로 때때로 출몰하는 훼훼귀신, 가위눌림 귀신은 어쩌면 억압된 자기(자기_타자)가 자기를 방문한 것인지도 모른다(프로이트의 억압된 것들의 귀환).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는 사회의 민낯과 속살을 들춰내는 비판이 있고 실천이 있다. 위트가 있고 유머가 있다. 

송유나, 너를 그러므로 나를 본다는 것. 
하나의 화면에 하나의 모티브를 그리기. 일기 형식의 소소한 그림들, 작은 그림들이 좋다. 자기로부터 시작한 것이어서 신뢰가 가고, 일상에 유래한 것이어서 길게 가져갈 수 있다. 다른 작업을 하면서도 가능한, 부담 없이 그릴 수 있고 몸에 밴다면, 그렇게 양이 쌓인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작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소설에도 주관을 배제한, 다만 객관적 사실만으로 이루어진 누보로망이 있지만, 그런 식의 덤덤한 그리기, 무미건조한 그리기가 세계에 대한 각별한, 유별난, 다른 반응을 예시해준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기억의 재구성이 있다. 사진에도 초점이 있고, 기억에도 초점이 있고, 시선에도 초점이 있고, 사람들의 의식에도 초점이 있다. 초점이 집중된 부분이 또렷하고, 초점이 나간 부분이 흐릿하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 하나. 주변의 역설이라고 해야 할까. 사건 그러므로 삶의 진실은 혹 초점이 나간 부분, 흐릿한 부분, 어쩌면 간과했을지도 모를 부분, 잊힌 부분에 숨어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부분에 시선을 다시 허용해야 하지 않을까. 정작 작가의 그림에서 그 부분은 몽몽한 빛 여울의 형태로 나타난다. 아마도 흐릿한(그리고 아련한) 기억을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다른 방법, 다르게 표현하는 방법도 더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셔터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표정을 본다. 사람들은 마치 굳게 닫힌 셔터처럼 그 속을 알 수가 없다. 그 속으로 파고들 수가 없다. 불통의 현실 인식이라고 해야 할까. 일말의 연민(그중에는 일정한 자기연민도 있을)이 묻어나는. 

전상희, 내면에 숨기, 내면으로 도망하기. 
모든 일은 쥬토피아에서 시작되었다. 동물원과 유토피아가 합성된 원시림으로부터 비롯했다. 주지하다시피 유토피아는 현실에는 없고 다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만 있는 장소, 부재하는 장소, 없는 장소를 뜻한다. 그렇게 동물원은 동물들의 집이 아니었고, 유토피아는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디스토피아까지는 아니더라도). 집인 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집(그러므로 일상)은 아예 있지도 않았고, 이상을 기댈 절도 없다. 사태가 그렇다면 도망밖에 없다(니체는 자신을 궁지로 내몰면 내면이 열린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열린 자아, 되돌아온 자아가 전인이고 초인이라고 했다). 그래서 은엄폐다. 은폐도 숨는 것이고, 엄폐 또한 숨는 것이므로 숨는 것에 숨는 것이 겹친, 이중으로 숨는 것이다. 자기 내면으로 숨는 것인가. 자기 내면으로 도망하는 것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숨는 데는 패턴이 최고다. 일종의 위장막을 생각하면 되겠다. 그렇게 위장막 뒤에 숨었다가, 점차 위장막이 된다. 패턴 뒤에 숨었다가, 점차 패턴이 된다. 스스로 패턴이 되고, 위장막이 되고, 일렁임이 된다. 그렇게 내가 수면에 부유하는 물 조각이 된다. 여기에 또 다른 부유물들(마블링이 만든)이 물 조각에 합세하면서 나는 이중삼중으로 숨는다. 비록 이중삼중으로 숨어있어서 작가가 잘 안 보이지만, 부디 그 숨은 곳이 자기 내면이기를 바라고, 거기서 또 다른 자아 그러므로 자기_타자와 투명하게 만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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