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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남, 맥아서 비니언 / 그리드와 감각

고충환

포커스 리뷰

박영남, 가나아트 나인원, 8.24-9.18. 
맥아서 비니언, 리만머핀 서울, 9.1-10.22. 



그리드와 감각 



비가 내리고, 해가 나고, 눈발이 날리는 날씨가 내 작업이다, 라고 박영남 작가는 말한다. 그래서 전시 주제도 <낮과 밤>이고, <해가 뜨고 해가 지고>라는 부제도 붙였다. 하늘과 구름과 날씨와 같은 자연이 작업의 주제이자 영감의 원천이라고도 했다. 하고많은 자연 중에 하늘과 구름과 날씨처럼 변화무상하고 가변적인, 그래서 결정적인 형태로는 붙잡을 수도 없는 자연현상을 어떻게 그리는가. 왜 날씨를 그리는가. 도대체 날씨를 그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아마도 지난 2019년 모네를 오마주한 전시가 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종전 작업에서의 그리드로 구획된 규칙적이면서도 기하학적인 패턴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도, 그리드 자체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도, 그리고 그렇게 엄격하면서도 자기 절제적인 추상 화면이 해체되면서 유기적인 전체와 모호한 분위기를 더듬기 시작한 것도 그 이후였을 것이다.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모네의 무엇이 작가를 건드려 자기 변신을 시도하게 했는가. 주지하다시피 모네는 인상파의 대가로서, 평생을 변화무상한, 가변적인,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어서 붙잡을 수도 없는, 그래서 어쩌면 덧없고 무상한 형태를 좇았던 화가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현상을, 그래서 어쩌면 더 생생한 인상을 좇았던 화가다. 그 회화적 경향성에 대한 반성이 세잔을 자극해 바람에 미동도 하지 않을 것 같은 구조주의 회화를 창안하게 만든 화가이기도 하다. 특히 모네가 말년에 그린 수련 연작은 가스통 바슐라르를 자극해 유명한 물질적 상상력 개념을 착상하게도 했다. 그에 의하면 화가의 그림은 빛과 바람과 공기와 물과 같은 자연현상이 화가의 주관적인 감정과 상호작용한 유기적인 전체라고 본다. 

그렇게 작가는 자연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연현상을 더듬기 시작했다. 물론 종전 그리드 그림에서도 자연을, 그리고 자연현상을 어떤 식으로든 함축했을 것이지만, 이후 작가는 자연을, 그리고 자연현상을 가두던 그리드를 깨고 분방한 자연현상 그대로를 인정하기로 했고, 본성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면서 덩달아 그림도 분방하고, 모호하고, 역동적이고, 생생하고, 유기적인 형태로 변했다. 니체를 인용하자면, 아폴론적 충동에서 디오니소스적 충동 쪽으로, 코스모스 곧 질서를 추구하던 것에서 카오스 그러므로 분방한 생명력의 무분별한 분출 쪽으로 이행해 갔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엄정하고 기하학적인 질서를 넘어 유기적이고 무분별한 질서 쪽으로 질서 자체가 진화해 갔다고 해야 할까. 

여하튼 그렇게 작가의 근작에서 더 이상의 그리드를 찾아볼 수는 없다. 작가의 그림에서 특징적인 면으로 치자면 캔버스를 바닥에 깔아놓고 그린다는 점이고, 손바닥을 포함한 손가락으로 그린다는 점이다. 사실상 몸으로 그리고, 감각으로 그린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다. 캔버스가 곧 대지라는 작가의 말처럼 자연에 더 가깝게 다가가고 싶어서, 자연의 생리를 더 밀착되게 호흡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렇게 캔버스 속으로 걸어 들어간 작가는 그 자신 이미 자연의 한 부분이 된다. 캔버스가 대지 곧 자연일 것이므로. 

그렇게 캔버스 속에서 작가가 그리는 날씨란 사실은 자연과 긴밀하게 호흡하는, 자연과 살갑게 느끼는, 그리고 여기에 날씨만큼이나 변화무상한 작가 자신의 생체리듬이 상호 간섭되면서 유기적인 전체를 일구는 우연하고, 무분별하고, 생생한 행위일 것이고, 과정일 것이고, 그 행위와 과정을 기록한 흔적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내가 이미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자연에 속해져 있으므로 자신과 자연, 자신과 세계, 자신과 우주를 주와 객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현상학의 우주적 살 개념이 확인되고 실천되는 대목이라고 해도 좋고, 그 자체 한동안 작가의 작업을 견인하는 태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손으로 그리는, 그러므로 사실상 몸으로 그리고 감각으로 그리는 또 다른 작가가 있다. 맥아서 비니언이다. 크게 보면 그렇지만, 세부를 보면 사뭇 다르다. 오일 스틱을 꼭꼭 눌러서 그리는데, 주체를, 자기 정체성을 화면에 아로새겨 넣는다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런 만큼 작가는 특히 그림 속에 자기의 흔적을 남기는, 자기를 새겨 넣는 일에 관심이 많고, 자신의 그림이 정체성을 반영한 그림으로 읽히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본격적으로 몸으로 그리고 감각으로 그린 경향성의 회화로 분류하기에는 저어되는 부분이 없지 않다. 개념적이면서 감각적인, 개념과 감각이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낸 회화라고 해야 할까. 

문제는 작가의 그림에서 주체 혹은 정체성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한눈에도 작가의 그림은 그리드가 강조된다는 점에서 하나의 모나드(그러므로 모듈)를 반복 재생산하는, 그러므로 연속과 반복에 기초한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따른 경향성의 회화로 보인다. 비정형의 얼룩과 같은 흔적이 없지 않지만, 크게는 색면구성에 바탕을 둔 색면화파의 그림으로도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색면화파는 클레멘테 그린버그가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실행한 경향성의 회화로 예시한 바 있다. 평면과 색면이 하나의 층위를 이루고 있는 것이 평면성과 최소한의 형식요소로 나타난 모더니즘 환원주의에 부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환원주의는 회화가 성립 가능한 최소한의 조건으로의 환원을 의미하므로 다만 회화에 대한 논리와 개념이 있을 뿐, 작가의 개성을 위한 자리는 없다. 이후 회화에 대한 논리와 개념을 거머쥔 것이 개념미술이고, 작가의 개성을 위한 자리가 없다는 사실, 그러므로 작가의 죽음과 익명성을 발전시킨 것이 미니멀리즘이다. 

이처럼 적어도 논리적으로 보기에(물론 회화가 논리만일 수는 없지만) 작가의 개성이, 주체가, 자기 정체성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그림 어디에 작가가 있는가. 사실 작가의 그림은 이중그림이다. 두 레이어가 한 몸을 이루고 있다. 색면 밑에 숨은 그림이 있다는 말이다. 작가 자신의 여권, 출생증명서, 주소록 등 개인적인 문서가 빼곡하고, 때로 악보도 보인다. 그중에는 아마도 일정을 기록한 것과 같은 사사로운 메모도, 영수증도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다 무엇인가. 아마도 작가는 이 모든 문서와 메모가 다름 아닌 자신의 일상으로부터 유래한 것인 만큼 자신의 분신이라고 생각했고, 그 분신 그러므로 자신의 또 다른 몸 위에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주체를, 자기 정체성을 그림에 반영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색면 뒤에 자기를 숨겨놓고 있었고, 그 그림을 그린 주체를 웅변하고 있었다. 이중적인 그리기 혹은 중의적인 그리기를 통해 모더니즘 패러다임으로 죽은 작가를 되살려내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는 자신의 이중적인 그림, 중의적인 그림을 <DNA 연구/ 시각적인 귀>라고 부른다. 회화의 생리를 연구한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고, 여기에 특히 DNA가 개인차를 갖는 것인 만큼 다름 아닌 자신을 연구한다는, 자신을 반영한다는, 그럼으로써 자신의 그림과 여타 색면화파의 그림과는 다르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시각적인 귀에 있다. 시각적인 귀? 귀로 본다는 의미일 것인데, 그렇다면 귀는 도대체 어떻게 보는가. 소리를 색깔로 환치하는 공감각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에게 소리는, 음악은, 특히 재즈는 영감의 원천이 된다. 그림의 바탕화면으로 악보가 도입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런 공감각을 염두에 두고 보면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격자 패턴도 예사롭지 않다. 반복 패턴으로 나타난 격자가 리듬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리듬이 공교롭게도 재즈의 리듬과 겹친다. 


박영남 작가가 근작에서 보여준 유기적인 그림은 그리드 이후를 예고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 자체 그리드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그리드를 확장하고 심화하기 위한 가능성의 지점을 모색하는 과정일 수 있다. 그리고 큰 격자(색면) 속에 작은 격자(그리드)가 포개져 있는 맥아서 비니언의 그림은 색면화파를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색면회화를 확장하고 심화하기 위한 가능성의 지점을 탐색하는 과정일 수 있다. 박영남 작가가 캔버스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자신 자연의 한 부분으로 화해지는 과정을 통해서, 몸으로 그리고 감각으로 그리는 과정을 통해서 그림 속에 자신을 반영하고 있다면, 맥아서 비니언 작가는 일상으로부터 채집된 사사로운 메모와 문서를 자신의 몸이라고 생각하고 그 위에 색면 그러므로 그림을 덧칠하는 방법으로 자기를 투영한다. 

그렇게 그리드에 대한 이해관계를 매개로, 그림 속에 자기를 각인하고 증명하는 방법을 매개로 두 작가는 서로 통하면서 다르다. 그 통함이, 그 다름이 기왕의 회화 문법을 재사용하는 방법을 예시해주고, 그럼으로써 또 다른 회화적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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