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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규, 검은 거울 속에 정체성의 집을 짓다

고충환




박병규, 검은 거울 속에 정체성의 집을 짓다 



밤이면 거울로 변하는 창. 예술은 세상을 보는 창이라고 했다. 저마다 창을 통해 세상을 본다. 같은 곳을 보면서 다른 것을 본다. 같은 곳과 다른 것의 차이를 재현하고 표현한다. 암시하고 상징한다. 그렇게 예술은 차이를 파생시키면서 세상을 확장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심화한다. 

그렇게 작가 박병규가 보는 창 앞에 선다. 그러므로 작가의 눈을 빌려 작가가 보는 세상을 본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사람 키보다 큰 흑백사진이다. 마른 이끼로 뒤덮인 바위의 표면 질감을 클로즈업한 것도 같고, 검은 배경 탓이겠지만 아스팔트의 표면 질감을 근접 촬영한 것도 같고, 흐르면서 혹은 번지면서 맺힌 크고 작은 비정형의 얼룩이 수묵화를 보는 것도 같고, 소금 결정체가 침전된 심해 이미지를 떠올리게도 된다. 그런데 정작 작가는 먼지라고 했고, 빗물이라고 했다. 수년 동안 내려앉아 쌓인 먼지라고 했고, 비 오는 날마다 빗물에 젖고 마르기를 반복한 빗물 얼룩이라고 했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문명의 이기가 아닌, 자연을 소재로 한 것임은 알겠다. 그런데 왜 먼지와 비인가. 보통 먼지로 뿌연 막이 덮인 차창이나 빗물로 얼룩진 쇼윈도를 소재로 한 경우들은 더러 있었지만, 이처럼 먼지 자체와 빗물 자체를 소재로 한 사진은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적어도 작가가 보기에 먼지와 비에는 의미심장한 의미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 의미가 뭘까. 먼지가 쌓여 막을 만들려면, 그리고 빗물에 젖고 마르기를 반복하면서 겹겹이 중첩된 얼룩 층을 만들려면 상당한 시간이 경과 되어야 하고(여기에 비는 매일 오지도 않는다. 어느 정도 먼지도 그렇지만), 실제로도 그렇게 작가는 한 장의 사진을 얻기 위해 오랜 기다림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기다리고 인내하는, 그렇게 다름 아닌 자신을 되돌아보는 자기반성적이고 자기수행적인 과정이 동반된다. 시간 속으로 자기가 기화된다고 해야 할까. 먼지에 자기를 잊는다고 해야 할까. 빗물에 자기를 내어준다고 해야 할까. 먼지와 빗물에 자기가 동화된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마침내 자기가 먼지가 되고 빗물이 되는 지경에 도달했다고 해야 할까. 

자연이 그린 그림이다. 시간이 그린 그림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자연과 시간이 협력해 그린 그림이다. 여기서 작가는 자연이 그림을 그리도록, 시간이 그림을 그리도록 최소한의 조건을 내어줄 뿐, 정작 자신이 그림 속에 개입되고 매개될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한다. 주지하다시피 미켈란젤로의 말년 미완성 조각은 지금 봐도 현대적이다. 천재 조각가의 번민이 미완의 원인인데, 작가는 돌 속에 이미 그 자체로 완전한 형상(에이도스)이 숨어있다고 했다. 내가 만들지도 않은 완전한 형상이 이미 있다? 그 완전한 형상이란 아마도 자연일 것이다. 스스로 완전한 존재일 것이다. 그 자체 신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작가가 조각가처럼 번민하는 과정을 겪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적어도 존재와 먼지를 동일시하는(존재는 결국 먼지가 돼 사라질 것이므로) 전언에 공감할 것이고, 빗물 속에 내가 지워진다는, 숨는다는, 그러므로 무화 된다는(빗물과 눈물은 구별되지 않는다)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남미의 매직리얼리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타자들이 산다고 했다. 자신과 닮았지만, 정작 자기에 반목하고 적대하는 자기_타자들이다. 여기에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거울 밖 도처에도 그런, 자기를 감시하는 자기_타자들의 시선이 있다고 했다. 작가의 사진은 흑경처럼 보는 이를 비춘다. 그렇게 먼지가 쌓이고 빗물이 흘러내리던 유리창은 밤에 거울이 된다. 자기_타자들이 출몰하는 시간이다. 유령들이 춤을 추는 시간이다. 환영이 자기표현을 얻는 시간이다. 

그렇게 먼지에 내가 비치고, 빗물이 나를 비춘다. 그러므로 어쩌면 먼지가, 빗물이 거울에 비친 자기_타자였다. 그렇게 먼지를 소재로 한, 빗물을 소재로 한 작가의 사진이 사진 속에서 자기_타자와 만나는(레비나스라면 초대한다고 했을),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원형과 만나는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의 작업을 예시해주고 있었다. 


집을 짓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무용한, 어쩌면 그래서 오히려 의미가 있는. 또 다른 설치작업에서 작가는 현대 건축 구조의 최소단위구조에 해당하는 H 빔을 반복적으로 해체하고 조립한다. 집의 경계를 이루는 알루미늄 펜스를 반복 중첩 시키는 방법으로 중심성이 강한, 대개는 마치 그 자체 질서의 표상이라고 해도 좋을 좌우대칭이 뚜렷한 형태의 모듈을 구축하고 해체하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전시장 바닥 여기저기에 주춧돌이 놓이고, 디딤돌이 놓이고, 기단이 놓인다. 사람들은 그렇게 설치된 주춧돌을, 디딤돌을, 기단을 기초 삼아 저마다 머리에 그리는 집을 완성해볼 수 있다. 머릿속에 그리면서 재구성해볼 수 있다. 

저마다 머리에 그리는 집을 재구성하고 변주하고 완성해볼 수 있는 놀이, 그러므로 일종의 집짓기 놀이에 라도 초대한다는 의미일까. 저마다 머리에 그리는 집? 그것은 어쩌면 유토피아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유토피아는 없는 장소, 부재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실제로는 없는데, 다만 사람들의 의식으로만 존재하는 장소를 뜻한다. 유토피아가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이처럼 없는 것, 그러므로 부재로부터 온다. 우리는 이처럼 언제나 없는 것을 욕망하고 부재를 욕망한다는 사실에 인간의 부조리가 있고 삶의 역설이 있다. 그렇게 작가가 초대한 집짓기 놀이는 집을 매개로 존재론적인 문제(욕망, 그러므로 결여와 결핍과 관련된)를 건드린다. 

그리고 집짓기 놀이는 사회를 건립하고 도시를 건설하는, 일종의 사회 구조화 놀이의 작은 판형으로 제안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요셉 보이스는 사람들의 의식을 재료 삼아 의식을 개조하는 사회 조각을 주장한 적이 있는데, 이처럼 의식화 놀이의 또 다른 판형으로 읽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집짓기 놀이는 집을 매개로 존재론적인 층위에서의 문제와 함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를 건드린다(의식은 곧 정치적인 문제일 것이므로). 

한편으로 작가의 작업은 이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읽을 수도 있는데, 바로 집을 짓고 허물기를 반복해서 보여준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해볼 때 그렇다. 작가는 비록 집을 짓고 있지만, 결코 완성 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상상해볼 수 있는 여지를 줄 뿐 정작 완성된 형태를 제안하지는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작가 자신 스스로 구축과 해체를 반복하고 있다는 말이다. 집의 완성된 형태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서일까. 끊임없이 집이라는 주제와 소재에 천착하면서도, 정작 결정적인 이유와 의미를 찾지 못해서일까. 반복 자체에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여기서 오히려 바로 그것, 그러므로 반복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동토로 유명한 시베리아 수용소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형벌은 땅을 파고 묻기를 반복하는 형벌이라고 한다. 그것이 가장 피하고 싶은 형벌인 것은 자신이 지금 철저하게 무용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의식 때문이다. 그 선후에 산꼭대기에 돌을 밀어 올리기를 반복하는 시시포스 신화가 있고, 자기를 궁지에 몰기를 주문하는 니체의 전언이 있다. 자기를 궁지에 몰아넣어라. 그러면 내면이 열릴 것이다. 자기를 궁지에 몰면, 더는 갈 데가 없고, 다만 내면으로 말고는 남아있는 것도 도망갈 데도 없다. 그래서 내면이 열린다. 자기 자신에게마저 아득한, 잊힌 자기_타자가 되돌아오는 것이다. 니체는 그렇게 되돌아온 자기_타자를 전인이라고 불렀고 초인이라고 했다. 

작가의 반복행위가 의미가 있는 것은, 어쩌면 철저하게 무용한 노동이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이래서이다. 그렇게 먼지를 소재로 한, 빗물을 소재로 한, 집짓기를 소재로 한 작가의 사진 설치작업은 한갓 먼지로 화한, 빗물과 함께 흘러가 버린, 반복 속에 숨은 잊힌, 아득한, 낯선 자기, 그러므로 자기_타자를 맞아들이게 만든다. 그렇게 작가는 검은 거울 속에 비쳐 보이는, 먼지에 중첩돼 보이는, 빗물 위에 어른거리는 자기, 그러므로 자기_타자를 더듬어 찾고 있었다. 짖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헌신적인, 그러므로 어쩌면 윤리적이기 조차한 무용한 행위를 통해서 자기 정체성의 집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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